에필로그
분명 집에서 무게를 쟀을 때는 21kg이었는데. 체크인을 하며 항공사 컨베이어 벨트에 위탁수하물을 올려두었더니 24라는 세 획의 무게가 더해진 빨간 숫자가 깜빡깜빡 거립니다. 경거망동 데스크 앞에서 짐을 빼려다 호통을 듣고는 한참을 기다려 다다랐던 긴 줄에서 빠져야만 했습니다. 물건을 빼서 친구에게 맡기거나 버리거나. 체크인을 마치니 바로 출국심사를 하러 가야 할 시간이라, 배웅해준 친구와 극적인 장면도 연출하지 못한 채 한 번의 진한 포옹으로 서로의 무사 귀가를 빌어주었습니다. 더블린에 머물면서 열 번도 넘게 들락날락했던 더블린 공항도 이제 마지막이구나. 그다지 특별할 것 없다고 생각했던 공항 내부의 모든 것들을 천천히 눈에 쓸어 담아봅니다. 하필 그 날은 한국에 태풍이 온 날이라 전날부터 가족과 친구들의 우려의 문자가 끊이질 않았는데, 정작 당사자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지요. 장장 16시간. 아부다비를 경유하여 드디어, 정말로 한국에 왔습니다.
공항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한글은 어색하기 짝이 없고, 외국인에 비해 현저히 높은 비율을 보이는 한국인들의 모습도 낯설기만 합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수하물을 찾고는 드디어 출구로 나갔습니다. 두리번두리번 가족들을 찾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야!!!” 세상 다정치 못한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일 년 반 만에 만나는 가족들. 얼굴을 보자마자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듯 눈물을 흘릴 줄 알았건만. “와! 오랜만이야!” 그것도 엄마와의 포옹만으로 마치 스타카토와도 같은 반색으로 점을 찍고는 주차장으로 이동했습니다. ‘왜 이리 말랐냐.’ ‘왜 이리 얼굴이 상했어.’ 귀국 전에 버터와 치즈를 집중적으로 먹어둔 터라 살이 빠졌을 리가 없는데. 엄마의 눈에 비치는 자식의 모습이란 늘 애석한 모양입니다. 주차장으로 들어서자마자 덮치는 후덥지근한 공기는 듣던 대로 어마 무시했지요. 그토록 열망하던 자장면과 탕수육을 먹고서야 '집'에 도착했습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저의 낡은 핸드폰이 용케도 우리 집의 와이파이를 기억하고는 잡아냅니다. 제가 없을 동안 새로 산 물건들이나 가구 배치로 모양새가 조금 바뀌긴 했지만 ‘우리 집이다!’ 익숙한 풍경은 한눈에 들어옵니다. 더블린에 처음 갔을 때 시차 적응 시간이 일주일이나 걸려서 이번에도 그렇겠거니 했는데 첫날부터 새벽에 단 한 번도 깨지 않은 채 다행히 아침의 범위에 속한 6시에 눈을 떴습니다. 시차적응이 이렇게 빠르면 다른 건 말할 것도 없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애를 먹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화장실 사용 방법. 뒤처리를 한 휴지를 변기에 넣고 거세게 물을 내렸던 아일랜드의 생활이 이미 몸에 배어 자동적으로 휴지를 변기 안에 넣고는 아뿔싸 하기를 수십 번이지요. 우리 집 수압이 이렇게 약했었나 매 번 놀라기도 합니다. 벌써부터 구직활동과 새로운 공부를 준비하는 요즘은, 그럼에도 어째 완전히 돌아왔다기보다 잠시 여행을 하는 순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나만의 재료를 찾겠다고 그리 당찬 포부를 내비치며 다녀온 더블린에서 그래 일 년 반 동안 저는 삼산같이 영양가 있는 것들을 과연 캐냈을까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그대로이기도,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들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들을 2배속으로 되감기 한다 해도 하나하나 나열하기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므로. 공통적이자 가장 큰 줄기를 꼽자면 바로 오래전 덮어버렸던 ‘나의 진짜 성향’입니다. 돌이켜보면 대학 3학년 때 즈음 성격이 많이 바뀌었었습니다. 원래는 참 내성적인 사람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누군가에게 말 거는 것에도 겁을 내지 않았고 활발한 성향을 띄어가고 있었지요. 가족이나 친구로부터, 혹은 당장 짊어져야 하는 어떤 책임감으로부터 떨어져 지냈던 아일랜드에서 깨달은 것은 저는 정말 정적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활발해지던 시점은, 취직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대외활동이나 사회경험을 위해 억지로 저를 개조시켰던 몸부림이었던 것이지요. 동적 기류에 편승하여 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르던 그때. 그걸 인정하고 나니 1년 6개월이라는 공백기간이 생긴 서른 살의 여자에게서 조급함이 도망을 칩니다.
“에이 뭐야! 뭐 엄청난 거라도 발굴하러 간 줄 알았더니만 고작 그런 추상적인 말이 당신이 얘기할 수 있는 전부예요? 정말 실망이에요!”라고 말씀하신다면 고개를 들 면목이... 그렇지만 어쩌면 한국에서 그 정도면 계속 이어갈 수도 있었을 보장된 삶을 과감히 포기하고, 모든 것을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며 저의 내면으로 수렴된 이 추상적인 재료들이 언젠가는 세상으로 아주 또렷이 발산될 수 있을 거라는 실낱같은 확신이 저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한국에 온 지 일주일째. 현관문에 들어서자마자 와이파이를 기억하여 잡아낸 제 핸드폰처럼 저도 아주 빠른 속도로 한국에 적응하는 중입니다. 더블린에서는 절대 맛볼 수 없는 한국음식의 향연을 즐기느라 아직은 ‘그때가 좋았지.’라는 회상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곧 해가 지면 다 함께 어두워지던 건물들이, 대낮에 창문을 활짝 열어도 고요했던 동네가, 함께 요리해서 나눠먹기를 좋아했던 나의 그대가 그리워짐과 동시에 삶의 동력이 되는 날들도 오겠지요.
2017년 2월 23일부터 2018년 8월 23일까지. 하필 그 날짜에, 하필 더블린에 다녀오게 되어서,
정말 영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