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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징카 Nov 21. 2022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리뷰와 해석

자신의 삶을 지켜내는 모든 투사들에게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얼 앳 원스



정말 굉장한 영화였다. 방심한 순간 모든 것이 한 번에 몰려오는 한 편의 현대미술 같은 영화.


터무니없어서 웃음이 나는 판타지적 상상력은 주인공이 처한 고된 현실의 문제와 갈등을 강조하면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더욱 강렬하게 만드는 듯했다. 오늘은 난생처음으로 영화관에서 같은 영화를 두 번이나 본 기념으로 영화 리뷰와 해석을 쓰려한다. 다소 난해해서 이해가 어렵다는 반응들도 있었는데 나만의 시선으로 이해한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 대해 적어보도록 하겠다.




갑자기 펼쳐진 멀티버스가 의미하는 것

웨이먼드와 결혼한 후 미국에 이민을 와 세탁소를 운영하는 에블린. 여느 날과 같이 바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에블린 앞에 갑자기 알파 웨이먼드가 등장한다. 죽을 위기에 처했으니 살고 싶으면 자신의 지시를 따르라고 말하며 말이다. 하필 왜, 국세청에 세금 신고를 하러 온 바로 지금? 전투하듯 바삐 살아가던 에블린에게 왜 갑자기 멀티버스의 세계가 열렸을까?


에블린은 멀티버스와 엮기고 싶지 않다며 자신을 그만 내버려 두라고 말하지만, 알파 웨이먼드는 혼란스러워하는 에블린에게 묻는다. 혹시 요즘 무언가 변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냐고, 편하게 입던 옷이 예전 같지 않고 커피맛이 이상한, "무언갈 되돌리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냐고 말이다.


에블린은 투사였다. 세금 신고를 잘 못한 나머지 탈세 혐의로 세탁소는 가압류당하기 직전이며,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모셔야 했고, 설상가상으로 그녀의 딸 조이와도 거리가 멀어지는 듯했다. 그런 와중, 항상 낙천적이어 보이는 남편은 이런 팍팍한 삶에 뾰족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에블린이었다. 웨이먼드가 이혼을 준비하고 있는지 모르는 채로 말이다. 마치 그녀의 삶은 전투 같았다. 싸워내고 지켜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이런 와중 그녀에게 멀티버스 세계가 펼쳐진다. 다른 차원에서 각기 다른 선택을 통해 살아가는 에블린들의 세계. '만약에 내가 그때'로 시작하는 삶의 무수한 선택의 순간. 다른 선택을 했다면, 내 인생은 달라져 있을까라는 질문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보는 상상이다. 대게 현재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 우리는 일종의 도피로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영화에서의 멀티버스는 에블린이 고달픈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소망이 아닐까 싶다. 삶이 무너져 간다고 느낀 가장 최악의 순간에서 도망가고 싶은 상상의 도피처로 버스 점프를 할 수 있다면, 하는 소망 말이다.  




버스 점프, 가장 멍청하고 황당한 방식으로

그런데 다른 차원의 인생으로 버스 점프하기 위한 조건이 있다. 바로, 뜬금없는 행동하기.

극 중 에블린은 똥파리를 콧구멍으로 빨아들이거나 진지한 상황에서 갑자기 우스운 춤을 추는 등 황당하고 어이없는 행동을 해야만 했다. 다른 멀티버스로 점프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 우스꽝스러운 행동들 때문에 치열하게 싸워나가는 에블린의 모습은 애처롭지 않고 유쾌해 보였다. 사실 삶은 때론 잔인하리만큼 아프고 슬프기도 하지만, 이런 황당무계하고 무용한 것들로 인해 계속되어 갈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하게 만드는 연출이다. 이겨내기 힘든 고난들 앞에서 때로는 그냥 퍼질러 웃기, 황당한 일들을 하기. 지치지 않고 계속 삶을 살아 나가기 위해서 말이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 1 : 우리는 모두 투사다

어떤 멀티버스에서 에블린은 쿵푸를 숙달한 뒤 유명 액션 배우가 되어 화려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웨이먼드와 결혼을 선택하지 않은 인생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다시 그를 만나게 되는데, 빨랫감에 장난감 눈알을 붙이는 등 실없고 낙천적인 웨이먼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의 그에게 이끌린 에블린은 그에게 키스하려 하지만, 웨이먼드는 신중히 선택하라며 경고한다. 그럼에도 에블린은 그에게 끌려 입을 맞췄다. 한 때, 당신이 없는 삶은 너무나 환상적이었다는 말을 남편에게 하기도 했던 에블린이었는데 말이다.


웨이먼드는 그런 그녀에게 이야기한다.


"당신은 스스로를 투사로 생각하겠지. 당신은 항상 긍정적인 내가 나약하다고 생각할 거야. 그런데 말야, 그게 내가 싸우는 방식이야. 부드러움은 살아남기 위한 내 전략이야. 내 삶에서는 나도 투사야."



담배를 태우며 진지한 모습으로 전한 웨이먼드의 말은 새로운 발견이자 깨달음이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삶에서 투사라는 것. 각기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더 너그러워질 수도, 더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여전히 다른 차원에서도 웨이먼드를 만나게 된 것처럼, 인생에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필연성이 있다. 선택에 후회가 남아 그때 그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멀티버스로 가는 꿈을 꿔보기도 하겠지만 그 무수한 가짓수의 선택들에 항상 정답만을 솎아 낼 수 있을까, 그리고 그건 과연 정답일까?


에블린은 영화 후반부에서 웨이먼드를 이해하게 된다. 드세고 때론 억척스러워져야 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에블린은 남편 웨이먼드의 부드러움을 익혀 고난과 맞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정하게 싸우는 법을 익히는 중이야"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부드러움이 가진 강인함. 우리 모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서로에게 조금은 더 너그러워지는 건 어떨까. 결코 몰랐던 새로운 발견과 깨달음을 얻을 지도, 성장할지도 모른다.



조부 투바키가 만든 베이글의 의미

영화에서 에블린의 딸 조이의 또 다른 자아 조부 투바키는 싸워 나가야 할 강력한 어둠의 존재로 그려진다. 멀티버스를 넘나들며 에블린을 찾아다닌 조부 투바키는 에블린을 만나 자신이 베이글을 만든 이야기를 한다. 사실은 에블린을 죽이려는 게 아니라, 이 베이글을 보여주려고 했다며 말이다.


자기가 인생에서 만난 모든 것(everything)들을 베이글에 올렸더니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었다고 조부는 말한다. 다 상관없다고, 의미가 없다고 해버리면 삶을 아프게 하는 모든 고통과 죄책감은 사라진다고, 블랙홀 같은 베이글에 빨려 들어간다고 말한다.


“If Nothing Matters, Then All The Pain And Guilt You Feel For Making Nothing Of Your Life Goes Away – Sucked Into A Bagel.”


영화에 등장하는 베이글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 메타포이다. 파괴적이고 우울한 삶의 태도이자, 모든 게 의미 없다고 치부하는 자포자기의 허무함. 그리고 극단적으로는 모든 걸 포기하는 상태인 죽음 등으로도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해와 사랑을 갈구하는 애처로움이기도 하다.


조부 투바키는 에블린에게 베이글을 보여주며 "죽어버리고 싶어서 만들었다"라고 털어놓지만, 사실 이중적으로 "나는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는 이만큼 모여 검은 블랙홀을 이뤘으니 제발 나를 이해해주길" 하는 조이의 마음 들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엄마인 에블린을 끌고 와서는 직접 베이글을 보여준다. 그리고 손을 잡고, 함께 침전하자, 함께 어둠으로 가버리자라고 하지만 사실 조이가 원했던 것은 온전히 이해받고 싶은 엄마의 사랑이었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 2 : 초월적인 사랑, 가족


에블린은 다양한 멀티버스를 걸쳐가며 조부 투바키를 만난다. 그들은 어디서든(Everywhere) 만난다. 죄수와 간수로 교도소에서, 그림이 되어 스케치북에서, 나무에 매달린 피냐타로 파티장에서, 그리고 돌이 되어 그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는 고요의 우주에서도 만난다.


돌이 된 조부 투바키와 에블린은 서로 고요 속에서 대화한다. 돌은 움직일 수 없지만, 돌이 되어서도 에블린은 스스로를 움직여 조이에게 다가갔고 이내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져버리는 조이를 향해 망설임 없이 절벽으로 몸을 던졌다. 말하지 않아도, 움직일 수 없어도 에블린은 초월적인 방식으로 조이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조이를 붙잡아보려는 에블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이는 베이글로 빨려 들어가 길 선택하는데 그때 에블린과 웨이먼드, 에블린의 아버지는 모두 힘을 모아 조이를 붙잡는다. 그리고 에블린은 필사적으로 조이를 막아서며 외친다, "I am your mother"


엄마와 딸로서 서로에게 무수한 상처들을 줬을 테고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라는 존재는 언제나 딸을 품어줄 존재라는 걸 영화는 말해준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것들을 해내고 그곳이 낭떠러지더라도 고민 없이 자신을 내던지는 것. 그리고 그곳이 어디일지라도 곁에 있어 주려 하는 것. 엄마와 아빠, 할아버지로 대표되는 가족만이 줄 수 있는 초월적인 사랑과 힘, 유대에 대해 영화는 몹시나 세련되고 유쾌한 방식으로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삶의 모든 것 (Everything)은 다양하다. 모든 사건, 모든 감정, 무용한 사물이나 현상 등 그 모든 것들이 삶에 온다. 원하든 원치 않든 우연이건 필연이건, 삶에는 무수한 선택과 결과가 있기에 때론 난처한 결과에 맞서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싸워내야 한다. 이해받지 못하고 혼자인 듯 외로워질 수도 있다.


하지만, 삶의 모든 곳에는 (Everywhere) 나는 혼자가 아니라고 나를 응원하고 일으켜 세워주는 마음들이 있다. 때론 끊어질 듯 팽팽한 줄다리기를 할 때도, 닿지 못할 만큼 멀리 와버렸다고 생각이 들 때도,가족의 사랑은 그 모든 곳에서 초월적이라서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닿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모두 뭉쳐 한꺼번에(All At Once) 몰려오는 어느 날엔, 그 소중함이 벅차서 조용히 혹은 소리 내어 울어버릴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을 지켜내는 모든 투사들을 위한 영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다른 분들은 어떻게 이해했을지 궁금하기도 한데, 댓글로 감상들을 달아주면 즐겁게 읽어볼 것 같다.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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