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드라마는 색깔에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희주가 궁에 초대받아 화려하게 들어갈 때 입었던 옷이 새빨간 색이었어요. 비서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렸던 색이죠. 궁에 들어갈 때 절대 빨간색을 입지 말라고요. 그런데 이 여자는 그 말을 듣고도 빨간색을 골랐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 말을 들었기 때문에 빨간색을 고른 건지도 모릅니다. 1회 희주의 이 빨간옷은 다른 빨간색들과 함께 사실 이 드라마가 하고 싶은 말을 전부 담고 있습니다. 21세기 대군부인은 단순한 왕실 로맨스가 아닙니다. 이 드라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이야기를 궁이라는 무대 위에 올려놓았구요. 희주의 빨간색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이 드라마의 세계관부터 짚어볼게요. 배경은 2026년 대한민국인데, 우리가 아는 대한민국과 조금 다릅니다. 1786년, 정조의 아들인 문효세자가 실제 역사에서는 다섯 살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 드라마에서는 살아남습니다. 문효세자가 정조의 개혁 의지를 이어받아 나라를 이끌었고, 왕실이 중심이 되어 일제강점기도 겪지 않고, 자생적으로 근대화를 이룬 겁니다. 그래서 2026년에도 왕이 존재합니다. 물론 실질적인 정치 권력은 국무총리와 행정부가 갖고 있는 입헌군주제이고, 왕실은 상징적인 존재에 가깝죠.
여기서 중요한 게 있습니다. 이 입헌군주제라는 설정 자체가 우리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점이에요. 사실 드라마가 좀 낯설어요. 우리는 모두가 평등하다고 배웠잖아요. 능력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믿죠.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그렇지 않죠. 어느 집안에서 태어났는지, 부모가 누구인지,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이런 것들이 보이지 않는 벽처럼 작동하고 있다는 걸 우리는 사실 알고 있습니다. 조금더 나가면 현대적인 계급사회라고도 보잖아요. 이 드라마는 그 보이지 않는 벽을 왕실이라는 눈에 보이는 벽으로 바꿔서 보여주는 겁니다. 왕족, 양반, 평민. 이 신분 체계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다는 걸 입헌군주제라는 판타지를 통해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는 거죠.
이 세계 속 주인공 성희주는 대한민국 최대 재벌인 캐슬그룹 회장의 딸입니다. 돈은 넘칩니다. 능력도 뛰어나서 캐슬뷰티를 업계 1위로 키워냈죠.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요. 희주는 사생아입니다. 혼외자라는 이유로 평생 "천것"이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도, 아무리 뛰어난 성과를 내도, 태어난 순간부터 정해진 신분의 벽을 넘을 수가 없었던 거예요.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다 샀지만, 돈으로 살 수 없는 딱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신분이요. 그래서 희주는 결심합니다. 재벌 위에 있는 유일한 존재, 왕실로 들어가겠다고 하는게 드라마의 설정입니다.
상대는 이안대군 이완입니다. 왕의 동생이지만, 이 사람도 단순한 왕자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를 21세기 수양대군이라고 부릅니다. 형인 선왕이 병약해서 이안이 열여덟 살 때부터 사실상 나라를 이끌었거든요. 차갑고 완벽한 왕족처럼 보이지만, 이 사람이 희주의 대시에 대해 의외의 답을 내놓았죠. 연애결혼이었습니다. 궁에서 연애로 결혼한다는 건 도리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왕족의 혼인은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지 개인의 감정이 끼어들 자리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이안은 그걸 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건 왕실의 힘을 키우겠다는 야망이 아니라, 왕실의 낡은 규칙 자체를 거부하겠다는 마음이 있는게 아닌가 싶어요. 희주가 빨간 옷을 입고 바깥에서 궁의 법도를 정면으로 깨며 들어오는 사람이라면, 이안은 연애결혼처럼 개화된 생각을 갖고 있는거죠. 어쩌면 그렇게 희주를 통해서 생각이 바뀌어 가는건지도 모르구요. 안에서부터 그 법도를 깨려는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바깥에서 안으로 향하는 불과, 안에서 바깥으로 향하는 불. 두 사람이 같은 빨간색을 좋아한다는건 우연이 아니겠죠. 물론, 이안의 마음이 어떻게 변하고 충돌해갈지는 더 지켜봐야겠지만요.
여기서 이 드라마가 정말 섬세하게 짜여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장치가 있습니다. 바로 색깔입니다. 희주는 처음 궁에 들어갈 때 새빨간 옷을 입습니다. 그런데 이게 그날만의 선택이 아니에요. 희주의 사무실에 보면 유독 희주가 앉는 의자의 색깔은 짙은 빨간색입니다. 왕실학교 다닐 때도 빨간 색이었어요. 활쏘기 대회에서 희주가 소속된 팀 이름이 주작이었는데, 그때 복장도 빨간색이었습니다. 빨간색은 희주가 일부러 고른 색이 아니라 원래부터 이 사람을 따라다니는 색인 거예요. 주작은 불의 새입니다. 사생아라는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나 스스로 불타오르며 올라온 희주의 인생 그 자체가 주작인 셈이죠. 빨간색은 희주의 야망이고, 생존 본능이고, 절대 꺼지지 않는 열정 그 자체입니다.
재미있는 건 이안대군도 좋아하는 색이 빨간색이라는 겁니다. 불타는 뜨거운 열정을 가진 인물이라고 소개되죠. 이안이 희주를 보는 마음은 이렇게 소개가 됐죠. 이기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자. 자신과 닮았으나 자신과 다른 선택을 하는 여자. 붉은 색을 좋아하는 것도 비슷하다고요. 두 사람은 같은 색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둘 다 체제 안에서 억눌려 있지만 내면에 거대한 불꽃을 품고 있고, 그 불꽃의 색이 같다는 건 이 계약결혼이 단순한 사업적 거래가 아니라 같은 종류의 인간이 서로를 알아본 사건이라는 뜻이에요. 그건 이미 왕실학교에서 활쏘기를 할 때 이안이 희주를 눈여겨 보고 있었던 것에서 시작됐다고 봐야죠.
이 빨간색과 완벽하게 대비되는 인물이 있습니다. 김재경이라는 여자인데요. 앞으로 어떤 역할을 맞게 될지 모르지만, 대비 윤이랑이 이안대군의 부인 후보로 밀었던 사람입니다. 이 여자가 등장할 때 옷색깔이 유독 눈에 띕니다. 온통 하얀색이거든요. 흰색은 순종의 색이에요. 왕실의 법도에 완전히 맞춰진 사람, 체제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 대비 입장에서 이안대군을 통제하려면 그의 내면에 있는 불을 꺼야 하잖아요. 김재경의 흰색은 바로 그 역할을 위한 겁니다. 이안의 불꽃을 잠재우고, 왕실의 질서 안에 가둬두기 위한 선택이죠. 물론, 그게 정말 결혼을 시키려는 의도라기보다는 이안을 흔들려는 속셈이겠지만요. 반면에 희주의 빨간색은 이안의 불을 끄는 게 아니라 함께 타오른다는걸 암시하죠.대비에게 희주가 가장 위험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어요.
이 불의 이미지가 가장 비극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안의 형 이환의 죽음이에요. 이환은 왕이라는 자리의 무게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스스로 내려오겠다고 선언하죠. "죽는 것보다야 낫지"라고 말할 정도로 왕실이라는 제도 자체가 그에게는 서서히 죽어가는 과정이었어요. 그런데 대비 윤이랑은 그 교지를 불태웁니다. 자기 아들인 세자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요. 남편인 왕을 향해서 저주를 퍼부어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이를 갈면서요. 그리고 그 불붙은 종이를 이환이 그대로 방치하면서 그대로 죽음을 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체제를 벗어나려 했지만 실패했죠. 체제가 그를 태워버린 겁니다. 이환에게 불은 자기 의지로 지른 것이 아니었어요. 기존 권력이 자기 질서를 지키기 위해 지른 불이었습니다. 이환은 불에 의해 소멸당한 사람이지, 불이 된 사람이 아니었던 거예요. 그래서 희주의 빨간색이 재미있습니다.
저는 희주의 빨간색을 보면서 마치 수퍼히어로의 탄생같은 암시를 보는 것같아서 무척 재미있었는데요. 아무튼 이환이 보여준 건, 안에서 조용히 물러나는 방식으로 이 계급을 절대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이에요. 왕실 안의 사람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구조 자체가 사람을 집어삼키니까요. 그런데 희주는 완전히 바깥에서 온 사람입니다. 사생아, 천것이라 불리던 사람, 이 체제가 가장 밑바닥으로 규정한 사람이에요. 그 희주가 스스로 불이 되어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겁니다. 이환에게 불은 죽음이었지만, 희주에게 불은 본질 그 자체니까 태워지는 게 아니라 태우는 쪽이 되는 거죠.
이 드라마의 끝은 아마도 이런 방향이 아닐까 합니다. 이안은 형과 아버지의 죽음이 사고가 아니라 대비와 민정우 총리 세력이 꾸민 일이었다는 진실을 마침내 알게 됩니다. 원수를 처단하고 직접 왕위에 올라 강력한 힘을 휘두를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이안은 다른 길을 선택할 겁니다. 형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그 추악한 권력의 고리 자체를 끊어내기 위해, 왕실의 모든 기득권을 스스로 해체하는 쪽으로 가는 거예요. 역사 속 수양대군이 왕위를 위해 피를 흘렸다면, 21세기의 수양대군이라는 별칭을 가진 이안은 왕실이라는 제도 자체를 내려놓음으로써 정의를 구현하는 겁니다.
희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신분을 사기 위해 궁에 들어갔지만, 왕실의 피 묻은 역사를 목격하면서 그 야망은 부서져 내리겠죠. 계급이 가진 허황된 의미를 발견할거구요. 대신 그 자리에 이안의 상처를 보듬고 함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려는 용기가 자리잡게 되겠죠. 재벌 후계자 자리를 내려놓고, 사생아라는 상처를 딛고 당당히 자신의 자리를 찾는 모습으로요.
이환은 혼자서 조용히 물러나려다 체제에 의해 타버렸습니다. 하지만 이안과 희주는 둘이 함께 그 체제 자체를 태워버리는 쪽을 선택하는 겁니다. 안에서 품고 있던 불과 밖에서 들어온 불이 만나서, 이번에는 제도가 사람을 태우는 게 아니라 사람이 제도를 태우는 결말로 가는 거죠. 결국 주작인 희주가 궁으로 들어간다는 건 신분 상승을 하러 간 것이 아니라 오래된 질서를 소각하러 간다는 뜻일 겁니다. 그리고 그 불은 파괴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주작은 불(火)을 다루기 때문에, 소멸과 재창조의 이미지와 연결된다고 봐야죠. 때로는 재생이나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는게 주작이기도 하죠. 태운 자리 위에 신분이나 계급이 아닌 사람 그 자체로 서로를 알아보는 새로운 관계를 세우는 것. 이 드라마가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바로 그겁니다.
이 드라마는 우리가 갈망했던 역사에 대한 판타지를 통해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것들을 묻는게 아닌가 싶어요. 어느새 벽이 되어가는 계급이라는 것을 우리가 스스로에게 씌우고 있지 않은지를요. 좌충우돌 불이 되어버릴 희주와 희주를 통해 또다른 불이 되어 현대의 계급을 의미하는 체제를 불태워버릴 이안의 활약이 기대되는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