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는 1관과 2관으로 분리되어 있는데(동 떨어진 3관이 있긴 하지만), 나는 2관 사람이므로 진짜 휴식을 취하기 위해 1관에 있는 커피숍에 가서 점심시간을 때우는 게 나의 식사시간 루틴이다. 이따금씩 책을 들고 가서 읽는다. 한가운데에 자갈돌로 꾸며진 간이 화로가 있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면 넉넉한 네모반듯 대리석으로 주변이 마감되어 있고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높은 의자가 일정한 간격으로 네모의 변마다 두 개씩 놓여있다. 그래서 책을 읽기 안성맞춤이다, 팔꿈치를 닿으면 책 높이가 알맞다.
어느 날 화로에서 희한한 소리가 들렸다. ‘까득까득’ 숨구멍이 좁은지 자갈들이 서로 부딪히고 팽창하며 살아있는 소리를 내었다. 커피숍 직원에게 화로가 조금 위험해 보인다고 말해야 할지 2할 정도로 내가 그럴지도 모른다고 잠시 생각했으나,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거라 외면하면서 다시 책에 집중했다. 그런데 그 소리는 점점 사람이 호두를 쥐고 부비적거리는 소리로 변해갔다. 조금은 신경을 긁는 소리로 들리기 시작했다. 정말 자갈 소리가 맞는지 의심이 들어 주변을 둘러봤지만, 도무지 회사에 입점한 커피숍에서 어떤 회사 직원이 올드스쿨한 호두를 두어 개 들고 와서 비비고 있겠냐는 합리적 추론이었다.(거기다 우리 회사 인테리어는 꽤나 모던해서 직원들이 깔끔한 캐주얼 혹은 비즈니스 캐주얼을 두르고 다니는 곳이다.) 소리는 계속 났다. 그런데 유심히 보니 자갈은 움직이고 있지 않았다. 기이한 현상이다 해서 더 자세히 보아도 자갈은 미동도 없었다. 혹시 스피커로 인위적인 포근함을 유도하는 건 아닌가 해서 작은 스피커를 찾아보았으나 이건 현장의 소리가 분명했다. 도대체 어느 쪽인지 확인하려고 전보다는 각도를 넓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게 웬걸. 앞쪽 소파 테이블에 앉아있는 직원 셋 중 한 분이 호두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리고 ‘까득까득’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정말로 호두가 있었다.
그런데 그곳엔 하나의 소리가 더 있었다. 알람 소리다. 아침 알람으로 흔히 쓰는 노래가 주기적으로 흘러나왔는데, 커피 완성이 끝났다는 신호로 커피숍에서 사용하는 수신호 같았다. (처음엔 소파에 드러누워 자는 사람이라도 있어 알람 설정을 해놨나 싶었다.) 책을 읽는 데에 도움이 되진 않았지만, 커피와 대화가 주목적인 공간에 책을 들고 온 내가 나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독서에 방해가 된다고 쳐도 저 알람음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듣기 싫어할 것 같았다. 달콤한 아침잠을 깨우기 때문이다. 누구는 노래를 듣고 10분 뒤 다시 일어나기로 재설정할 것이고, 누구는 5분 간격으로 무지기수로 알람을 맞춰두고 겨우 일어날 것이다. 그렇게 저 아름다운 소리는 미움을 사게 됐다.
소리가 안쓰러웠다. 인간이 낳은 소리는 죄가 없다. 낡은 티브이로 새벽에 티브이를 틀면, 노이즈가 발생하며 치지직 하는 소리가 연신 반복된다. 그 소리도 죄가 없다. 오랫동안 틀어놓으면 정신이 나갈지도 모르는 괴상한 소리지만, 그 소리도 우연히 태어난 소리 중 하나이며 잘 만들어진 노래나 새벽의 노이즈나 소리라는 면에서 같은 신분을 갖는다. 인간의 인지 체계 하에서 누구는 좋은 소리, 누구는 나쁜 소리 억울한 신분이 생긴다. 심지어 아름답다고 여겨지던 노래도 아침을 여러 번 깨우면 짜증 나는 소리로 강등된다. 인간은 잔인하다. 아무도 티브이의 노이즈를 연주하지는 않는다. 마음대로 만들어놓고 방치하고, 차별하고, 소외된 자들의 음역대는 살피지 않는다.
나도 짧은 순간에 호두소리를 미워했다. 알람음은 더했다. 추한 미인이라도 되는 듯이, 아름답지만 거슬리는 소리정도로 순간 여겼다. 그러나 문득 소외된 소리들이 마치 나를 보는 듯하였고 나는 호두소리든 알람소리든 그리고 이제는 외롭게 혼자 남겨진 티브이 노이즈도 사랑하기로 하였다. 세상에 태어나 내던져졌을 뿐인데 가격이 매겨지는 사람들. 그리고 소리들. 소리도 사람들도 아무 죄가 없는 것들로 품어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