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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윤 Sep 27. 2024

책 천천히 읽기가 죄스럽다


수능이 내 독서 습관을 망쳐놓았다. 국어(당시는 언어라고 불렀음) 시험을 볼 때면 빨리 읽는 법을 배웠다. 비문학과 무려 문학을 그렇게 다뤘다. 시도 마찬가지였다. 고전시가가 나오면 단어 자체도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는데 대충 때려 맞춰 문제의 정답을 찾는 연습을 했다.


'원미동 사람들'을 읽는 중이다. 한 편 한 편 재밌다. 작가가 사용하는 낱말들이 40년이 지난 지금도 구현 가능할지, 나는 이런 말들을 종이 위에 옮겨 적을 수 있을지 막막할 정도로 신랄하다. 그런데 난 이런 책들을, 책이라고 할 수도 없고 책의 발췌문을 빨리 읽는 법을 배웠다. 그런데 난 글을 읽는 게 느렸다.


나는 아무리 속독을 하려고 해도 단어 하나하나가 생선 가시처럼 눈에 걸려서 쉽게 넘어가질 못했다. 한 문장씩 맛보면서 읽어야 컨텍스트(context)가 읽히는데 학교와 학원에선 텍스트(text)만 욱여넣는 법을 알려줬다. 그래서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냥 객관식의 정답이라고 생각되는 번호를 골랐다. 국어 시험 중 다른 학생들이 시험지를 넘기는 소리를 들으면 뒤쳐지는 마음에 문제를 다 못 풀었어도 그냥 따라서 넘겼다. 그 뒤따라가기는 3년에 걸쳐 평균 정도가 되었고 수능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뭘 배운 건지 모르겠다. 국어라기보다 쾌속 독해를 배운 것 같다.


두꺼운 책을 읽으면 남은 두께를 체크하는 습관이 있다. 그 분량을 보면 막막하다.


- 내가 뚫고 나갈 수 있을까?


지금도 딴생각을 하다 문장을 놓치면 처음으로 돌아간다. 고등학교 때와 같다. 대충 스윽 보는 게 책에 대한 무시로 느껴진다. 한 글자씩 애써서 적었을 텐데.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읽는 건 실력이 부족한 사람이나 하는 짓이라고 배워서 지금도 천천히 반복해서 읽으면 죄스럽다. 책한테는 좋은 일 해준 것 같은데 어디 가서 이렇게 읽는다고 말을 못하겠다.


한주에 한 권 읽기는 나한테 무리한 얘기다. 너무 안 읽어서 생긴 말이려니 하지만 몇 주건 몇 달이건 몇 권을 얼마의 속도를 읽든지 내 마음대로 아닌가. 여러 권을 빨리 읽기가 아니라 한 권을 제대로 읽고 싶다. 얼마나 빨리 읽는지는 누구를 위한 시합이더냐. 몇 권을 읽는지가 무엇이 그리도 중하더냐. 읽을 때 어떤 자세로 읽느냐가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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