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린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 걸까.” ‘모자무싸’ 예고편에 황동만의 말이죠. 어쩜 이 한 문장이 드라마에 대한 부푼 기대감을 갖게 하는 것같습니다. 작가가 박해영이라는 것만으로도 올해 가장 기대를 하게 만드는 작품이기도 하죠.
2016년, 또 오해영.
2018년, 나의 아저씨.
2022년, 나의 해방일지.
그리고 2026년,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입니다.
장르도 다르고 분위기도 다릅니다.
그런데 나란히 놓고 보면,
박해영이라는 작가가 반복하는 패턴이 있어요.
이 드라마를 보기 전에,
그 세 가지를 먼저 짚어보겠습니다.
첫번째 패턴은 “일상의 반복이 그 사람의 전부를 말한다”는 겁니다.
‘나의 해방일지’ 를 보면,
경기도 산포에서 서울까지
염씨 삼남매는 매일 아침 똑같은 길을 걷습니다.
첫째 염기정은 리서치 회사 팀장,
둘째 염창희는 편의점 본사 영업사원,
막내 염미정은 신용카드사 계약직이었죠.
직업은 다 다른데, 아침에 걷는 길은 같아요.
버스, 지하철, 또 걷기. 왕복 4시간입니다.
대사가 없어도 됩니다.
버스에서 창밖을 보는 미정의 눈 하나가
"나는 매일 이렇게 닳아가고 있다"를 전부 말하고 있었거든요.
‘나의 아저씨’에서도 같습니다.
박동훈은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같은 시간에 퇴근합니다.
삼안 E&C의 건축구조기술사, 45세 부장이죠.
아내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매일 아침 그 출근길을 걷습니다.
한숨 한 번 쉬고, 다시 걷구요.
또 오해영에서는 음향감독 박도경이
매일 혼자 녹음실에 앉아 소리를 듣습니다.
빗소리, 발자국 소리, 바람 소리.
세상의 소리는 전부 듣는데 정작 자기 안의 소리는 듣지 못해요.
파혼 이후 감정을 차단한 채, 루틴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세 작품에서 인물들이 걷는 장면은 단순하 이동이 아닙니다.
박해영 작가에게 걷는 장면은 그 사람이 얼마나 지쳐 있는지를 말하는 방법이에요.
그런데 모자무싸 예고편에서
형 황진만이 동생 황동만에게 말합니다.
“일은 나가서 죽기 살기로.” 그렇게 말하죠.
그러자 황동만이 받아칩니다.
“매일 죽기 살기로 하면 진짜 죽지.”라고 해요.
황동만은 20년째 데뷔에 실패한 예비 감독입니다.
황동만을 연기하는 구교환은 인터뷰에서
"대본을 읽고 내 일기장이 유출된 기분이었다"고 말했어요.
황동만의 20년은 뭐였을까요.
시나리오를 들고 제작사를 찾아다니고,
거절당하고, 고치고, 다시 찾아가는 루틴으로 보입니다.
매일, 20년 동안의 루틴이죠.
그런 황동만에게 선배 박영수가 이렇게 말합니다.
“재주도 없는 놈이 먼 욕심에 이판에 겨들어와서.”
이건 다른 사람의 평가이지만,
황동만이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할 겁니다.
1화에서 이 사람이 어떻게 걷고, 어디로 가고,
어떤 표정으로 앉아 있는지를 지켜보면 재미있을 것같습니다.
박해영 작가라면, 그 루틴 하나로 20년의 한 사람의 무게를 전부 보여주지 않을까 싶어요.
패턴 2는 박해영 작가식의 사랑의 정의입니다. 알아봐 주는 거에요.
박해영 작가의 드라마에서 사랑은 특이합니다.
심장이 뛰는 로맨스가 아니에요.
“이 사람이 나를 처음으로 제대로 봐줬다.”
그러니까 아무도 신경 안 쓰던 사람한테 처음으로 관심을 가져준다는 거에요.
그게 사랑의 시작입니다.
나의 아저씨.
이지안은 박동훈의 휴대폰에 도청 앱을 깔았습니다.
도준영 대표이사의 돈을 받고 박동훈을 해고시키기 위해서요.
그런데 도청을 하다가, 자기 이야기가 들립니다.
21살, 고아, 파견직.
사채업자 광일에게 맞으며 살아온 사람이에요.
그런 자신을, 박동훈이 감싸고 있었어요.
사람을 죽인 과거를 알면서도 편을 들어주는 소리가
이어폰을 통해 들립니다.
상무 면접 자리에서 이지안이 말하죠.
“여기서 일했던 3개월이 21년 제 인생에서 가장 따뜻했습니다.”
이건 단순한 고백이 아닙니다. "나를 사람으로 봐줬다"는 말이죠..
나의 해방일지에서,
염미정이 구씨에게 말합니다.
“날 추앙해요. 가득 채워지게.”
성이 구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한테요.
미정의 논리는 이겁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뭔 짓을 못해.
그러니까 넌 이런 등신 같은 날 추앙해서
자뻑에 빠질 정도로 자신감 만땅 충전돼서
야무지게 할 말 다할 수 있게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라고.” 그런 말이죠.
미정이 원하는 건 연애가 아닙니다. 자기 말을 흘려듣지 않는 사람. 자기를 대충 넘기지 않는 사람. 평생 아무도 자기한테 진심인 적이 없었거든요. 스스로를 "등신 같다"고 느끼는 사람한테 "아닌데"라고 말해줄 누군가 한 명. 그게 미정이 말한 추앙이었어요.
또 오해영에서도 같아요.
흙 오해영은 잘난 동명이인 옆에서 평생 비교당한 사람입니다.
박도경은 그 사람을 처음으로 “있는 그대로” 봐줍니다.
잘난 오해영이 아닌, 그냥 오해영을.
세 작품 모두,
상대방의 아픔을 정면으로 바라봐 주는 것, 그 자체가 사랑의 시작임을 말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모자무싸에서는요.
예고편을 보면 변은아가 과로로 코피를 흘리며 하는 말이 있었어요.
“버려진다 싶으면 온몸이 아프면서 코피가 나요.”
변은아는 영화사 기획 PD입니다.
버려질까 봐 치열하게 몸부림을 치며 살아왔고, 몸이 먼저 반응하는 사람이에요.
구교환은 변은아라는 인물에 대해 이렇게 말했어요.
“황동만이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들여다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었고,
그에게 '안온함’을 선사하는 존재.”라고 했었죠.
흥미로운 지점이에요.
변은아 자신도 버려짐의 공포를 안고 있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황동만에게 안온함을 준다는 거예요.
자기도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무가치함을 알아봐 주는 겁니다.
나의 아저씨에서 이지안도 그랬죠.
자기 삶이 바닥인 사람이, 박동훈의 고통을 먼저 봤습니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구씨도 정체불명의 떠돌이였지만,
미정의 추앙을 받아주는 사람이 됐어요.
박해영 작가에게 알아봐 주는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도 부서져 있는 사람이에요.
부서진 사람끼리 서로의 균열을 알아보는 것.
그게 바로 박해영 작가식의 사랑입니다.
[패턴 3 “부끄러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해방이다”라는 겁니다.
박해영 작가의 드라마에는 해결이 없습니다.
문제가 풀리는 게 아니라,
문제를 가진 자신을 인정하는 데서 끝납니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삼남매는 각자 부끄러움을 안고 살아요.
인싸가 되고 싶은데 안 되는 기정.
연애를 못하는 창희.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미정.
해방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이런 내가 부끄럽다"를 인정하는 순간이 해방이었어요.
나의 아저씨에서 박동훈은 아내의 불륜을 알면서도 이혼하지 않습니다.
이지안은 사람을 죽인 과거를 품고 있어요.
마지막에 이지안은 새 삶을 시작하고, 박동훈은 자기 회사를 차립니다.
하지만 과거를 지워서가 아닙니다.
과거를 안은 채 한 발 나간 거예요.
또 오해영에서 흙 오해영은 라디오 생방송에
전화해서 울면서 말합니다. "난 내가 여전히 애틋하고 잘되길 바래요."
잘난 동명이인 옆에서 평생 비교당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비교를 이긴 게 아닙니다.
여전히 비교당하고 있어요.
다만, 그 안에서 자기를 미워하지 않기로 한 겁니다.
못났어도 나는 나한테 편이 되주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모자무싸 예고편을 보면,
이 드라마의 인물들은 전부 비슷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형태만 다를 뿐이에요.
형 황진만이 묻습니다.
“네가 원하는 게 뭐야? 패배야? 성공이야? 뭐야?”
황동만이 대답합니다.
“불안하지 않은 거. 그냥 불안하지만 않으면 돼.”
성공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불안하지 않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는 성공한 사람도 똑같이 불안합니다.
다섯 편의 영화를 만든 감독 박경세에게
톱배우 장미란이 말합니다.
“감독님은 데뷔작이 제일 나았던 거 같아요.”
다섯 편을 만들었는데, 첫 번째가 제일 나았다.
이 한마디가 박경세를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박경세가 외칩니다.
“황동만만 불쌍하고 나는 안 불쌍하냐.”
20년째 데뷔를 못한 사람도 불쌍하고,
다섯 편을 만든 사람도 불쌍합니다.
최동현이 말합니다.
“불쌍해. 우리 다 불쌍해.”
고박필름의 고혜진 대표가 말합니다.
“말아먹어서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성공이 무가치함을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제가 기대를 하고 있는건 이 지점이에요.
박해영 작가가 이번에는 정면에서 보여주는 것 같아요.
전작에서는 무가치함이 주로 실패한 사람, 가진 것 없는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이지안은 고아였고, 미정은 계약직이었고, 흙 오해영은 비교당하는 사람이었죠.
그런데 모자무싸에서는 성공한 감독도, 톱배우도, 제작사 대표도 나옵니다.
전부 같은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어요.
실패의 무가치함과 성공의 무가치함이 같은 무게로 놓이는 것같습니다.
그리고 이 대사가 나옵니다.
황동만이 말합니다.
“아 진짜 성공은 바라지도 않아요.
그냥 한 편만 했으면 좋았어요.
그래서 무가치함을 조금은 극복할 수 있게.”
저는 여기서 "극복"이라는 단어보다 “조금은"이라는 말이 주목되더라구요.
완전한 극복이 아니에요.
“조금은.”입니다.
무가치함을 없애는 게 아니라,
무가치함을 안고도 숨 쉴 수 있는 정도아닐까요?
그렇게 보면 이게 박해영 작가가 매번 쓰는 결론입니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미정이 완벽하게 해방된 게 아니듯이.
나의 아저씨에서 박동훈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게 아니듯이.
또 오해영에서 흙 오해영이 잘난 오해영을 이긴 게 아니듯이.
“조금은 극복할 수 있게.”
아마 이 드라마는, 그 "조금"에 도달하는 과정을 보여주는게 아닌가 싶어요
이 드라마가 기대되는 이유를 좀 정리해보죠. 뭐 작가가 감독의 필모자체가 기대할 수밖에 없지만요.
첫 번째, 구교환의 첫 TV 드라마 주연입니다.
구교환은 2006년에 연극배우로 데뷔해서 20년 가까이 영화와 연극을 오가며 연기해 온 사람입니다. D.P.,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군체 — 조연이나 특별출연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겨왔지만, TV 드라마에서 첫 회부터 끝 회까지 이끄는 주연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런 배우가 맡은 역할이 20년째 데뷔를 못한 예비 감독 황동만입니다.
구교환 자신도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배우예요. 대본을 읽고 "내 일기장이 유출된 기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이건 연기가 아니라 체험에 가까울 수 있어요. 그 무게가 화면에 어떻게 실리며 살아날지가 큰 기대가 됩니다. 이게 첫 번째 기대입니다.
두 번째, 박해영 작가가 처음으로 '같은 업계 사람들의 무리'를 다룬다는거죠.
전작을 보면요. 나의 아저씨는 회사원과 파견직의 이인 구도였고, 나의 해방일지는 삼남매 가족이 중심이었고, 또 오해영은 동명이인 두 여자와 한 남자의 삼각이었습니다.
모자무싸는 다릅니다. 대학 동기 8명이 같은 꿈을 갖고 시작해서, 20년 뒤에 완전히 다른 자리에 도착한 이야기입니다. 감독이 된 사람, 배우가 된 사람, 제작자가 된 사람, 그리고 아무것도 되지 못한 사람.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한 사람들 사이의 시기, 질투, 열등감, 우정이거든요.
박해영 작가가 두 명의 관계를 쓸 때도 감탄스럽게 깊었는데, 8명의 관계가 얽히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요. 예고편에서 그 조각들이 조금 보입니다.
성공한 감독 박경세는 "나는 안 불쌍하냐"고 외치고, 제작사 대표 고혜진은 "말아먹어서 죄송합니다"라고 합니다. 8명이 전부 각자의 무가치함을 안고 있어요.
세 번째, 이 드라마의 제목 자체가 기대 포인트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저는 이 제목 자체가 주는 기대가 큽니다.
전작에서 은유적으로 깔려 있던 주제였거든요. 근데 이번에는 그것들이 모두 제목으로 올라왔습니다. 박해영 작가가 더 이상 숨기지 않겠다는 거예요.
나의 아저씨에서는 "좋은 어른이란 무엇인가"를 물었고, 나의 해방일지에서는 "해방이란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가치함이란 무엇인가"를 정면으로 묻습니다.
그리고 예고편 마지막에 황동만이 말합니다.
"그냥 한 편만 했으면 좋았어요. 그래서 무가치함을 조금은 극복할 수 있게."
이 한 문장이 드라마 전체의 질문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 편을 만들면 정말 무가치함이 극복될까. 아니면 한 편을 만들어도 또 다른 무가치함이 시작될까. 박해영 작가가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정말 기대가 됩니다.
https://youtu.be/L7wBseiiHew?si=zK7fPMtEPX4Tpqm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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