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적 영향력 있는 초등학생이 아니었다. 중학생도 아니었다. 고등학교에 가서는 그 설움이 폭발해 기행을 벌였다. 그래서 영향력 있다는 표현이 주는 은근한 긍정적 의미를 배제하여야 백윤은 고등학교 때 영향력 있었다고 말해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사실 고등학교 때는 엽기적인 행동을 일삼은 문제아, 외톨이였다. 전교생 앞에서 소방 훈련 시간에 하늘에 소화기를 뿌린 적이 있다. 입학 초기에는 남성 호르몬이 분비되어 남들보다 일찍 험상궂게 변한 얼굴을 무기로, 겁 좀 낼 만한 생활을 한 척 연기하고 다녔다. 금방 연기는 들통나 우스꽝스러운 외톨이로 웃음을 샀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친구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는데, 천둥벌거숭이였던 날 받아주고 지금까지 한켠의 친구가 되어준 사람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내가 설움이 쌓였던 이유는 남자들 사이의 서열정리에 한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릴 적 기억으로 남자아이가 인기를 끄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운동을 잘하거나 남들이 못하는 행동을 하거나. 그런데 나는 타고나기를 운동 신경이 좋지 않다. 두 번째, 옳고 그름에 생각이 많아서 선생님이 하지 말라는 행동은 잘하지 않는 아이였다. 그래서 인기를 끌고는 싶지만 조건에 맞지 않아서 끙끙 앓았다. 생일파티에 십여 명의 친구가 나를 위해 깜짝 파티를 해주는 상상을 했지만, 현실은 내가 생일인지 주변 아이들이 그다지 관심도 갖지 않고 가족끼리만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남자아이가 인기를 끈다는 말은 유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사실 아이들의 세계는 잔인한 구석이 있다. 당시에는 따돌림에 대해 2020년대보다 덜 민감한 때였다. 그래서 괴롭히기 좋은 아이의 괴소문을 퍼트리고 주도하면 대담하고 용기 있는 아이로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시기다. 중학생으로 머리가 자라서는 일진 무리를 형성해 서로를 위로하고, 위협적인 행동을 하는 게 멋지고 폼 나는 일이었다. 뒤에서 선생님을 씹어 대는 아이들은 외화 하이틴 영화의 주인공처럼 반항적인 세련미가 있다고 여겨졌다. 그런 아이들은 아직 아이였기 때문에, 편리하게 얻은 유명을 권위로 변형해 잘 나가는 놈, 평범한 놈, 못난 놈으로 서열 짓기를 시작했다.
나는 그중에서 평범한 놈과 못난 놈 사이에 있었다. 운동장에서 누가 날 불러 세우고 이유도 없이 팔뚝을 꼬집어도 크게 저항하지 못하는 아이였다. 분란을 일으켜 부모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쓸데없이 조숙해서 이 아이들도 나중에 정신을 차리면 남을 필요 없이 괴롭히는 일은 그만둘 것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웅덩이 위의 소금쟁이들끼리, 왜 그렇게 부딪히고 위아래를 나누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소금쟁이는 웅덩이가 뒤틀리지 않는 한 어차피 같은 높이에 떠있을 뿐인데.
그러나 공부는 잘했기 때문에, 시험기간이 되면 내가 실력 발휘를 할 기회는 있었다. 선생님들이 그나마 감수성이 있어서 아이들을 성적순으로 편애하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성적이 곧 멋이 되는 시험기간이 되면 경외의 눈으로 막 나갔던 친구들이 날 바라봐 주었다. 그래 봤자 초중학생이 공부를 잘해서 차를 몰거나, 비싼 신발을 신거나, 고급 음식을 먹어 SNS에 올리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 시기만 잘 버티면 다시 축구로, 위세로 권력을 차지할 아이들은 숨 죽여 기회를 노렸다. 마치 겨울잠을 자듯이, 교실 맨 뒤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겁이 나서 굳이 SNS를 추적해서 그때 그랬던 아이들의 근황을 쫓지는 않는다. 무기력했던 과거의 나로 몸이 작아지는 듯, 스산한 기분이 들어서 그렇다. 그리고 그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 같은 이들의 모습이 몇몇 연상되기 때문이다. 여전히 무리 지어 다니며 거리에서 골목대장 놀이는 하지 않을지, 확인되지 않은 사실로 관심을 꺼둔 채 내 인생에 집중하는 중이다.(상상하면서 관심을 껐다니 모순이다)
그러나 초중학생의 시행착오로 평생의 꼬리표를 달아 놓는 게 썩 현명한 태도는 아닌 것 같다. 심하게 괴롭혔다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순결한 결백을 표준으로 정의하면 그 거름망을 통과할 인간은 몇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심한 일을 당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서 내 경우는 그들을 용서했다. 그런데 서열 짓기, 넓게는 구분 짓기는 여전히 이어지는 듯하다. 그 아이들을 만든 부모들의 모습이, 그리고 그 부모를 따라 했던 우리의 모습이 새로운 아이에게 전가되어 그렇다. 학교로, 벌이로, 출신으로, 머리크기와 키로 누가 예쁘고 잘났는지 권력 다툼을 하는 소금쟁이들이다. 나도 그렇다. 떨쳐내고 싶어도 노력의 대가로 구분을 활용하고 싶어, 결과에 따른 구분이 가끔은 필요하지 않냐며 구역을 나누는 짓을 한다.
모든 구분이 나쁘지는 않다. 노력에 대한 인정은 필요하다. 그래서 올림픽 메달이 있고, 리그에는 우승 팀이 있다. 자격증도 그렇다. 운전 좀 못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모두 차를 몰게 했다가는, 차가 다닐 수 없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런데 영향력은 다르다. 영향력이 있어도 좋을 사람과 아닐 사람을, 무리가 멋대로 구분 짓는 세상은 아직도 낯설다. 소외되어도 좋은 사람은 없다. 저항정신을 멋으로 해석하고 싶다면 록 음악과 랩이 있다. 다른 예술도 많다. 혹은 시민단체 활동도 있다. 남을 위협하는 행동은 멋이 아닌데, 어린 소금쟁이가 다른 소금쟁이와 위아래를 두려는 것처럼 사람들은 더 거칠고 큰 목소리로 권력을 취하려 한다. 거칠게 차를 모는 사람들, 잔소리를 하면 한 대 칠 기세로 거리 흡연을 하는 사람들, 멋지게 꾸미고선 패션에 관심 없는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들, 여러 사람들이 있다. 어차피 발아래에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는 우리는 모두 소금쟁이다. 물 위에 떠있는 것도 각자 서로 다른 다리 굵기로, 태생이 다른 체력으로 힘들기도 수월하기도 하다. 나는 더 이상 인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살아가는 사람들과 서로 보듬어 주면서 관심은 나누고 싶다. 나는 관심받고 싶은 소금쟁이다. 소금쟁이는 원래 다 같이 위태롭게 떠있는 동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