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비앙 로즈’는 왜 나왔을까?

by 십팔점오도


‘찬너계’가 겉으로보면 로맨스예요. 남녀가 만나고, 마음이 흔들리고, 가까워지는 이야기. 근데 저는 보면 볼수록 이게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시간’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송하란. 이 사람의 시간은 7년 전에 멈췄어요. 보스턴에서 연인이 사고로 죽었거든요. 그날 이후로 하란한테는 봄이 안 옵니다. 세상은 계속 돌아가는데, 이 사람만 그 겨울에 갇혀 있는 거예요.

하란이 하늘을 볼 때마다 비행운을 찾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비행기를 타고 보스턴에 갔잖아요. 거기서 죽음을 봤고. 그러니까 비행운이 하란한테는 그냥 구름이 아닌 거예요. 볼 때마다 그 시간으로 끌려가는, 과거로 이어지는 통로 같은 거죠.

사무실에서 스마트 글라스를 불투명하게 해놓는 습관도 있어요. 겉으로 보면 일에 집중하려고 그러는 것 같은데, 사실은 바깥 세상이 잘 돌아가는 걸 보기 싫은 거예요. 나만 멈춰 있는데 다들 웃고 있으면 견디기 어려우니까.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증거를 아예 안 보겠다는 거죠.

자 그럼 시간에 관한 중요한 것 3가지중에 첫번째는 ‘3개월 체험판’입니다.

선우찬이 하란한테 하는 제안이 있어요. “날 3개월 체험판으로 써 봐요. 기간 만료 땡 하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줄 테니까.” 보통 드라마에서는 마치 영원할 것같은 희망을 약속하잖아요. 근데 찬은 반대예요. 끝을 먼저 정해버립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요. 하란이 사람을 안 만나는 이유가 있어요. 가까워지면 잃으니까. 잃으면 또 겨울이 오니까. 그래서 아예 시작을 안 하는 거예요. 무게가 너무 무거운 거죠. 근데 찬이 "3개월이면 끝"이라고 하니까, 하란 입장에서는 부담이 확 줄어드는 거예요. 잃을 게 없으니 마음을 열어볼 수 있는 거고. 기한이 정해진 시간이 오히려 하란의 멈춘 시계를 다시 돌리는 태엽이 됩니다. 하란도 그래서 친구로 지내보기로 한거죠.

찬이 하란한테 종종 하는 말이 또 있어요. “나중에 나 없더라도 그렇게 신나게 살아요.” 가볍게 들릴 수 있는데, 곱씹어보면 무거운 말이에요. 3개월 후에 자기가 떠나도 하란이 계속 웃으면 좋겠다는 거잖아요. 과거에 묶여서 못 살던 사람한테, 미래의 시간을 선물하는 겁니다. 그것도 자기가 없는 미래를요. 예전에 하란과의 채팅이 자기를 살려줬던 것처럼, 이번에는 자기가 하란의 시간을 되살려주겠다는 마음이 거기 담겨 있는 거죠.

그러면서 찬이 하란한테 비행운과 채운 이야기를 해요. 이 장면이 정말 좋거든요. 하란은 늘 비행운을 올려다보잖아요. 비행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하얀 줄. 이미 지나가 버린 흔적이에요. 근데 하란은 그 흔적만 계속 보면서 삽니다. 그때 찬이 채운을 보여줘요. 구름에 무지갯빛이 입혀지는 현상인데요. 찬이 이렇게 말합니다. “비행운은 지나간 흔적이에요. 채운은 기분 좋게 앞으로를 기대하게 만들고요.” 비행운은 과거의 흔적이고, 채운은 지금 이 순간의 색깔인 거예요. 찬이 덧붙이는 말이 있어요. “지나간 일은 기억만큼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어요. 흐려지고, 덧칠되고, 변형되고. 어쩌면 모르는 일이 숨어 있어서 미화됐을 수도 있고요.” 상처와 기억, 겨울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전하는 무척 중요했던 대사에요. 우리가 과거를 떠올릴 때 실제보다 예쁘게 기억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안 좋았던 부분은 슬쩍 지워지고, 좋았던 것만 남아서 더 반짝거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 근데 실제로는 그때도 힘들었고, 어쩌면 내가 모르는 진실이 숨어 있었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앞선 영상에서도 하란의 펜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이 말이 하란한테 딱 들어맞거든요. 하란이 잃어버린 펜 이야기가 있는데요. 죽은 남자친구가 선물한 거라고 믿었던 펜이에요. 하란한테 그 펜은 거의 보물 같은 거였어요. 과거와 자기를 연결하는 유일한 물건. 근데 사실 그 펜을 선물한 건 혁찬이 아니라 찬이었거든요. 하란이 그렇게 소중하게 여겼던 기억 자체가, 실제와 다른 거였던 거예요.

그 펜을 잃어버리고 나서 하란이 이렇게 말해요. “그 펜이 절대적인 의미가 있었던 건 줄 알았는데, 이제는 잘 모르겠어요. 갑자기 없어져버려서 그게 어색한 건가 싶기도 하고요.” 되게 담담하죠. 절대로 놓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의미가, 조금씩 흐려지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멈춰 있다고 생각했던 시계가 사실은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던 거예요.

찬이 말한 것처럼, 과거는 기억만큼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다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어요. 근데 그게 꼭 슬픈 건 아니에요. 오히려 그 사실을 받아들일 때, 과거한테 묶여 있던 발이 풀리는 거거든요. 찬이 결정적으로 하란한테 하는 말이 있어요. “비행운을 보느라고 떡하니 채운이 있어도 못 볼까 봐요. 그래서 말하는 거예요. 지나간 일보다 지금 신나는 일 놓치면 억울하지 않겠냐고.” 억지로 끌어내는 게 아니에요. 그냥 “지금 여기에 이렇게 예쁜 게 있는데, 안 보면 아깝지 않아?” 하고 가만히 알려주는 거죠.

이 비행운과 채운의 이야기가 드라마 안에서 진짜 중요한 데로 이어집니다. 찬과 하란이 같이 작업하는 애니메이션이 있거든요. 거기 주인공 이름이 '원’이에요.
두번째는 애니메이션 주인공 ‘원’입니다. ‘원’에 관한 더 많은 이야기를 봐야겠지만요.

이 '원’이라는 캐릭터, 찬이 하란을 생각하면서 만든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하란의 또 다른 모습인 거죠. 근데 이 애니메이션은 타임슬립 이야기예요. 찬이 그러거든요. ‘원’이 처음 과거로 떨어지는 씬이라구요.

여기서 한번 생각해보면요. 하란한테 과거는 가장 무서운 시간이잖아요. 겨울이 시작된 곳이니까.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에요. 근데 하란을 닮은 '원’이 바로 그 과거로 들어가요. 상처라는게 그래요. 상처를 낫게 하려면 그 상처를 피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아프더라도 한번은 다시 마주해야 한다는 거죠.

사람마다 비슷하죠. 무서운 기억이 있으면 절대 떠올리기 싫잖아요. 근데 계속 피하기만 하면 그 기억이 오히려 더 커져요. 어둠 속에 뭐가 있는지 모르니까 더 무서운 것처럼 상상됩니다. 한번 들여다보고 나면 “아, 이 정도였구나” 하고 좀 놓아줄 수 있게 되는 거거든요. '원’이 과거로 떨어지는 건 그런 의미예요. 피하는 게 아니라 통과하는 겁니다. 인상적인 건 '원’한테 일어나는 변화예요. 처음에 '원’한테는 색이 없었어요. 하란의 세계가 그랬듯이, 흑백이었죠. 색을 못찾았고 입히지를 못해요. 근데 찬이 발견한 채운의 색이 영감이 돼서, '원’한테도 색이 입혀집니다. 비행운은 과거의 흔적이고 채운은 현재의 색이라고 했는데요. 찬이 하란한테 채운을 보여줬듯이, 찬이 만든 '원’한테도 그 색이 옮겨가는 거예요.

과거로 떨어졌던 '원’이 그 과거를 피하지 않고 통과하고 비로소 색을 얻어요. 무채색이었던 인물이 찬란한 색깔을 입게 되는 거죠. 결국 하란의 이야기를 말하는겁니다. 7년 전의 아픔을 피하기만 하면 계속 흑백 세상에 갇혀 있게 되고, 그 과거를 한번 지나고 나면 비로소 지금의 아름다운 색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거예요.

물론 사람마다 상처의 깊이가 다르고, 준비되는 시간은 다르겠죠. 근데 이 드라마가 말하려는 건, 적어도 과거 속에 영원히 갇혀 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 같아요. 되감기를 한다는 건 거기 머무르려고 하는 게 아니라, 한번 다시 보고 나서 앞으로 가기 위한 거라는 거죠.

세번째는 향나무입니다. 경주를 내려갔을때 찬과 하란이 봤던 나무에요. 500년 된 향나무가 나옵니다. 찬이 이 나무를 보면서 "타임트랩 같다"고 말해요. 나무를 본다는건 500년을 거슬로 본다는 이야기도 되겠죠. 시간이 갇혀 있는 것 같다는 뜻이에요. 500년이면 봄과 겨울을 수백 번 지난 거잖아요. 폭풍도, 가뭄도, 혹한도 다 겪었을 거예요. 한자리에서 한 발짝도 안 움직이고요. 근데 이게 멈춰 있는 게 아니거든요. 가장 오래 버텨낸 거예요. 똑같은 자리에 서 있지만, 향나무는 그 안에서 수백 번의 계절을 통과한 거죠. 하란처럼 한 계절에 갇힌 게 아니라, 모든 계절을 품고 있는 거예요. 500년을 돌면서 지금의 나무가 된거죠.

이 향나무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인물들이 있어요. 나나 할머니와 만재 오빠. 40년 전에 첫사랑이었던 사이예요. 오빠와 동생 같은 관계였는데, 나나는 젊은 시절에 약대 등록금을 들고 야반도주해서 파리행 비행기를 탔어요. 자기 꿈을 쫓아서 갔고, 만나려고 했던 만재는 나나를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했었죠. 그렇게 수십 년이 흐르고, 나나가 아틀리에의 수장이 돼서 돌아왔죠. 만재는 골목 안에서 '쉼’이라는 카페를 운영하면서 조용히 살고 있었고요. 백발이 된 두 사람이 다시 만납니다.

향나무와 만재 나나를 보면 질문이 생기죠. 기억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걸까. 40년이라는 시간이 기억을 예쁘게 포장한 건 아닐까. 아까 찬이 하란한테 했던 말 있잖아요. 지나간 건 기억만큼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거든요. 흐려지고, 덧칠되고, 변형된다고 하죠. 맞는 말이에요.

근데 나나와 만재를 보면 또 다른 면이 보여요. 기억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그 안에 담겨 있던 따뜻한 마음은 진짜라는 거에요. 만재가 소녀 시절 나나가 뭘 좋아했는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거든요. 40년이 지났는데도 앨범을 보관하고 있구요. 시간이 기억의 모양은 바꿀 수 있어도, 기억 속 온기까지 지우지는 못한다는 거예요. 500년 향나무가 수백 번의 겨울을 견디면서도 뿌리를 지켰듯이, 나나와 만재도 각자의 긴 시간을 지나면서도 서로에 대한 마음을 지켜온 거죠. 그게 500년을 살게 하는 힘이 되고 백발이 되어버린 두 사람이 다시 만나도 아름다운 만남이 될 수 있는거에요.

여기서 네번째 음반이 나옵니다.

만재가 나나한테 LP 음반을 하나 건넵니다. 거기 들어있는 노래가 '라비앙 로즈’예요. 프랑스어로 '장밋빛 인생’이라는 뜻이죠. 나나 할머니가 어릴 때부터 제일 좋아했던 노래라고 해요.

이 노래의 배경이 있죠. 에디트 피아프라는 프랑스 가수가 불렀는데, 이 사람 어린 시절이 정말 힘들었어요. 거기에 제2차 세계대전까지 겪었고요. 그런 사람이 1946년에, 전쟁이 막 끝났을 때, 이 노래를 발표해요. “그래도 인생은 장밋빛이고, 사랑할 가치가 있다.”는 내용입니다. 전쟁으로 다 무너진 사람들한테 이 노래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됐을까요.

LP라는 물건 자체도 생각해보면 재미있어요. 바늘이 홈을 따라 돌면서 소리가 나잖아요. 오래전에 녹음된 소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울리는 겁니다. 그 음반을 만재가 가지고 있거든요. 1946년의 피아프가 지금의 나나한테 노래하는 거고, 어린 시절의 나나가 늙은 나나한테 노래하는 거죠. 어린 시절 만재가 나나에게 들려주는 거에요. 80년이라는 시간을 건너뛰는 거예요. 500년의 향나무처럼요.

결국 아무리 힘든 시간을 지나왔어도, 살아 있는 한 인생은 아름답다는걸 말하는겁니다. 과거에만 머물러 있기에는 채운처럼 예쁜 색깔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들 곁에 머물다는 간다는거에요. 향나무의 500년, 찬과 하란의 7년, 나나와 만재의 40년, 라비앙 로즈의 80년. 숫자는 다 다른데 말하는 건 같아요. 겨울 다음에는 봄이 온다는 거고 겨울의 기억만을 덧칠하고 매어살기에는 봄은 너무 아름답다는거에요.

다섯번째로 언급해야하는게 바로 찬의 몸에 새겨진 문신입니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찬의 몸에 새겨진 문신이에요. "메멘토 모리"라고 적혀 있는데, 라틴어로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걸 기억하라"는 뜻이에요. 보스턴 실험실 화재에서 룸메이트를 구하려다 청력도 잃고 온몸에 화상도 입었잖아요. 죽을 뻔한 거예요. 그 뒤에 자기 몸에 이걸 새긴 거죠.

언제든 끝날 수 있는 삶이니까, 남은 하루하루를 여름방학처럼 신나게 살겠다는 의미죠. 죽음을 아는 사람만이 오늘을 진짜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란과 찬은 시간을 정반대로 사는 사람들이에요. 하란은 과거에 멈춰서 시간을 얼려버린 사람. 찬은 죽음을 겪고 나서 매 순간을 전력으로 사는 사람. 하란은 비행운, 지나간 흔적만 보고 있고. 찬은 채운, 지금 눈앞에 있는 색을 가리키고요. 하란은 스마트 글라스로 세상을 가리고, 찬은 매일을 여름방학처럼 살아가고요.

이 두 사람이 만나니까 서로의 속도가 맞춰지는 거예요. 너무 느린 시계와 너무 빠른 시계가 나란히 놓이면서, 같은 현재에 도착하는 거죠.

정리해보면요. 이 드라마에 나오는 거의 모든 게 결국 시간의 다른 모습이에요. 3개월 체험판은 제한된 시간 안에서 다시 살아가는 연습이고. 비행운과 채운은 과거의 흔적을 볼 거냐 지금의 색을 볼 거냐는 선택이고. 타임슬립 캐릭터 '원’은 과거를 피하지 않고 통과하는 용기가 될 수 있죠. 잃어버린 펜은 과거에 대한 마음이 조금씩 변해가는 증거고. 500년 향나무는 긴 시간을 버텨낸 존재의 힘이고. 나나와 만재, 그리고 라비앙 로즈는 상처 이후에도 계속되는 인생이고. 메멘토 모리는 유한한 삶을 알 때 비로소 오늘이 소중해진다는 깨달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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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시간이 하나의 말로 모입니다.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멈추지 않으니까, 겨울도 끝이 난다는 말을 하는겁니다.

비행운은 사라지고 채운이 피어나고, 흑백이었던 '원’한테 색이 입혀지고, 500년 향나무는 또 한 번의 봄을 맞이해요. 등록금 들고 야반도주했던 소녀는 수십 년 뒤 첫사랑 앞에서 다시 웃고, 전쟁터에서 태어난 노래는 80년이 지난 지금도 "인생은 장밋빛"이라고 지금의 상처를 가진 사람을 여전히 위로해요.

그래서 드라마가 묻는거같애요. 당신의 계절은 어디쯤인가요. 혹시 어떤 시간에 멈춰 있지는 않는건지. 비행운만 보면서 채운을 놓치고 있지는 않는건지.

아무리 길고 차가운 겨울이라도 끝은 있고, 멈춘 시계도 누군가의 온기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는걸 말하는 것같습니다. 그리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시계가 가리키는 곳에는, 생각보다 훨씬 더 찬란한 색깔과 계절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따듯한 메세지를 담고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번 영상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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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너계’ 18.5도와 함께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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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리뷰 #찬너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