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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속 음식이 ‘감정의 온도계’인 이유

한국 드라마 심층 분석

by 애들 빙자 여행러
왜 우리는 드라마를 보며 배고파질까?


드라마를 보다가 갑자기 치킨과 맥주가 사무치게 그리웠던 경험, 다들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주인공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 마법 같은 음식 조합들은 단순한 PPL이나 먹방을 넘어선다. 사실 그 안에는 등장인물의 감정은 물론, 한국인의 희로애락을 전달하는 중요한 장치가 숨어있다.


기쁨과 위로의 국민 조합: 치맥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 천송이가 외친 한마디는 전 세계를 흔들었다. 이 장면 하나로 중국에서는 무려 4만 건의 치킨 주문이 동시에 터져 나오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치킨의 바삭함이 주는 청각적 쾌감과 맥주의 시원한 청량감은 지친 하루에 대한 완벽한 ‘즉흥적 보상’으로 작용한다.


사실 치맥 문화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기점으로 한국인의 ‘국민 조합’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월드컵 이전만 해도 ‘통닭집’은 시골 장터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었지만, 거리 응원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치맥은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그 인기를 증명하듯 ‘chimaek’이라는 단어는 2012년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도 등재되었다. K-드라마는 바로 이 국민적 정서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치맥을 찾는 이유는, 이 음식이 이미 우리 삶의 일부이자 감정 그 자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삶의 무게를 나누는 의식: 삼겹살과 소주


삼겹살과 소주, 일명 ‘삼쏘’는 단순한 음식 조합을 넘어 ‘관계의 문’을 여는 열쇠 역할을 한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두 주인공은 말없이 삼겹살을 굽는다. 대사 한 마디 없지만, 지글거리는 고기 소리와 ‘딱’ 하고 열리는 소주병 소리가 그들의 복잡한 감정과 깊은 유대를 대신 전달한다.


이 조합은 "고기는 먹고 싶고, 값은 싸야 하고"를 외치던 80년대 노동 계층의 ‘소박하지만 확실한 보상’에서 시작되었다. 서민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긴 삼겹살에 씁쓸한 소주 한 잔이 더해지면서, 고단한 하루의 시름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위로의 음식이 된 것이다. ‘김비서가 왜 그럴까’의 회식 장면처럼, 드라마 속 삼쏘는 사람들 사이의 벽을 허물고 끈끈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하나의 ‘의식’으로 기능한다. 고기를 굽고 잔을 부딪치는 행위 속에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솔직해질 수 있는 ‘인간적인 라이선스’를 부여하는 셈이다.


시간을 멈추는 미학: 파전과 막걸리


"비가 오니까 파전에 막걸리나 한 잔 할까?"


K-드라마 최고의 클리셰이지만, 우리는 이 대사에 매번 마음을 빼앗긴다. 빗소리가 프라이팬에 부침개 부치는 소리와 비슷하다는 한 연구 결과처럼, 이 조합은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며 특별한 분위기를 만든다. 노릇하게 익어가는 소리는 그 자체로 ‘뚝딱거리는 힐링’이 된다.


과거 농경 시대의 ‘축제 음식’이었던 전(煎)은 보름달을 보며 먹던 음식이었다. 여기에 비 오는 날의 감성이 더해지니, 파전 한 조각에는 ‘달’과 ‘비’가 함께 담긴 셈이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주인공이 막걸리를 한 모금 마시며 "어떻게 이렇게 달아?"라고 묻는 장면처럼, 발효 과정의 ‘시간의 온도’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막걸리는 ‘지금 여기’에 집중하게 만든다. 결국 이 페어링은 드라마 속에서 ‘시간 정지’ 버튼처럼 작동하며, 인물과 시청자 모두에게 잠시 숨 돌릴 여유를 선물한다.


청춘의 생존과 계급의 상징: 짜파구리


영화 '기생충'으로 전 세계에 알려진 짜파구리는 사실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 음식이다. 이 조합은 1990년대 PC통신 라면 레시피 게시판에 등장했을 정도로 역사가 깊으며, 군인들 사이에서도 흔한 레시피였다. 대학생, 자취생들이 즐겨 먹던 짜파구리는 ‘가성비’와 ‘간편함’을 상징하는 청춘의 음식이었다. K-드라마 속 청춘물에서 이 음식이 가난하지만 풍요로운 하루를 만들어내는 현실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에서 채끝살을 더한 짜파구리를 통해 이 음식을 전혀 다른 맥락으로 확장시켰다. 값싼 라면에 값비싼 소고기가 더해진 이 기묘한 조합은, 결코 섞일 수 없는 두 계층 간의 간극과 불편한 공존을 보여주는 날카로운 상징이 되었다. 이처럼 짜파구리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청춘의 생존과 계급의 모순을 동시에 담아내는 강력한 메타포로 작동한다.


일상이 담긴 소울푸드: 라면, 떡볶이, 그리고 도시락


가장 평범한 음식들이 때로는 가장 강력한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우리의 일상에 깊숙이 스며든 소울푸드 조합들은 드라마 속에서 현실적인 공감대를 극대화한다.


라면+김치: 드라마 '미생'에서 오 과장이 야근 후 라면을 먹으며 읊조리는 "살아 있네" 한마디는 대한민국 직장인에게 보내는 진한 '위로'이다. 따뜻한 국물과 아삭한 김치는 내일을 살아갈 최소한의 힘을 상징하며, 거창한 말보다 더 큰 공감을 이끌어낸다.
떡볶이+순대: '응답하라 1988' 속 이 조합은 30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 학창 시절의 '추억'을 소환하는 타임머신이다. 놀랍게도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가격 차이가 거의 없는 이 조합은, 매콤 달콤한 맛으로 우리 모두의 풋풋했던 그 시절로 순간 이동시키는 마법 같은 힘을 가졌다.
도시락+김치: '오징어 게임'의 알루미늄 도시락과 김치 한 조각은 단 몇 초 만에 인물의 가난한 '현실'과 서민의 애환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대사 한마디 없이도, 이 소박한 조합은 한국인의 고단한 삶을 상징하며 깊은 인상을 남긴다.


K-푸드의 글로벌화와 새로운 지평


드라마 속 음식 페어링은 이제 한국을 넘어 전 세계인의 식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김밥, BTS 정국이 공개한 막국수 레시피, '오징어 게임'의 달고나처럼 K-푸드는 K-콘텐츠의 인기에 힘입어 한국 문화 홍보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드라마 속 음식을 맛보기 위해 한국을 찾는 관광객이 늘어나는가 하면, 컵라면이나 간편식 도시락은 바쁜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하며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한국인의 일상이 외국인에게는 새로운 경험으로, 그 경험이 다시 한국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선순환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음식, 한국인의 삶을 이야기하다


드라마 속 음식 페어링은 단순한 조합을 넘어 한국인의 ‘정’, ‘시간’, ‘관계’를 담아낸 문화 전파자다. 치맥은 축하와 위로를, 삼겹살과 소주는 관계의 깊이를, 파전과 막걸리는 순간의 여유를, 그리고 짜파구리와 라면은 우리의 현실과 추억을 이야기이다.


다음에 드라마를 보다가 음식이 등장하면, 그저 ‘먹방’으로 넘기기보다 주인공이 처한 상황과 감정을 함께 맛보는 것은 어떨까? 그때 비로소 음식은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인생이 담긴 한 장면으로 다가올 것이다.


오늘 무엇을 먹을지 고민된다면, 드라마 속 주인공을 따라 해 보는 것도 실패 확률 0%, 공감 지수 200%를 보장하는 선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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