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시계마저도 안에 습기가 차 제 가루를 다 떨어뜨리지 못한다. 삼분치가 안 되는 가루더미는 유리관 밑둥에 쌓여 머쓱하게 내 눈치를 본다. 홍차를 주문했었다. 그리고 이 모래시계가 주어졌다. 모래시계로 삼분이 지나면 컵의 뚜껑을 열고 차를 즐기라 했는데, 이탈자들이 아직도 윗둥에 들러붙어 제 주장을 한다. 내 거대한 손이 모래시계를 어슬어슬 흔들어내고 나서야, 유리관의 허리춤 밑으로 파르르 미끄러진다.
잔가루들을 다 밑으로 흘려보내고 난 뒤야, 삼분이 채워졌다고 만족하고선 컵의 뚜껑을 열었다. 이파리를 잘게 다진 건더기가 둥실둥실 떠있다. 어떻게 걸러 마시라고 한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는다. 요리조리 빙글빙글 컵을 돌려보다, 안에 깊게 파인 유리 티백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티백 뭐시기라고 설명해 주셨는데, 이런 유리 용기도 일종의 티백이라고 부르는 걸 처음 알았다. 건더기가 담긴 유리 티백을 나무 찻잔에 올려두었다. 적갈빛 투명한 빛을 내는 홍차 향기를 맡으며, 홀짝홀짝 입을 갔다 댄다. 삼분 기다렸다 먹으니까 정말 맛이 좋다.
유리 모래시계의 좁은 허리를 미처 통과하지 못한 가루들처럼 살았던 적이 있다. 아직 그런지도 모른다. 나는 뒤쳐진 채로 살아왔다. 초등학생 때까지는 반에서 일등을 한 적도 있을 정도로 공부에 흥미도 재미도 있었다. 물론 외국어 고등학교를 나왔고, 최종적으로 졸업한 대학이 남들이 보기엔 명문대기 때문에 공부에 흥미를 붙이고 산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전교 등수가 낮으면 회초리를 맞았던 중학교 시절이 시작되자마자, 번뜩이는 각성으로 몇 주 몰입했던 기억 말고는 학창 시절에 공부하기 좋아했던 기억은 없다. 공부를 곧 잘해야 ‘안심’하고 지낼 수 있었기 때문에 퍼즐 맞추는 기분으로 문제를 풀었다. 나는 공부를 아예 손 놓은 학생들보다, 벌써 전문 직장인이 된 것처럼 대단한 목표의식을 갖고 책상에 앉아있는 녀석들이 훨씬 더 신기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딴생각을 하고 살았다. 활자보다는 시에, 음악 이론보다는 음표에 관심을 두었다. 운 좋게도 어머니가 초등학교 선생님이라 초등학교 일 학년 때는 칠판에 길쭉하고 큰 거북이를 그려낸 적도 있다. 수학 익힘책을 다 풀고 나면 애들을 도와주겠다고 교실을 돌아다녔던 나를 사랑으로 감싸주었던 담임 선생님과 우리 엄마는 칠판에 그려낸 거북이를 보고선, 창의성이 대단한 아이라며 턱을 괴고 칠판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받은 칭찬이 기억나는 거 중 제일 기분 좋았던 칭찬이다. 그 후에 받았던 칭찬은 미션 성공에 따른 인정에 가까웠기 때문에, 받아쓰기 만점을 받아서 쓰다듬어진 정수리에 스쳐 지나가는 게 온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 인정받기 레이스가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따분해졌고 달리 살아갈 방법을 몰랐던 나는 게임에 몰입했다. 그래도 반에서 오등 안 성적은 꾸준히 유지했다. 교육열이 대단한 신도시에서 자랐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보면 난 공부 잘하는 아이가 분명했다. 그러나 대체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이유를 찾지 못했던 나는, 아무리 스스로 다짐하고 정신 차리려 해도 번번이 낙마했다. 다들 신나게 한 마리 말을 키워 죽죽 치고 나가거나, 엉뚱한 길에 들어 부모에게 혼나기라도 했지만, 난 달리고 넘어지기를 반복하며 몸에 멍이 들었다. 형편없는 성적표를 친구 집에 숨겼다는 사실에 들통나 감당하기 힘든 질책과 매질을 당한 적이 있다. 난 그렇게 굳어져갔고 고등학교를 거쳐, 게으름을 부리다 마지막 기회로 재수를 해서 명문대 입성에 성공한다.
아홉 살 때였던가, 노자의 사상에 감명받아 차 안에서 엄마한테 말했다. “무위자연이라는 게 있대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연과 어울려 욕심 없이 사는 거래. 멋있는 거 같아” 내가 무위자연을 대화 주제로 던진 이유는, 어려운 사자성어같이 보이는 그 사상과 고전의 개념을 이해한 시기에 노자를 언급하는 것이 어른스러운 짓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어른스럽다, ‘벌써 대단한 걸 깨우쳤다’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엄마는 그 말을 듣자마자 “쓸데없는 소리! 어디서 이상한 거 듣고 와서는. 아무것도 안 하고 사는 게 뭐가 멋있어.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서 살아야지. 시끄러워!”라고 꾸중하며 성난 미간을 찌푸렸다. 대화는 시작하자마자 단절됐고, 나는 말 잘 듣는 아이를 연기해야 했기 때문에 실로 난감하고 황당했지만 ‘네, 엄마’ 쯤 대답하고 급하게 화두를 거두었다. 이후에, (그 전이였나 후였나 무튼 비슷한 시기에) 시인이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문장이 울림을 주는 걸 느끼기 시작한 나이였고, 연필로라면 ‘받아’ 쓰기가 아니라, ‘쓰고 보여주기’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를 써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 고작 초등학교 저학년이. 그런데 부모는 내가 ‘무위자연’을 꺼냈을 때랑 같은 반응이었다. 시인같이 돈 벌어먹기 힘든 꿈을 꾸어서는 안 되며, 판검사 장관이 될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 나는 그 후로 솔직하게 사는 법을 까먹었다.
그렇다고 부모를 미워하지는 않는다. 엄마 아빠는 소키우고 밭매던 시골에서, 예상되는 난감한 미래를 일찍이 발견하곤 공부해서 도시에 자리 잡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통제한 말들에 배려가 부족했을지언정 악의는 없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실제로 공부에 관련된 것 빼고는, 나는 자유롭게 자란 편이다. 취업 준비를 시작해야 할 시기에, 십여 년을 고민한 얘기를 털어놓고 배우를 준비해보고 싶다고 했을 때 비싼 학원비를 지원해 줬던 부모님이다. 지금도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넋두리로 상담을 요청하면 ‘그런 생각 마라!’고 놀람 섞인 귀여운 쓴소리를 들려주는 게 내 사랑스러운 부모님이다.
이러한 연유로 의대, 과학고, 외교관 등등 공부를 잘해서 무언가 ‘되고’ 싶다고 한 애들의 말을 마음 깊숙한 곳에선 믿지 못했다. 초중학생들이 세상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미래를 결정지어 대답하는가? 세상이 정해놓은 명예를 향해, 빛 따라 달려드는 개울가 벌레들처럼 사는 게 진정 우리 속의 목소리인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의심하면서 살았다. 변명일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포르노와 게임에 중독됐던 걸지도 모른다. 나는 무엇에 나를 내맡기고 살아가야 할지 알지 못했다. 11시까지 자습실에 있어야 했던 고등학교 시절에도, 학점을 관리한다며 열심히 PPT를 외웠던 동기들을 관찰했던 대학교 때에도 나는 내가 정답에 적응하지 못하는 패배자인 건지, 사실은 세상이 넓다는 진리를 불행히도 일찍 깨달은 어린 늑대인지 모르고 살았다.
대기업 금융사에서 기획직을 하고 있다. 요란한 코딩으로 데이터 분석하는 일을 배우는 중이다. 결국 똑같아졌으면서 너만 다른 척, 그사이에 있었던 궁금하지 않은 과정을 늘어놓는 것이라 느낄까 봐 사실 말하기가 두렵다. 나는 현실감각도 있는 인간이다. 일단 터전은 마련해 두고 내 자유를 찾고자 하는 중이다. 책을 쓰는 농부가 있다면, 내게 회사는 논이고 책 읽고 쓰는 시간은 오후 아홉 시 농부가 바라는 진짜 직업을 영위하는 시간이다.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을 사고자 회사를 다닌다.(원래는 음악을 할까, 연기를 배우를 할까 여러 고민을 했다. 그 고민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우선 손에 잡히는 글부터 쓰게 됐다.)
내가 칠판에 큰 거북이를 그려 성취감을 느꼈던 것과 같은 경험을 했던 게 이십 대 중반의 일이다. 나는 소극장 뮤지컬의 무대감독을 한 적이 있다. 나이 지긋한 감독님들 틈에서 처음엔 핫바지 취급을 당하며 여기저기 귀동냥으로 일을 배우느라 고생이었다. 그러나 차츰 적응해서 무대 준비도 잘 마치고, 마지막 공연 땐 노래에 감동해 엉엉 울면서 큐를 기다렸다. 나름 스케줄도 잘 짜고 대관해 준 극장과 우리 팀 사이의 중간자 역할도 잘 해내서, 뭘 해도 잘할 거 같다는 고마운 칭찬도 받았다.
무대감독을 하게 된 계기는 듣던 수업의 교수님의 권유로부터다. 그전에는 부모님께 양해를 구하고 학업과 병행하며 연기 학원도 다니고(두 달 다니다 지루해서 그만뒀지만) 영화도 찍었다. 박찬욱 감독이 속했다는 정통한 영화 동아리에 들어가, 처음으로 교내에서 예술인의 길을 희망하는 친구들 틈에서 상식을 벗어난다는 일이 무엇인지 배웠다. 이미 서로 많이 친해진 친구들 틈에서, 정말로 영화를 하고 싶은 지 확신하지 못하는 태도로 겉돌았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그리고자 했던 울타리 안에서 중심을 두고 빙빙 돌았던 것이기 때문에, 울타리 밖에서 부러운 듯 구경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 영화 동아리를 시작하기 전에는, 학교에 연극영화과라든지 예술 관련 과가 없어 신문방송학과 복수전공을 시작했다. 지루한 이론 수업 몇 개를 듣고선 창작 관련 수업을 연달아 들었는데, 바로 그 창작 수업에서 멋지게 차려입고 강의를 하셨던 분이 날 거두어준 그 교수님이다.
교수님은 항상 헐렁한 반팔에 바지 끝단이 해진 청바지를 입고 나타나셨다. 2교시가 있는 날에 간단히 아침을 포장해 가려고 밥버거 집에 들른 일이 있는데, 거기서 밥버거를 봉지에 담아 터벅터벅 학교로 가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교수님이 버젓한 개인 연구실이 있고, 학교가 채용한 정식 교수라는 점에서 느끼는 바가 많았다. 교수님은 ‘정형화’가 남기고 사회가 정해준 습관들에 끌려 다니지 않으셨다. 커리어우먼 룩, 하이힐에 천이 좋아 보이는 검은 정장치마에는 관심 없으셨다. 부려도 좋을 지적 허영을 멀리하고 신분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으시지 않으셨다. 다만, 극작을 한다면서 영화 대부를 보지 않은 학생이 반에 7할이 된다는 사실에 통탄하시면서 당장 대부 1, 2, 3 보기를 과제로 내주셨던 분이다.(후에 실제로 점검하지는 않았다.) 본인이 편한 화장기 없는 얼굴에 쿨한 단발로 학교를 오가신 교수님. 내가 본 최고의 커리어우먼이다.
어쩌다 교수님께서 수업이 끝나고 나를 부르시더니, 망설이시는 투로 나한테 ‘무대감독’을 해볼 생각이 없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단어를 듣자마자 심장이 쿵쾅거렸다. 동아리 친구들이 멋지게 찍어내고 있는 영화의 크랭크인에 어물쩡거리다 끼어들 틈을 놓친 나에게 기회를 내밀어 주셨다. 그 수업에 있는 학생 중 가장 인정받은 기분도 들어 똑 부러지게 생활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교수님이 A4용지에 적어주신 핸드폰 번호를 적어둔 후, 혜화역보다 한 정거장 더 간 한성대입구 스타벅스에서 어떤 아저씨와 면접을 봤다. 교수님과 굉장히 닮은 아저씨였다. 말투도 특이하고 어디 딴 나라에서 온 거 같이 대충 툭툭 말을 내뱉는,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중성적인 느낌을 주는 아저씨였다. 두 분은 부부였으며, 연출 선생님, 곧 나와 면접을 본 아저씨의 후일 말에 따르면 아파트 한채 값을 부어가며 창작 뮤지컬을 제작하는 콤비였다. 교수님은 작가였고, 연출 선생님은 그의 남편이었다.
나는 예술을 이행한다는 일이 얼마나 고된 지 처음 알았다. 쉴 시간도 없었다. 일주일에 육일을 열 시간 이상 노동하는 늪이었다. 중간에 남은 공연 일정이 막막해서 선택을 후회해야 하나 고민한 적도 있었지만, 무슨 일이든 마치고 나야 돌아오는 게 있다는 배우님의 조언을 붙잡고 마지막 공연까지 함께했다. 난 팬들이 보내준 도시락을 배우 대기실로 배달하기도 하고, 관계가 나빴던 극장 측과 연출 선생님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윤활유 역할을 하기도 했다. 눈이 많이 오던 날, 세탁물이 늦게 도착해 배우가 엉뚱한 바지를 입고 무대에 올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유발하기도 했다. 반복되는 음향 사고를 매듭짓고자 문제의 원인을 집요하게 파고들다 조연출과 의견이 충돌한 적도 있었고, 깐깐한 조명감독님의 인정을 받고자 조명이 틀어져도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바닥에 마스킹을 꼼꼼히 했던 기억도 있다. 예술에 참여한다는 건, 감상이 아니라 노동이었다. 자취방에서 썩은 주스를 들이켜 식중독이 걸린 채라도, 체내를 전부 비워내고 무대로 출근했다. 나는 체액도 영혼도 전부 빠져나가는 것처럼 힘들었지만, 그 육 개월이 대학 생활 중 가장 행복했다.
2018년 2월 26일, 모든 공연 일정이 끝나고 연출 선생님과 차를 한잔하고 나서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해보고 나니 중노동을 이겨내며 오지 않을 수 있는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고 살기엔 내가 가진 열정은 현장의 사람들에 비해 초라했다. 대신 보통 잘하지 않는 경험을 해냈다는 성취감을 뒤로하고, 전과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친구들이 있는 레이스로 다시 끼어들었다. 예전엔 달리는 것 자체를 시작하지 못했다면, 이제는 속도에 맞춰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머릿속으로 나만의 상상을 하면서, 다른 시간과 공간의 의미 속에서 마라톤을 이어가게 되었다. 길었던 취업준비를 마치고 회사에 입성한 나는, 사실 속으로는 날 ‘무직’으로 소개하며 열심히 두 개의 직장으로 출퇴근하고 있다. 하나는 여의도에 있는 한 건물이고, 하나는 어느 곳에나 있는 테이블이다. 공책 앞이라고 말해도 좋다.
나는 털어내면 그제서야 아래로 떨어지는 모래시계의 잔가루처럼 청소년기를 보냈다. 대학생활 전반기도 다르지 않았다. 속한 무리에서는 꼴찌를 전전하면서, 승자 패자를 가르기 위한 거대한 시각에 전염되어 그래도 내 무리보다 아래에 있는 집단에 속한 자들을 바라보며 겨우 안도하며 지냈다. 걸어가기보다 따라가며 살았다. 그러나 내가 벌어들인 시간 속에서, 지금은 내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 얼추 깨닫고 산다고 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중이다. 나는 내가 그린 거북이 그림 위에서 이제야 춤을 추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