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야 원더랜드 오타쿠걸 : 들어가는 글
사람들이 이리저리 흐르는 넓은 교차로. 기념사진을 찍는 관광객들. 건물들 사이 알록달록한 광고들이 시선을 사로잡는 곳. 도쿄 시부야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스크램블 교차로의 일상적인 풍경이다.
광고와 인파로 뒤덮인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
교차로 건너 시부야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SHIBUYA109가 보인다.
시부야는 일본의 수도 도쿄의 중심부 중 하나로, 일본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은 들어본 지명일 것이다. 시부야역은 1일 이용객 수 약 330만 명※1으로 세계 2위를 자랑한다. 여러 개의 전철 노선이 복잡하게 얽혀있어 수도권의 동서남북 어디로도 비교적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지리적 편의성을 갖추고 있다.
스크램블 교차로 너머로 우뚝 선 SHIBUYA109는 일본의 Z세대 여성들의 최신 트렌드를 가장 보여주는 상업 시설로 일본의 카와이이 문화의 아이콘이다. SHIBUYA109에서 한 블록 안쪽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센터거리(センター街)는 1990년대 갸루 문화의 중심지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예전의 명성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패션과 라이프 스타일 관련 점포들이 다수 자리 잡고 있다. 한편, 최근에는 시부야 역 주변의 재개발로 인해 각종 상업 시설들이 새로 생기거나 리뉴얼하고 있다. 해외 유명 명품이나 최신 인기 브랜드들의 입점도 늘어나 이전보다 더 다양한 연령대를 커버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시부야를 중심으로 하라주쿠, 아오야마, 다이칸야마 등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동네들이 가지처럼 뻗어져 있어, 시부야 중심부에서 바깥쪽으로 걸어보면 다양한 일본의 유행을 느낄 수 있다.
그야말로 시부야는 일본의 소비와 유행의 중추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그런데 시부야에서 요 몇 년 사이 눈에 띄게 체감되는 변화가 하나 있다.
그 변화는 팝업스토어나 각종 콜라보 행사, 역 구내를 점령한 대형 광고 등 덕질※2을 하는 여성들을 타깃으로 하는 장소, 이벤트, 광고들이 대폭 증가했다는 점이다. 대상 장르 또한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은 물론 VTuber, 2.5차원, J-POP, K-POP까지 2D와 3D 구별하지 않고 다양한 차원과 분야를 아우른다.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은, 공급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덕질 대상의 굿즈로 소지품을 꾸미고 덕질 콘텐츠의 디스플레이 앞에서 인증 사진을 남기는 등, 이전에 비해 덕심※2을 숨기지 않는 젊은 여성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원래부터 일본은 한국에 비해 특정 장르나 콘텐츠의 팬 층, 소위 오타쿠 층을 타깃으로 삼는 홍보나 판촉 활동, 이벤트 등을 쉽게 접할 수 있는 편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 수법이나 노출 빈도, 그리고 이를 접하는 사람들의 행동까지 모든 면에서 오타쿠 문화가 좀 더 양지로 끌어올려진 것처럼 느껴진다. 공급 측과 수용 측의 상호 작용이 겉으로 드러나 보이기 때문에 체감상 더 크게 와닿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과연 시부야가 트렌드의 중심지에서 오타쿠 문화의 중심지로 바뀐 것이라 해야 할까?
상기 도표는 500㎡ 단위로 지역을 분할, 핸드폰 인터넷 접속 정보 등을 집계하여 유동인구를 데이터화 (골든위크 기간 중 오후 2~3시 평균치) 한 자료로, 2021년~2022년 Z세대 유동인구 1위를 차지한 시부야구 도겐자카는 SHIBUYA109가 위치한 곳이다. 시부야는 여전히 10대~20대 여성들의 첨단 유행 중심지라는 상징성과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오타쿠 문화, 즉 덕질이라는 행위 자체가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트렌드의 일부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유행이란 필연적으로 전파하는 사람과 이를 즐기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공존한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생긴다. 즉 시부야에 발걸음 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시부야를 덕질에 최적화된 장소로 만들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소녀들의 덕질이라는 슬기롭고 열정적인 취미 생활은 시부야의 편의성과 트렌디함을 만나, 하나의 웨이브를 만들고 있다.
갑작스럽지만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고자 한다. 필자는 20년 이상 무언가의 덕질을 하고 있는 프로덕질러이자, 10년째 시부야 소재의 회사에 다니고 있는 왜국인 노동자이다. 직업 관계상 오타쿠 문화, 서브컬처 분야의 취미를 가진 여성들의 동향에 늘 주목하고 있는데, 최근의 이런 변화가 낯설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라떼는 오타쿠 문화는 어디까지나 비주류 문화로 다소 하찮게(?) 여겨져 왔기 때문에, 가끔은 이렇게까지 양지로 나와도 되는가? 하는 꼰대스러운 의문을 가질 때도 있다. 하지만, 모든 변화는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법이니까 지금은 그저 이 흐름을 즐기려 한다.
그런 맥락에서, Z세대 여성들의 요즘 덕질에 대해 그동안 알고 배우게 된 것들을 정리해보려 한다. 「좋아하는 것에 대한 여성들의 표현 및 소비 방식」이라는 테마로, 정보의 전달 및 국경을 넘는 공통적인 가치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 것이 목적이다. 일본의 오타쿠 문화를 찬양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으며 "역시 일본은 오타쿠의 나라! 스고이!"라며 마치 신기한 현상처럼 취급하려는 것도 아니다.
굳이 시부야를 배경으로 설정한 이유는, 최근 일본 사회에서 덕질의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변화란 오타쿠 본인의 인식은 물론, 사회에서 보는 시선 등 포괄적인 것을 말한다.
세부 테마에 따라 총 3개의 장으로 구성하였고, 전체를 통해 다루고자 하는 이야기들은 아래와 같다.
1장. 덕질에 대한 개념 정리 및 정보 전달
덕질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덕질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Z세대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독특한 덕질 소비란?
최근의 유행 콘텐츠 및 그와 관련된 소비, 표현 형태 예시
2장. 덕질로 인해 재편성된 경제권
시부야는 어떻게 Z세대 여성 오타쿠의 성지로 다시 태어났는가?
각 기업과 콘텐츠들은 어떻게 덕질과 공생하는가?
기업들의 덕질 활용 사례 예시
3장. 앞으로의 덕질에 대한 생각
한일 간의 덕질문화 유사성 및 차이점
덕질이 주는 긍정적 측면과 과제점
앞으로 덕질이 맞이할 변화들에 대해
상기 변화들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같은 문화권으로 묶인 이상, 우리나라와 일본은 유행 콘텐츠와 그 소비 형태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받는다. 단편적인 예로 최근 한국의 MZ세대 소비 트렌드로 주목받는 디깅 소비, 가심비※3 등의 행동 양식은 일본에서도 그대로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변화는 전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니 동아시아의 예외적인 사례는 아니다)
한국에서 포켓몬 빵을 위해 오픈런을 할 때, 일본에서는 K-POP 아이돌의 포토카드가 팬들 사이에서 고가에 거래된다. 포토카드 케이스 꾸미기나 예절샷※4 문화는 국경을 넘어 유행하고 있다. 한국발 네 컷 사진이 프리쿠라※5의 나라 일본에서 인기를 끌기도 한다.
애초에 덕질이란 단어의 앞 글자 "덕"은 일본어의 오타쿠가 어원이다.
소비 시장은 점차 개인의 기호를 중시하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 오타쿠가 소비자로 각광을 받고 있는 요즘이기에, 일본의 덕질 시장 및 소비자에 대한 이해에 보탬이 되고 싶다. 덕질 시장은 한일 간 유사성도 크기 때문에, 시점을 한국으로 옮긴다면 생각을 키워나가는 힌트도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세계도 있구나 하고 가볍게 읽어주셔도 좋다.
아울러, 이 브런치북을 읽으시는 분이 "어떻게 하면 더 건강하고 행복한 덕질 문화를 만들 수 있을지" 잠깐이라도 생각해 주신다면 한 명의 오타쿠로써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다.
※1. 2018년 기준. 각 철도 회사 이용객 수의 합산. COVID-19의 여파가 남아있던 2022년은 약 240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2. 덕질 : 어떤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여 그와 관련된 것들을 모으거나 파고드는 일을 뜻한다.
일본어 단어 오타쿠를 변형하여 만들어진 오덕후라는 표현에서 덕이라는 글자를 따와, 무언가를 하다는 의미의 ~질을 붙인 말이다.
덕심 : 오타쿠 → 오덕후의 덕에 마음을 뜻하는 ~심이 붙은 말. 어떤 분야를 좋아하는 팬의 마음.
※3. 디깅소비 : 자신이 선호하는 품목이나 영역에 깊게 파고드는 행위가 관련 제품의 소비로 이어지는 것.
가심비 : 가격 대비 심리적 만족도. 비용과는 무관하게 제품 또는 경험을 통해 얻는 개인적인 만족도를 강조하는 소비 양식.
※4. 예절샷 : 덕질 대상의 포토카드나 굿즈와 함께 음식이나 풍경 등의 사진을 찍는 덕질 놀이 문화. 주로 덕질을 같이하는 그룹이 모일 때 각자 준비해 온 아이템이 한 화면에 보이도록 찍는다.
※5. 프리쿠라(プリクラ). 1995년 일본에서 출시된 스티커 사진기 프린트 클럽(プリント倶楽部)를 줄인 말. 상품명이 그대로 스티커 사진을 뜻하는 고유명사처럼 굳어졌다.
출전 및 참고자료
https://ja.wikipedia.org/wiki/%E6%B8%8B%E8%B0%B7
https://business.nikkei.com/atcl/gen/19/00337/092700068/
https://xtrend.nikkei.com/atcl/contents/casestudy/00012/0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