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믿지?』(폴앤니나, 2020) 수록작
28번 버스를 타고 영인시청 앞을 지나다 보면 언니네 사진관 간판을 볼 수 있다. 모서리가 네모진, 주로 고딕체 글자의 간판들 사이에서 유독 궁서체로 만들어진 <한 사진관>의 간판을 보면 절로 고개가 갸웃거려졌는데, 그건 글자가 왼쪽 아래로 많이 기울게 배치해 둔 탓이다. 위, 아래, 옆으로 나란히 붙은 간판들 때문에 간판 자체를 기울게 설치할 수는 없었나보다. 좁고 반듯한 사각형 간판 안에서 글자들이 최대한 대각선으로 기운 것을 보다 보면, 따라 왼쪽으로 기우는 고개를 대충 다시 바로 세우게 되고는 했다. 언니, 왜 간판 글자를 저렇게 붙였대? 쳐다보고 있으면 자꾸만 목이 이렇게, 이렇게 기울잖아. 그러자 언니는 눈이 작아지도록 환하게 웃으면서, 그러라고, 목을 그렇게, 그렇게 기울이라고 그렇게 붙인 거야, 라고 말했었다.
횡단보도를 지키는 신호등의 초록불이 서른아홉 번쯤 깜빡깜빡한 것 같다. 이 신호등의 초록불은 유독 다른 곳보다 길다. 시간을 재어가며 비교해 본 적은 없지만 나만 느끼는 건 아닌 것 같다. 좀 전에 이 버스가 이 신호등을 앞두고 멈췄을 때, 분명 버스 안의 누군가가 아이씨, 또 걸렸네, 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거든. 언니, 저 신호등 있잖아, 그건 왜 그렇게 초록불이 길어? 사람 속 터지게. 그럼 언니는 또 그 작아진 눈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것도 매일 보다 보면 괜찮아. 한숨 고르고 딴생각하다 보면 금세 빨간불이야.
언니의 부탁으로 영인시까지 왔다갔다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다른 일로 사진관을 잠깐잠깐 비워야 하는데 그때마다 계속 닫아둘 순 없으니 그냥 자리만 좀 지켜달라 했다. 교통비며 식대며 시급까지 넉넉하게 쳐주겠다는 말에,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누가 백수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나는 노트북 한 대 짊어지고 신나게 출퇴근을 했다.
도착 5분쯤 전에 톡이 왔다. 먼저 나가볼게, 두 시간쯤 후에 올 테니 점심 같이 먹자. 언니는 내가 10시쯤 도착을 하면 출발해서 두어 시간쯤 있다가 오곤 했다. 응, 이라고 회신한 후 곧 사진관에 도착했다. 카운터 옆에 작은 책상을 하나 놓고 내 작업을 했다. 일은 꼭 몰려서 한꺼번에 들어오는 법인지, 사진관에 나오기로 하자마자 외주 계약 하나를 딴 참이었다. 언니의 사진관에서 페이도 받고 밥도 얻어먹고 본업도 할 수 있으니 꿀 같은 기회였다. 이번에 외주비도 들어오고 언니한테 용돈도 받으면 내 기필코 좀 더 가벼운 노트북으로 바꾸리라.
노트북에 전원을 연결하느라 숙였던 허리를 펴자 카운터 책상 안쪽에 벽 쪽으로 돌려 세워진 작은 액자 하나가 보였다. 내 쪽으로 돌려놓고 보니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 액자 안에 있다. 조카 영민이가 그새 이렇게 컸구나, 하고 5초쯤 놀란 후 나는 다시 작업을 위한 세팅에 집중했다.
3년 전 이혼 후 영인시로 훌쩍 떠난 언니는 가족들과 왕래가 거의 없었다. 가족이라고 해 봐야 엄마와 나 정도였지만. 나는 한창 회사를 그만두네, 마네 하며 정신이 없었던 시기였고, 엄마는 아빠가 남겨놓은 빚을 수습하러 다니느라 바빴다.
애 아빠가 멀쩡하게 돈 벌어오면 그걸로 된 거야, 무슨 이혼이야. 나를 봐, 너희 아빠는 속만 썩이고 돈 한 푼을 제대로 안 벌다가 결국 이렇게 보증 빚만 잔뜩 남겨놓고 도망가 버렸잖아. 엄마는 언니에게 어떤 놈을 만나도 다 그놈이 그놈이라며,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이혼할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다. 눈의 초점 따위는 눈물에 씻어내기라도 했는지, 멍한 눈으로 언니는 중얼거렸다. 엄마, 나는 평생 혼자 다 해 와서 충분히 할 수 있잖아. 엄마 아빠가 날 그렇게 키웠잖아. 그 웅얼거리는 소리를 기어코 들었던 엄마는 울면서 언니의 등짝을 때렸다. 그래, 해라, 해. 너 그렇게 잘났으니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이 사사건건 삐뚤어진 것아.
나와 열다섯 살이나 차이 나는 언니는 조용하고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아빠가 저지르는 사고들을 엄마와 함께 수습했던 언니는 늦둥이인 나와는 다른 삶을 살았다. 밤낮으로 일을 해야 했던 엄마 대신 언니는 나를 가장 많은 시간 돌보는 사람이었다. 어린 몸으로 육아와 공부와 일을 해내며 자란 언니는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집에서 도망치듯 결혼을 했다.
결국 아이 아빠와 시끄러운 소송 끝에 헤어진 언니는 당시 고등학생이던 조카 영민이를 데리고 연고도 없는 영인시로 이사를 가 버렸다. 양육비 따위 제대로 줄 리 없어 보이는 그 남자와 헤어지고 혼자 아이를 키우며 생업을 이어가기가 버거웠을 것도 같은데, 언니는 아무에게도 도와달라는 말 한마디 한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언니가 평생 처음으로 내게, 도와달라는 연락을 해 온 것이 2주 전이었다.
언니, 영민이는? 잘 지내? 다짜고짜 자신을 좀 도와달라며 전화를 걸어온 언니의 숨이 가쁘게 느껴졌다. 그런 언니에게 난 조카의 안부를 물었다. 영민이는 얼마 전에 입대했다고 했다. 중요한 일인데 기별이라도 하지 그랬어, 하는 내게 언니는 괜찮아, 나중에 제대하고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어, 했다. 아들의 입대 따위 지금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듯 언니의 목소리에서 묻어난 피로가 손으로 만져질 것만 같았다. 응, 언니, 다음 주부터 그쪽으로 출근할게, 하고 말았다.
딸랑딸랑, 문 위에 달린 작은 종이 흔들렸다. 부스스하고 긴 노란 머리카락의, 초췌한 안색을 한 여자가 들어왔다. 마스크 위로 보이는 두 눈이 때꾼한 것이, 프로필 사진을 찍을 거라면 보정을 많이 해야겠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저기, 사장님 안 계신가요?”
“안녕하세요? 혹시 예약하고 오셨나요? 사장님이 잠시 자리를 비우셔서 12시 넘어서 촬영이 가능해요.”
“예약을 따로 한 건 아니고…… 기회가 되면 들르라고 하셔서요.”
여자는 쭈뼛쭈뼛하며 언니의 명함을 내민다. 잠시만요, 하고 나는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 신호가 가는데도 언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사장님이 전화를 안 받으셔서 아무래도 지금은 만나기 어려울 것 같은데, 12시 이후에 다시 오시겠어요?”
“아니요…… 혹시 여기서 기다려도 괜찮을까요?”
“아, 네, 그럼 이쪽에 앉아 계세요. 책꽂이 보시면 읽을거리도 좀 있어요. 마실 걸 좀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급하게 사진이 필요해 사진관에 들른 손님들은 언니가 없으면 바로 자리를 떴다. 사진이나 앨범을 찾으러 왔다거나 할 땐 내가 찾아서 전달하면 됐다. 사진관은 대체로 조용했고, 해가 잘 드는 창가의 풍경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일할 수 있어서 좋았는데 오늘은 불청객이 하나 온 셈이었다.
그래도 언니의 손님인데 아무것도 대접하지 않자니 마음이 영 불편해 머그잔에 녹차 티백을 하나 우려 얼음을 넣고 여자에게 다가갔다. 여럿이 있어도 스마트폰을 수시로 쳐다보며 대화하는 시대에, 여자는 창가 테이블 앞에 앉아 바깥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기척을 내면서 다가가 컵을 내려놓았다. 더우실 것 같아서요, 녹차예요. 여자는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조용히 고맙습니다, 하고 목례를 하고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평화로운 내 작업장에 적막이 깔리는 기분이 들었다. 답답하다.
<언니, 어디야? 가게에 언니 찾는 손님이 한 명 와 있는데, 언니 올 때까지 기다릴 건가 봐. 보면 전화 좀 해.>
어디에서 뭘 하는 건지 언니는 답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언니가 자리를 비우고 어디를 가는지 물어본 적이 없다. 딱히 궁금해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벌써 일주일을 나왔으면서 그런 것도 물어보지 않은 나도 참 나다. 그저 언니가 주는 용돈 좀 벌어보겠다고 헤헤거리며 와서는 칠렐레팔렐레 신나게 내 일만 하고 있었으니.
부르르륵, 부르르륵. 창가 테이블 위에 놓인 여자의 휴대폰이 야무진 진동으로 울려댔다. 흠칫 놀라는 몸짓이 제법 거리가 먼 카운터 자리에서도 보였다. 뭘 저렇게 깜짝 놀란대. 좀 재미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해서 흘끔흘끔 살폈다. 여자는 테이블 위에서 혼자 부르르 떨고 있는 휴대폰이 마치 자신을 한 대 치기라도 할 것처럼 경계하며 거리를 두었다. 한참 울리던 진동이 멈추고 나서야 여자는 안도하는 듯 보였다.
내가 저기 집중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런데 이놈의 노트북이 아직도 제대로 켜지지 않고 있었다. 아 뭐야, 왜 이래. 한 공간 안에 낯선 사람이 있는 터라 소리 내어 짜증도 못 내고 전원을 살펴보러 카운터 책상 아래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흠, 전원도 문제가 없는데, 아무래도 이놈의 노트북이 갈 때가 되긴 했나 보다. 돈돈돈, 돈을 달라고 보채더니 오늘 가버리신 모양이다. 당장 메일을 확인해야 작업 상황을 확인하고 진행할 수 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카운터 책상에 있는 언니의 컴퓨터에서 메일을 열고 외주 업무의 상황을 체크했다. 급한 것들을 처리하고 나니 바탕화면 한쪽에 있는 폴더 아이콘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증거 사본>.
응? 다른 사람의 프라이버시는 당연히 존중해야 하고 언니의 컴퓨터를 쓰고 있으면서 이것저것 열어보는 것은 당연히 나쁜 것이지만, 폴더명이 너무 심각했다. 나는 창가의 여자를 흘끔 살피고는 폴더를 열었다. 이게 도대체 다 뭐래.
폴더 안에는 웬 사진과 동영상들이 유명한 파일 공유 사이트 이름에 날짜와 번호를 붙인 제목으로 들어가 있었다. 언니가 도대체 뭘 모은 건가. 온통 벗은 여성들의 사진들도 이상했지만 영상을 확인하기 위해 열었다가 너무 놀라 화들짝 창을 닫았다. 이 폴더에는 언니가 촬영한 것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사진들과, 합의 하에 찍은 것으로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영상들이 들어있었다. 언니 뭐야……? 혹시 이런 범죄적인 게 취향인가? 혼란스러워진 나는 다른 영상을 다시 하나 열었다가 비명을 겨우 눌렀다. 영상 속에 등장하는 여성의 얼굴은 분명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아악! 분명 창가에 앉았던 여자가 카운터 앞까지 와 있어서 나는 참지 못하고 짧은 비명을 질러버렸다.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여기, 근처에 편의점이 있나요?”
나는 당황한 낯빛을 겨우겨우 감추고 편의점 위치를 알려주었다. 잘 감추기나 했는지 모르겠다. 모니터 속 영상에 나타난 얼굴도, 내 얼굴도. 내가 본 그 영상 속 얼굴은 분명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그것도 지금 마주하고 있는. 단지 영상 속의 그 여자는 지금의 이 초췌하고 때꾼한 눈을 가진 여자가 아니었다. 카메라의 존재 따위 모른 채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보며 행복해하고 있는, 생기와 사랑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딸랑딸랑. 문에 달린 종이 다시 울리고 여자가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나갔다. 나는 의자에 털썩 앉아 쿵쾅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도대체 뭐지, 이 <증거 사본>은.
전화벨이 울렸다. 네, 한 사진관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얼핏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말은 없었다. 뭐야, 변탠가. 나는 가뜩이나 어지러운 심사가 뒤틀려 짜증을 내며 전화를 끊었다. 그때 언니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누가 왔었어?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어?”
“언니 어디 갔었어? 여러 번 전화했고만. 어떤 여자분인데, 머리카락이 길고, 노랗게 염색했고. 그리고.”
언니 컴퓨터의 영상 속에 있던 사람, 이라고 이야기를 해야 할까 하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안색이 별로 안 좋더라고. 언니 기다리다가 편의점 간다고 잠시 나갔어.”
“편의점? 나 다시 나갔다 올 테니까 밥은 혼자 먼저 먹어. 미안.”
언니는 그렇게 나가서 오후 내내 들어오지 않았다. 그 여자와 만난 건지, 그 여자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언니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도 사실 막막했다. 언니, 나 먼저 퇴근할게, 내일 봐, 라는 톡만 보내고 말았다.
다음 날, 거의 다 도착한 내게 언니는 오후 3시경에 오겠다며 식사는 미안하지만 혼자 챙겨 하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신호등이 열일곱 번쯤 깜빡대는 중이었다. 사진관에서 나온 언니는 신호등 건너편에 선 나를 보지 못하고 허둥지둥 어디론가 향했다. 나는 언니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 걸었다.
선진병원. 병원 입구에서 잠시 언니를 놓쳤다가, 재활병동 쪽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발견했다. 부리나케 쫓아갔지만 코너를 돌면서 언니를 다시 놓쳤다. 언니가 왜 여기에 와 있을까. 누가 입원해 있는 건가? 함부로 여기저기 열어볼 수도 없어서 천천히 복도를 한 바퀴 돌았다. 길게 이어진 복도를 따라 걷다가 나는 어느 재활치료실 앞에서 멈춰 섰다.
언니가 환자복을 입은 어떤 여자 옆에서 치료를 돕고 있었다. 재활치료사의 가이드에 따라 힘겹게 걸음을 옮기던 환자는 균형을 잡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일으켜주려는 치료사를 밀어내며 우는 환자를 언니가 안아 일으켰다.
작고 긴 창 너머로 그 모습을 보던 나는 혹시 눈이라도 마주칠까 싶어 몸을 돌려 나왔다. 병원 밖으로 나와 출입구가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누구였을까. 어린 아가씨니 언니 친구일 리는 없고. 고통스러워 하던 환자의 얼굴 뒤로 보인 언니의 해쓱한 얼굴도 고통스러워 보였던 건 내 착각일까.
40분쯤 지나 언니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다시 뒤를 밟았다. 내가 무얼 하고 있는 건지 나도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어제 본 <증거 사본>의 영상들은 분명 소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쁘고 위험해 보였다. 자초지종을 알아야 나도 뭔가를 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언니는 한참을 걸어 영인시 해바라기센터라고 쓰인 건물 앞에서 멈췄다. 언니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잠시 후 어제 사진관에 왔었던 노란 머리의 여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해바라기센터 안으로 들어갔다.
사진관으로 돌아온 나는 컴퓨터를 켜고 <증거 사본>의 내용을 다시 빠르게 훑었다. 어제는 경황이 없어 발견하지 못했지만, 폴더에는 전체 목록을 정리해 둔 엑셀 파일이 있었다. 피해자의 신체적 특징을 기준으로, 예를 들면 ‘노란 머리_어깨 위 나비 타투’ 같이 이름 지어진 피해자의 영상이 몇 개의 사이트에 공유되고 있는지, 삭제 요청을 언제 했으며 삭제 요청이 받아들여졌는지 등에 대한 내용이 정리되어 있었다. 언니가 왜 이런 내용을 정리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까 언니가 그 여자를 데리고 들어간 해바라기센터가 폭력으로부터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있는 기관이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다. 적어도 언니가 위험한 일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약간은 마음이 놓였다.
딸랑딸랑. 문 위의 종이 울리고 커플룩을 갖춰 입은 여자와 남자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혹시 예약하고 오셨나요? 사장님이 잠시 자리를 비우셔서 3시 넘어서 촬영이 가능할 것 같아요.”
“웨딩 촬영 때문에 상담을 좀 받으려고 왔는데, 스튜디오를 좀 둘러봐도 괜찮을까요?”
“편하게 둘러보세요. 테이블 위 책자에 촬영 패키지 내용과 가격도 있으니까 궁금하신 것은 바로 말씀해 주세요.”
두 사람은 스튜디오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가끔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요즘은 다 플래너 끼고 결혼하던데 스튜디오도 직접 알아보러 다니고, 부지런한 사람들이네. 좋은가 보다. 하지만 거 웬만하면 결혼은 하지 말고 연애들만 하고 살지. 울 엄마 아빠나 언니 사는 걸 보니 그거 별로 좋아 보이지 않던데. 딸랑딸랑. 또 종이 울리고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쓴 남자 하나가 들어와서 카운터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혹시 예약하고 오셨나요? 사장님이 잠시 자리를 비우셔서 3시 넘어서 촬영이 가능할 것 같아요.”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외다시피 인사하는 내게 남자는 조용히 이모, 하고 입을 열었다. 깜짝 놀란 내가 이름을 부르려고 하자 영민이는 제 입술 위로 손가락을 갖다 댔다. 영민아, 너 뭐야, 너 군대 갔다며 왜 이 시간에 여기 있어? 머리도 안 깎았네? 군대 간 거 아니었어?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속삭이긴 했지만 쉬지 않고 질문을 쏟아놓는 내게 영민이는 난감한 표정으로 엄마는요? 하고 물었다. 야, 나도 모르겠어, 너희 엄마 힘들다고 도와달라고 해서 요즘 나오고 있는데 너희 엄마가……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경찰입니다, 이영민 씨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14조와 관련, 불법 촬영 및 유포, 협박 등의 혐의로 체포합니다, 하고 웨딩촬영을 위해 상담을 왔다던 커플 중 여자가 말했다. 딸랑딸랑. 종이 울리고, 생각보다 빨리 돌아온 언니의 얼굴이 파래졌다. 그러고는 남자 경찰에 의해 순순히 수갑이 채워진 영민에게 달려가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들어 아들을 때리기 시작했다. 너 이 개새끼야, 악마 새끼야. 아니, 너를 내 배로 낳았으니 내가 개지, 내가 악마야. 도대체 왜 그랬어. 도대체 왜 그랬어! 반쯤 정신이 나간 언니를 경찰들이 뜯어말렸다. 영민이는 무릎을 꿇고 앉아 그저 묵묵히 있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언니가 울기 시작했다. 어머님, 이제 서로 연행해야 합니다, 협조 좀 부탁드립니다, 하며 마음 좋은 경찰관들이 언니를 달랬다.
엄마, 엄마는 왜 그랬어? 엄마는 내 엄마잖아. 떨리는 목소리로 영민이 입을 뗐다. 엄마가 나를 신고하면 안 되는 거잖아. 언니는 벌떡 일어나 아들의 머리채를 잡고 자신의 머리로 들이받았다. 죽어 이 새끼야. 그냥 나랑 같이 죽어! 감옥에서라도 죗값 받고 정신 차리고 살라고 그랬다 왜! 너 낳고 이렇게 키운 죄를 내가 이렇게 해서도 다 갚질 못해! 악을 쓰며 정신없이 아들을 들이받는 어미를 경찰들이 겨우 떼어냈다. 언니는 그 자리에서 실신했고, 경찰들이 급하게 요청한 구급차가 도착했다. 그렇게 영민이는 경찰서로, 나는 언니와 병원으로 왔다.
언니, 이게 다 무슨 일이야. 겨우 정신이 들어 눈을 뜬 언니의 손을 잡고 물었다. 언니는 누운 채로 울었다. 눈물 콧물이 흘러 온 구멍에 섞여 들어갈 것 같았다. 조용하고 신중하고 내게 다정하기만 했던, 나이 많고 엄마 같은 우리 언니가 서럽게 울고 있었다. 자초지종을 여전히 파악할 수 없었지만 나도 덩달아 서러워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언니, 이제 그만 울고 이야기 좀 해 봐. 내가 어떻게 해 주면 돼?
선진병원에 입원한 아가씨는 영민이의 여자친구였다고 했다. 가족은 없지만 씩씩하고 생활력도 좋은 착한 친구여서 언니도 내심 많이 예뻐했다. 언니의 카메라를 가져다가 영민이는 여자친구를 몰래 촬영했다. 그러고는 불법 촬영물들을 공유하는 인터넷 공간에 들어가기 위해 그걸 공유했다. 고객들의 사진을 보정하느라 카메라와 외장하드를 수시로 만지던 언니는 어느 날 자신의 웹 저장 공간에 자동으로 업로드된 그 영상들을 발견했다.
영민이는 카메라에 자동 업로드 기능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놀란 언니는 영민이의 방을 뒤져 외장 하드에 담긴 많은 불법 촬영물을 찾아냈다. 아들이 한 짓이 아니길 바라며 일 분 일 초도 빼놓지 않고 그 역겨운 영상들을 모두 보았다. 하지만 카메라를 세팅하고 테스트 촬영을 하는 아들의 얼굴을 보았을 때, 언니는 그저 머리를 찧고 죽고 싶었다고 했다.
언니는 그렇게 불법 촬영물들이 유통되는 여러 파일공유 사이트들을 찾아다녔다. 빼곡하게 메모를 해가며, 삭제해달라고 연락을 했다고 했다. 영민이의 여자친구가 자신의 영상이 돌고 있다는 것을 알기 전에 다 없애주고 싶었다. 아들의 죄를 어떻게든 지워내고 싶었다. 하지만 영상물은 자꾸만 복제되고 새끼에 새끼를 낳아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갔다. 언니는 수많은 영상물 속에 묻혀서 그 친구의 영상이 수면 아래로 사라지길 내심 바라기도 했다. 아무리 찾아내고 삭제를 요청해도 그때뿐, 영상들은 이름만 바꿔 다시 나타났다. 언니는 매일매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영상들을 보며, 그리고 사랑에 빠졌거나 약물에 취해 자신이 어떤 일을 당하는지도 모르는 그 해맑은 얼굴들을 보며 수없이 죽고 싶었다고 했다.
언니는 착잡한 마음으로 웹사이트들을 살피다 무심코 신호등을 바라보았다. 영민이와 헤어진 그 여자친구가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익숙한 뒷모습을 보면서,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 때문에 말을 걸어보지도 못하고 그저 문가에 서서 바라봤다.
신호등의 초록불이 서른아홉 번을 깜빡이는 동안에도 그 친구는 계속 움직이지 않았다. 깜빡 깜빡대는 초록불과 그 뒷모습을 마냥 바라보느라 언니는 그 애가 초록불이 끝나도록 그냥 서 있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차들이 다시 달리기 시작했을 때 그 애는 갑자기 달려나갔다. 온통 검붉은 자국이 아스팔트에 번졌다고 했다.
언니, 괜찮아? 아니, 괜찮을 리가 없지...... 내가 뭘 해주면 돼? 어떻게 해주면 돼? 말해봐 언니.
내가, 죽을 때까지 보살펴준다고 했어. 저 새끼 감방에 처넣고, 내가 그 죄 평생 갚으면서 살겠다고, 그러니 제발 죽지 말고 살아달라고, 내가, 저 새끼를 저리 키운 내가 죄인이니, 제발 평생 너를 돌보면서 살게 해달라고 빌었어.
언니가 왜 그렇게 해. 너무 안된 일이지만, 영민이가 저지른 일이야. 그걸 왜 언니가 평생 갚고 살아. 그냥 연 다 끊고 언니가 살아. 언니가 편하게 살아 좀.
야 이년아. 내가 너도 키웠어. 엄마가 아빠 싼 똥 치우느라 평생 저러고 사는 것도 불쌍한 일이지만, 그러느라 나한테서 어린 시절을 뺏어간 것도 엄마가 잘못한 일이지만, 엄마도 아빠가 다른 여자들 등쳐먹은 빚 갚느라 불쌍하게 살았어. 아직도 평생 그 빚을 갚고 있잖아. 집에서 달아나 보겠다고 나쁜 새끼 만나서 결혼했지만, 그래도 정신 차리고 잘 달아나 번듯하게 내 새끼만 잘 키우고 살아보려고 했는데, 아등바등 살다 보니 내 새끼가 쓰레기가 된 줄도 몰랐어. 그거 다 내 빚이야. 내가 평생 갚아야 할 내 빚.
언니 왜 그렇게 살아. 그렇게 살지 마.
아무도, 아무도 다른 사람의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어. 나는 이제 젊은 너처럼 쿨하고 똑똑하게 살아가는 거 할 줄 몰라. 예전에도 못 했지만, 지금은 더 못 해. 살아간다는 게, 지은 죄만 이렇게 자꾸 쌓여서, 그 죗값 갚으면서 계속 살아내는 게 어딘가에는 보탬이 되기도 하는 거야. 그러니까 너무 불쌍하게 여기지 않아도 돼.
내가 뭘 해주면 돼, 언니? 어떻게 하면 좀 도움이 될까?
그냥. 너는 그냥 잘 살아. 너한테 소중한 사람들이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사람으로 잘 살아내. 지금처럼 네 힘으로 잘 꾸려나가는 사람으로 살아내기만 하면 돼. 그렇지 못한 날들에는 또 그렇게 쉬어가면서 살아내면 돼.
언니는 결국 신경쇠약과 과로로 입원했다. 나는 잠시 영인시에 머물며 언니를 돌보기로 했다.
<개인 사정으로 일주일간 쉽니다.>
사진관 앞에 휴업 문구를 붙여놓고 들어왔다. 오전에는 영민이 전 여자친구의 재활치료를 도우러 갔다가 언니에게도 들렀다.
사진관 대청소를 하고, 햇살 잘 드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조금만 쉬었다가 외주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 프리랜서는 벌 수 있을 때 열심히 돈 벌어야지. 참, 언니에게 물어봐야지.
<언니, 그런데 진짜 궁금해서 또 물어보는 건데, 이놈의 간판 글자는 왜 이렇게 기울어져 있는 거야?>
때릉. 답 메시지가 왔다.
<그냥. 엄마가 종종 그러잖아. 사사건건 삐뚤어진 년이라고. 사사건건 삐뚤어진 년들이 말은 안 들어도 진득하게 제 갈 길은 가거든. 목이 기울도록 쳐다봐야 할 때도 있지만 글자는 똑바로 쓰여 있잖아.>
<뭐야 싱겁게... 사사건건 삐뚤어진 언니 같으니라고.>
<좋잖아. 삐뚤어진 언니들이 있어서 안 삐뚤어진 애들이 사고 쳐도 욕을 덜 먹어.>
나는 어지간히 조용하고 신중하고 재미없는 언니를 갖고 있다. 소 같이 열심히 일이나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