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만을 설명할 때 중요한 장면이 있습니다. 영화감독인 황동만이 사랑하는 영화 두 편입니다. 하나는 형이 들어올 때 정신 나가듯이 보다가 형 때문에 깜짝 놀랄 정도로 멍하게 보던 영화였죠. ‘봄날은 간다’였습니다. 또 한편은 최동현에게 아픈 모욕과 상처를 받고 돌아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헤드폰을 끼고 보던 영화 ‘빌리엘리어트’였습니다. 두 영화 모두 너무 좋은 영화죠. 아마 한 번도 안 본 분은 있을지 몰라도 한 번만 본 적은 없는 영화가 아닐까 싶어요. 특히 ‘빌리엘리어트’를 5번은 넘게 저도 봤던 것 같습니다.
왜 이 영화는 황동만이라는 인물의 내면을 보여주고 황동만 같은 우리를 말하고, 황동만 같은 평범한 우리 인생을 말하기 위해 넣었던 걸까요? 그리고 황동만의 시나리오 ‘날씨를 만들어 드립니다’는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요?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세 영화는 모두 따로 놀지 않습니다. 모두가 하나의 문장을 이룬다고 봐야죠.
‘빌리 엘리어트’부터 보죠. 보셨나요? 가슴 뛰는 영화죠. 이 영화의 겉은 발레 소년의 성공담입니다. 영국 탄광촌의 가난한 집 아이가 발레를 하겠다고 합니다. 당연히 아버지는 반대합니다. 탄광 파업 중이라 먹고살기도 빠듯한데 발레라니요. 너무 가난하고 파업도 실패하고 절망의 끝을 살거든요. ‘빌리 엘리어트’ 영화 이야기를 다 할 순 없지만 대략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빌리의 춤을 딱 한 번 보면서 마음이 바뀐다. 아들의 오디션 비용을 마련하려고 파업을 깨고 혼자 탄광으로 내려간다. 동료들에게 배신자라고 욕먹는 걸 감수하면서 빌리의 오디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예요. 마지막 장면, 성인이 되어 세계적인 발레리노가 된 빌리가 백조의 호수 무대 위를 준비하며 장엄하게 뛰어오르고 아버지는 객석에서 울면서 아들 빌리를 보는 내용이에요. 빌 리가 ‘백조의 호수’에서 하이라이트로 힘차게 날아오르는 장면을 동만이 보면서 눈물을 흘리죠.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으며 울던 후에 이 영화의 이 장면을 봅니다. 황동만은 20년째 날아오르지 못한 사람입니다. 시나리오를 들고 다녔지만 아무도 안 읽어줬고, 영화 한 편 못 만들었죠. 동기들은 감독이 되고 대표가 되고 그럴듯한데, 자기만 땅에 있습니다. 빌리는 모두가 안 된다고 했는데 날아올랐죠. 황동만은 모두가 안 된다고 하는데 그 말대로 아직 못 날았다. 빌리는 모두가 안 된다고 했는데 날아올랐죠. 그러나 황동만은 모두가 안 된다고 말하는 그 자리에서 정말 아직 날지 못한 사람입니다
빌리가 무대 위로 도약하며 날아오르는 것처럼 보이던 그 하이라이트를 황동만이 보는 건 "내가 되고 싶었던 모습"일 겁니다. 그걸 보는 황동만이 눈물을 흘리거든요. 그런데 이 눈물에는 한 겹이 더 있습니다. 빌리 엘리어트는 빌리의 영화가 아니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영화예요. 아버지가 자기 신념을 버리고, 동료들에게 배신자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탄광으로 내려갑니다. 사회의 통념도 버리고요. 아들 빌리의 꿈을 위해서죠. 빌리에게는 끝까지 밀어준 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화의 하이라이트처럼 빌리는 날아오를 수가 있었죠. 그런데 황동만의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고모부는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강탈해 버리고 두 형제를 비참하게 내몬 사람이에요. 형 황진만이 있지만 진만은 정반대입니다. 진만 역시 꿈을 접고 노동판으로 내려가요. 그리고 동만 역시 자기 따라 용접배우며 입에 풀치하며 살라고 합니다. 진만 자신이 시인의 꿈을 꾸다 먼저 부서진 사람이니까요. 빌리의 아버지가 "이 아이만은 날려 보내자"라고 했다면, 진만은 "너도 내려와"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황동만의 눈물은 두 겹이에요. 꿈을 이루며 날아오른 빌리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라고 눈물짓는 것이고, 동시에 빌리에게는 있었지만 자기에게는 부재한 것,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아무도 없다는 부재 그래서 자신의 꿈이나 자신의 존재자체를 무가치하다고 계속 확인받아야 하는 허기에서 오는 눈물이라고 봐야죠. 그리고 이 장면이 최동현에게 모욕당한 직후에 놓인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시나리오도 조롱당하고, 존재 자체가 무가치하다고 강요받은 황동만이 〈빌리 엘리어트〉를 봤거든요. 현실에서 부정되는 자기를 영화 속 도약으로 간신히 봉합하려는 행위라고 봐야죠. 현실은 "너는 안 돼"라고 했는데 영화는 "그래도 어떤 사람은 됐다"를 말해주니까요. 어두운 커튼을 치고 황동만은 무가치함을 강요받을 때마다 그 틈으로 들어가 숨었던 겁니다. 그래서 황동만은 더 영화라는 것을 떠나지 못했던 건지도 몰라요. 실제로는 날씨를 만들 수는 없지만, 영화에서는 날씨를 만들 수가 있거든요. 그토록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강요받아도 그건 그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아직 빌리의 아름다운 도약에 반응하고, 아직 자기 안에 꿈의 잔해가 남아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황동만의 그 눈물은 패배의 증거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직 죽지 않은 증거기도 해요. 황동만 스스로가 그걸 확인하고 싶기 때문에 아마도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영화를 봤을 것 같고요.
또 다른 영화가 〈봄날은 간다〉입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사랑했던 영화죠.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는 사라져 가는 자연의 소리를 녹음하는 사람입니다. 바람 소리, 물소리, 새소리. 사라지기 전에 담아두는 게 이 사람의 일이에요. 상우는 라디오 PD 은수와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이별을 하게 됩니다. 계절이 바뀌듯 사랑도 바뀌게 되죠.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유명한 대사를 남기죠. 상우가 아무리 녹음해도 소리는 사라지고, 아무리 붙잡아도 봄날은 갑니다.
또 다른 영화가 〈봄날은 간다〉입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사랑했던 영화죠.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는 사라져 가는 자연의 소리를 녹음하는 사람입니다. 바람 소리, 물소리, 새소리. 사라지기 전에 담아두는 게 이 사람의 일이에요. 상우는 라디오 PD 은수와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이별을 하게 됩니다. 계절이 바뀌듯 사랑도 바뀌게 되죠.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유명한 대사를 남기죠. 상우가 아무리 녹음해도 소리는 사라지고, 아무리 붙잡아도 봄날은 갑니다. 황동만이 형이 들어올 때 멍하니 이 영화를 보고 있었습니다. 뭘까요? 왜 황동만이 이 영화를 반복해서 보고 있다는 걸 작가는 보여줬을까요? 황동만의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20년 동안 자기 안의 무언가를 붙잡고 있는 사람입니다. 시나리오라는 형태로, 꿈이라는 형태로, "나는 아직 이걸 놓지 않았다"는 형태로요. 그런데 세상은 계속 가죠. 동기들은 전부 앞으로 나갔는데 황동만만 그 자리에서 사라져 가는 무언가를 쥐고 서 있습니다. 상우가 사라지는 소리를 녹음기에 담듯, 황동만은 사라지는 자기 자신을 시나리오에 담고 있거든요. 둘 다 이미 없어져가는 것을 붙잡으려는 사람입니다. 이 영화에서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유명한 상우의 질문은 황동만 를 말할 때 이렇게 바뀝니다. 어떻게 꿈이 변하니. 어떻게 사람이 변하니. 어떻게 나를 믿어주던 사람들이 변하니. 8인회는 변했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세상도 변하고요. 날씨가 없어지는 게 익숙해지고 적응해서 살아가고요. 그렇게 변해가요. 그런데 황동만만 안 변했습니다. 안 변한 사람이 변해버린 세상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 그게 〈봄날은 간다〉를 보는 황동만의 눈입니다.
〈빌리 엘리어트〉만 보는 사람이라면 황동만은 그냥 꿈 많은 실패자처럼 보여요. 〈봄날은 간다〉만 보는 사람이라면 이미 체념한 중년처럼 보이겠죠. 그런데 두 영화를 배치한 이유는 뭘 가요? 아직 꿈을 버리지 못했지만, 이미 많은 것이 지나갔다는 것도 아는 사람. 그 두 가지가 황동만을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황동만의 비극이기도 하죠. 아직 포기 못했어요. 그런데 가능성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도 안다는 거예요. 더 처절합니다. 〈빌리 엘리어트〉를 볼 때의 황동만은 "그래도 날고 싶다"는 사람이고, 〈봄날은 간다〉를 볼 때의 황동만은 "하지만 많은 건 이미 지나갔다"는 것도 아는 사람입니다. 이 둘이 동시에 황동만인 겁니다. 남들 앞에서는 먹고, 굽신거리고, 초라하게 보여도, 혼자 있을 때는 〈빌리 엘리어트〉에 울고 〈봄날은 간다〉에 빠지는 사람. 이건 황동만이 단지 생존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삶의 결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전혀 무가치하지 않은데 가치 없는 존재로 사라져 간다는 것, 그래서 황동만이라는 캐릭터가 더 슬픈 겁니다.
그런데 영화가 하나 더 있죠. 〈날씨를 만들어 드립니다〉, 황동만의 시나리오입니다.〈날씨를 만들어 드립니다〉는 AI가 날씨를 없애버린 세계의 이야기라고 하죠. 구름이 없고, 바람이 불지 않고, 나뭇잎이 흔들리지 않는 세상. 그 세계에서 날씨를 다시 만드는 주인공의 이야기입니다. 황동만이 이 시나리오와 관련해 하던 말이 있죠. 세상이 있고 없고의 기준은 날씨가 있고 없고의 차이다. 구름이 떠 있고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흔들리는 한, 그런 날씨가 있는 한, 세상은 망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버스 안에서 독백을 합니다. <날씨를 만들어 드립니다> 이 시나리오는 〈빌리 엘리어트〉와 〈봄날은 간다〉를 동시에 품고 있습니다.
〈빌리 엘리어트〉을 보죠. 빌리가 날아오를 수 있었던 건 바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불어서 비행기처럼 날았다는 얘기가 아니고요. 비유적으로요. 발레 선생님이 재능을 알아봐 줬고, 아버지가 결국 믿어줬고요. 세상 사는 게 다 뻔한 거지. 타협하고 순응하고 살지 않고 받아주고 이해하고 지켜봐 주고요. 빌리 곁에는 그래도 날씨가 있고 바람이 있었고, 날 수 있었습니다. 〈날씨를 만들어 드립니다〉에서 날씨가 사라진 세계는 그 바람이 없는 세계예요.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고 아무도 받아주고 밀어주지 않는 세계입니다. 변은아가 나타나기 전에 황동만의 세상이죠. 빌리는 날씨가 있는 세상에서 날았고, 황동만은 날씨가 없는 세상에서 20년째 날지 못하고 있습니다. 황동만이 시나리오에 "날씨를 다시 만들겠다"라고 쓴 건, 자기에게 없었던 그 바람을 직접 만들어보겠다는 이야기예요
〈봄날은 간다〉를 보죠. 상우는 사라지는 소리를 녹음합니다. 녹음해도 사라지는 건 막을 수 없습니다. 봄날은 결국 가거든요. 〈날씨를 만들어 드립니다〉도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날씨가 사라진 세계에서 날씨를 다시 만든다는 건, 그건 이미 사라진 것을 되살리겠다는 이야기예요. 상우가 사라진 소리를 녹음기에 남기듯, 황동만은 사라진 날씨를 되살리고 싶어 하죠. 둘 다 이미 없어진 것을 붙잡으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상우는 기록만 하죠. 녹음기에 담을 뿐, 그걸 진짜로 되돌리지는 못하죠. 봄날이 간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이 영화 〈봄날은 간다〉의 결론이잖아요. 하지만 황동만의 시나리오는 거기서 한 발 더 나갑니다. 날씨를 기록하는 게 아니라 만들거든요. 사라진 것을 애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시 만들어내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황동만이 상우와 다른 지점이고, 이것이 황동만이 아직 멍하니만 있지 않다는 증거기도 합니다.
황동만이 말하던 날씨의 정의가 있어요. 구름이 떠 있고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흔들리는 한 세상은 망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독백을 합니다. 이건 대단한 무언가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거창한 성공이나 드라마틱한 역전도 아니고요. 구름. 바람. 나뭇잎의 흔들림. 아주 작고, 아주 당연하고, 그래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들이에요. 그것만으로 세상이 망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황동만이 세상의 기준으로 삼는 건 그런 겁니다.
이건 또 〈빌리 엘리어트〉의 ‘빌리’가 날아오르며 도약하던 것과는 결이 다릅니다. 빌리의 도약은 화려합니다. 무대 위에서, 조명 아래에서, 모두가 동경하고 기대하며 보는 앞에서 날아오르거든요. 그런데 황동만이 지키려는 날씨는 화려하지 않아요. 그냥 바람이 부는 것. 그냥 구름이 있는 것. 그냥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말하죠. 황동만은 빌리처럼 날아오르고 싶어 하면서도, 정작 자기 시나리오에는 날아오르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람이 부는 이야기를 씁니다. 황동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드라마가 말하는 것, 황동만을 말하는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있는 겁니다. 황동만은 꿈의 크기를 말하는 게 아니라 꿈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말하는 사람인 겁니다.
날씨가 있다는 건 세상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고, 날씨가 없다는 건 세상이 죽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황동만에게 시나리오가 있다는 건 자기가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고, 시나리오를 포기한다는 건 자기가 죽는다는 뜻입니다. 〈날씨를 만들어 드립니다〉 결국 황동만 자신의 이야기기도 하고요.
박해영 작가는 황동만의 마음을 세 편의 영화 사이에 숨겨두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빌리 엘리어트〉에는
날아오르고 싶은 갈망을 넣었고〈봄날은 간다〉에는 사라져 가는 것을 붙잡을 수 없는 체념을 넣었고
그런데 황동만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날씨를 만들어 드립니다〉를 쓴 거예요. 그래서 하나의 문장이 되는 겁니다. 봄날은 갑니다. 사랑도 가고, 계절도 가고, 사람도 갑니다. 그건 막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전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사라져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진짜 느꼈던 것. 내가 진짜 원했던 것. 내가 진짜 나였던 순간. 그건 사라지면 안 되는 겁니다. 황동만은 그걸 붙잡고 있는 사람입니다. 날씨가 사라진 세계에서 다시 바람이 불 수 있다는 이야기이고 햇살이 다시 올 수 있다는 이야기이고 계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라지고 사라져야 하는 것들 사이에서 사라져서는 안 되는 것을 세 영화를 통해서 한 문장으로 표현한 게 아닐까 그건 비단 황동만만이 아니죠. 계절이 고픈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도 되는 게 아닐까요? 18.5도의 생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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