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란의 펜이 갖는 의미

by 십팔점오도

선우찬의 기억속에 혁찬이는 이미 다른 여자와 교제를 하고 있었네요. 그걸 모르는 하란은 늘 혁찬이를 사랑했고 보고싶어했던거구요. 아마도 혁찬이 손을 다치게 되면서 병원에서 만나게 된 여자였고 그 여자가 앞으로 선우찬의 기억에 중요한 키가 될 것으로 보이죠.
하란의 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하란의 펜은 무척 중요합니다. 특히 잃어버리고 나서 하란이 선우찬에게 했던 독백은 참 중요했던 것같습니다. 사실 이 드라마에서 여러 장치들이 시간과 상처라는 맥락에서 다양한 의미와 메세지를 담고 있는 것같아서요. 하나씩 짚어보려고 합니다.
하란이 펜을 잃어버려요. 중요한 펜이었어요. 소포모어 증후군까지 만나게 되면서 힘들어하고 벽에 부딪혔던 하란이었고 선우찬이 선물한 펜으로 인해 돌파구가 이뤄지죠. 수상도 하게 되고 일이 술술 풀리게 됩니다. 디자이너 감각이 있던 선우찬이 선물한 펜이니까 서로 통했던거겠죠. 물론, 하란에게 그 펜은 혁찬이가 선물한 펜이죠. 자신의 답답했던 시간으로부터 나오게 해줬던 동기가 됐던 펜이기에 더 특별했고 그래서 하란에게는 절대적인 펜이었습니다. 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하기전에 송하란에게 중요한 몇가지 장치가 있죠. 오늘은 비행운과 스마트 글라스를 먼저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사실 송하란의 시간은 7년 전 보스턴에서 멈췄다고 봐야죠. 연인 강혁찬의 죽음을 목격한 그날입니다. 아마도 사랑하는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죽는걸 직접 목격했었어요. 이번에도 연인이었던 혁찬이마저 자신의 눈앞에서 폭발로 죽었다는걸 본거니까요. 그녀의 인생에서 계절의 순환은 중단되었다고 봐야죠. 부모님의 죽음이후 잠시 봄으로 넘어오다가 다시 겨울에 갇혀버렸죠. 영원할 것같은 겨울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란은 하늘에 비행운이 그어질 때마다 고개를 들어 그것을 바라봤던 것같습니다. 비행운을 보고서 혁찬이가 보고싶다고 보스턴으로 갔던거니까요. 비행기를 타고 보스턴으로 향했던 날, 그곳에서 마주한 죽음, 그리고 그 이후에 모든 것들이 얼어버린거죠.

비행운은 하란에게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닙니다. 과거라는 시간대로 연결되는 통로에요. 그녀를 끊임없이 그곳에 묶어두는 쇠사슬입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비행기처럼, 이미 끝나버린 사랑임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 하얀 궤적에 시선을 빼앗기고 자신의 시간을 묶어버린거죠. 아마도 하늘에 새겨진 그 선을 바라보는 동안만큼은 시간도, 계절도, 자신의 나이도 7년 전으로 되감긴 듯한 착각 속에 머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기억이 잊혀져 버리고 상처가 얇아지는걸 사람들은 두려워하는건지도 몰라요.

하란은 자신의 사무실에 스마트글라스를 늘 내리는 습관이 있습니다. 좋아보이더라구요. 하나 갖고 싶던데요. 하란이 팀장실의 스마트 글라스를 불투명하게 전환하는 습관은 이 동결된 시간의 물리적 표현입니다. 투명 유리 너머로 보이는 동료들은 모두가 밝아요. 쾌활하고 즐겁고 유쾌해요. 사무실에 스며드는 햇살의 각도,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계절의 색감들 이 모든것들이 사실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증거이고, 하란은 그 증거를 견딜 수 없는겁니다. 자신만 한겨울에 갇혀 있는데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봄을 맞고, 여름을 지나, 가을의 낙엽을 밟고 있다는 사실말이에요. 살아남은 자에게는 이 평범한 시간의 흐름이 때로 죽음보다 더 잔인합니다. 스마트글라스를 내려서 외부 세계를 차단하는 이 물리적 행동은 시간을 차단하는 행위에 가깝습니다. 유리를 '불투명’으로 만든다는 명분 아래, 사실상 자신의 시간을 '정지’시키는 버튼을 매일같이 누르고 있다는걸 말하는 겁니다.

일상은 겉으로 보기엔 정상적인 현재를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의 시계는 거꾸로 감기거나, 아예 멈춰 있습니다. 출근을 하고, 회의를 하고, 라인을 수정하며 새로운 컬렉션을 준비하지만, 하란의 감정은 단 한 지점 — '보스턴의 겨울’이라는 좌표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구요. 새로운 인연이란 곧 또 다른 상실 가능성을 의미하기에, 그녀는 최대한 아무런 변수가 생기지 않는 구조 속에 자신을 가둡니다. 상실 이후의 시간에 스스로를 적응시키기보다는, 상실 이전의 시간에 자신을 고정시키는 방식으로 살아남으려는거죠. 과거 상처에 자신을 자꾸 가둬야만 현재의 변수를 기대하거나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기때문이에요. 어쩌면 상처라는건 이미 빛 바래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계속 붙들며 덧칠하는 그래서 사실은 원래의 모습과 전혀 다른 그림이 된건지도 몰라요.

하란의 펜은 바로 이 동결된 시간을 떠받치는 핵심 장치였죠. 그녀는 그 펜이 "강혁찬이 준 선물"이라고 믿어왔고, 그래서 그 펜에는 첫사랑의 기억, 잃어버린 연인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그리고 "그때의 나"를 증명해주는 마지막 증표라는 의미들이 한꺼번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펜은 단지 '추억의 물건’이 아니에요. 과거를 절대화하는 장치였습니다. 하란이 7년이라는 세월 동안 자신을 보스턴의 겨울에 묶어둘 수 있었던 것은, 이 펜이 그 기억의 무게와 확실성을 부여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손에 쥘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이 사물이 존재하는 한, "그때의 사랑은 진짜였고, 그래서 나는 여전히 거기에 머물러야 한다"는 자기 규정은 흔들리지 않는거죠.

그런 하란의 동결된 시간에 처음으로 미세한 균열이 생깁니다. 펜을 잃어버리게 되요. 마치 우리의 기억이라는 것도 서서히 잊혀져가는 것처럼요. 하란은 선우찬에게 펜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무척 중요한 말을 해요. “그 펜이 절대적인 의미가 있었던 건 줄 알았는데… 이제는 잘 모르겠어요. 갑자기 없어져 버려서 그게 어색한 건가 싶기도 하고요.”라고 말하죠.

표면적으로는 담담한 고백이지만, 사실 엄청난 내면의 지각변동을 암시합니다.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것의 의미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스스로 인정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부여했던 비장했던 의미가 시간의 흐름속에서 서서히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희미해짐이 곧 사랑의 배신이나 추억에 대한 모독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자연스럽게 살아남는 방식일지도 모른다는 자각까지 담고 있거든요. 상처와 과거에 대한 기막힌 방식의 해석이었던 것같애요. 멈춰 있다고 믿었던 시계가 사실은 아주 느리게, 그러나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다는 겁니다.

더 중요한 건, 이 변화가 거창한 각성이나 눈물의 절규가 아니라 "이제 모르겠다"는, 다소 어정쩡하고 솔직한 혼란으로 표현됩니다. 상처와 아픔 그리고 상실에서 벗어난다는건 결국 대개 이런 식으로 시작되잖아요. 과거에 대한 절대 확신이 조금씩 '모르겠음’으로 바뀌거든요. "항상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자기 규정이 "꼭 그래야만 하나?"라는 의심으로 변하는겁니다. 하란의 이 한마디는 그녀 안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는, 너무 작아서 본인은 잘 느끼지 못하지만 관찰자는 분명히 포착할 수 있는 첫 번째 진동입니다. 비단 하람뿐만이 아니죠. 상처입은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위로의 메세지가 되기도하구요.

그런데 하나 더 있습니다. 이 균열은 펜의 진짜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 올텐데요. 그 펜은 혁찬이 아니라 선우찬이 준 선물입니다. 아직 하란이 알지 못하고 있지만 관객은 알고 있죠. 수신인이 뒤바뀌었듯, 기억 속에 선물으 보낸 사람이 뒤집히는 순간이 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하란이 7년 동안 신성시하고 붙들고 있었던 '과거’는 애초에 사실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기억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했고, 그 기억에 스스로를 묶어두었던겁니다.

펜의 진실이 드러나면 과거의 구조가 뒤집혀요. 함께 바뀌는 것은 현재의 의미입니다. 하란만 모르고 있을뿐 관객과 선우찬은 이미 알고 있죠. "혁찬이 나에게 줬다고 믿었던 펜"은 사실 선우찬이 그녀를 생각하며 건넨 선물이었고, "나를 사랑해준 건 혁찬뿐이었다"는 믿음은 "내 진심에 응답했던 건, 이름도 모른 채 대답하던 다른 누군가였다"는 사실로 바뀌게 됩니다. "내 인생은 그때부터 끝났다"는 하란의 선언은 "아니, 그때부터 다른 방식으로 누군가가 나를 살리고 있었다"는 인식으로 갱신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드라마가 상처와 시간에 대해서 중요한 질문을 여기서 던지는겁니다. 우리가 매달려 있는 과거라는 것도, 사실은 그렇게까지 절대적인 게 아닐지도 모른다라는 겁니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어온 과거의 서사 역시 시간이 흘러 재구성되고, 오해가 끼어들고, 편집되고, 어떻게든 붙잡기 위해 미화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불완전한 기억에 삶 전체를 가둬두곤 합니다. 계절의 흐름을 멈추고 겨울에 스스로를 가둬두려고 해요. 하란처럼, 결국 이 펜은 과거의 절대성을 해체하는 상징입니다. 과거는 "이미 완성된 진실"이 아니에요. 새로운 정보와 시선이 들어올 때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 의미가 갱신되는 것과 같다는 거죠.

비행운 이야기를 했는데요. 펜의 의미가 '절대’에서 '모르겠다’로 바뀌는 순간, 비행운 역시 기억과 멈춰버린 시간, 계절을 위해 더 이상 성역일 수 없게 됩니다.

나중에 찬이 비행운을 "지나간 흔적"이라고 정의하잖아요. 그 대신 채운(彩雲)을 가리키며 "기분 좋게 앞으로를 기대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사실 이 작은 균열 이후에야 가능한 장면입니다. 하란에게 하늘은 과거로 연결되는 통로였어요. 그 하늘이 조금씩 다른 쓰임새를 갖기 시작하는 겁니다. 더 이상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으로 상처와 과거를 붙잡기 위해 올려다보는 하늘이 아니라, “새로운 색을 볼 수 있음을” 조심스럽게 보여주는 하늘이 됩니다. 하란이 보던 하늘은 늘 비행운이었는데, 이제 선우찬으로 인해 채운이 있는 하늘이 되요. 과거에 묶인 시선에서 현재를 향해 풀려나는 시선으로의 전환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하란의 서사는 극적인 타임슬립 대신, 매우 느리고 미세한 시간 회복의 서사에 가깝습니다. 얼음 속에 갇혀 있던 강이 어느 날 갑자기 폭발하듯 흐르기보다는, 가장자리가 아주 조금씩 녹아내리며 물길을 되찾는 과정입니다.

그 의미가 상처와 아픈 기억에 갇힌 사람들에게 전하는 따뜻함이 있어요. 우리가 "인생을 바꾼 사건"이라고 절대시하며 평생을 끌고 다니는 기억들, 이별, 어떤 배신, 실패, 부모와의 상처 같은 것들 역시, 시간이 흘러 새로운 의미가 되거나 다른 사람의 시선이 더해지겠죠. 그 의미가 전혀 다른 색으로 다시 칠해질 수 있습니다. 그때의 나는 피해자라고만 믿었지만 시간이 지나 보니 그 사람 역시 자기 겨울을 지나고 있던 누군가였다는 걸 알게 되기도 하잖아요. 가장 큰 실패라고 여겼던 순간이 나를 지금의 자리까지 밀어 올린 기점이 되어버리기도 하구요.

'펜’의 진짜 주인이 바뀌는 이야기는 결국 “과거는 우리를 묶어두는 돌덩이가 아니라, 언제든 다시 읽힐 수 있는 텍스트”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그래서 이 드라마에서 시간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상처로 얼룩지고 아파서 스스로를 겨울에 가둬버린 그 시간이 전부가 맞느냐라는 의미를 던지는 것같습니다. 혹시 아직 읽히지 않은 다른 진실이 숨어 있는 건 아니겠느랴는 위로도 있구요.

스크린샷 2026-03-07 오후 11.20.20.png

하란의 펜과 비행운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거같습니다. 잃어버린 펜을 둘러싼 짧은 대사, 상처입은 사람의 마음에 얼음이 금 가는 순간처럼 담담한 톤으로 포착해낸 장면은 참 기막히지 않나요? 비행운에 갇혀 있던 여자가 그 똑같은 하늘에 자기도 모르게 채운을 올려다보게 되리라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시간을 조용히 예고하는 따뜻한 위로가 참 좋았던 대목이 아니었나싶습니다.

이번 영상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영상 좋으셨담녀 좋아요 구독

알림 설정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생각도 댓글로 남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찬란한 너의 계절에’ 18.5도와 함께 하시죠

고맙습니다.

스크린샷 2026-03-07 오후 11.15.37.png

#찬너계 #드라마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