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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쏨바디 Jul 14. 2020

그때 말려줘서 고마워,
나의 알싸 랜선 친구야

때로는 낯선 이에게 서 예상치 못한 도움과 위로를 받을 때

잘 지내니, 나의 알싸 랜선 친구야?


알싸는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 카페인 '아이 러브사커'의 줄임말이다.

지금은 거의 유령카페가 되다시피 했지만 한때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커뮤니티였던 곳.


2015년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래 연애한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이별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때. 그동안 주변의 남자들에게 여러 번 "언젠가 연애하다가 남자가 헤어지자고 할 때는 뒤도 돌아보지도 말고 헤어져. 매달릴수록 너만 더 힘들고 비참해진다. 헤어지자고 말한 건 이미 마음을 단단히 먹은 거야 "라고 들었지만 막상 헤어짐을 겪어보니 그게 마음처럼 쉽게 되는 일이 아니었다.


"우리 헤어지자" 

"오키"

이런 식으로 어떻게 사람 마음이 한 번에 정리되는가. 그래서 나의 헤어짐은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힘든 상황에서 딱히 해결책이 생각나지 않을 때, 나는 주변의 조언을 구한다. 물론 모든 조언을 귀담아듣고 들을 때는 최선을 다하지만, 정작 내가 받아들이는 건 나의 현재 생각과 비슷한 맥락을 가지는 조언들이다. 자기 합리화이지 뭐. 주변의 조언들이 내가 내리고 싶은 선택을 하는데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도록 이용되는 것이다. 그때 내가 가입했었던 다음 카페 '알싸'가 갑자기 기억났다.


그래! 여기다. 축구 커뮤니티로 비교적 남자 회원들이 많은 곳이니깐 내가 조언을 구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고민 끝에 어느 날 밤 엄청난 장문의 글을 주절주절 올렸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었는지도 아주 길게도 썼었었다. 우리의 연애가 가볍게 만나고 헤어지는 그런 연애들이 아님을 확실하게 하고 우리 관계에 특별함을 부여하고 싶었었나 보다. ( 지금 생각해보면 도라이였다 내가) 


그때 한 회원이 내 글에 댓글을 남겼다. 

"미련 가지지 마세요 , 끝난 인연입니다. 마음 독하게 먹으시고 힘드시면 쪽지 주세요 "

사실 처음에 쪽지 보낼 의사는 없었다 뭐 그렇게까지야. 그리고 '아 이런 루트로 힘들고 외로운 여자들에게 집적대나?'라고 잠깐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 어떤 조언이라도 필요했기에 고민하다가 다음 쪽지를 보냈다. 


낯선 그에게 내 연애사의 A to Z까지 모든 것을 말했었고 그 친구는 마치 몇 년 동안 나를 알기라도 한 듯이 나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경험담도 말해주었다. 또한 과거의 연애에서 상처 받았던 적이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 미련을 가지고 인연을 어떻게라도 있으려고 했었던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비참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고 했다.

 그래서 우연히 어느 날 밤 내 글을 보았는데 예전의 자신이 생각나서 남일 같지 않았다고. 그냥 지나치려다가 나는 자신과 같은 실수를 안 했었으면 하는 진심 어린 마음에 댓글을 남겼다고 한다.  


다음 쪽지로 몇 번 주고받다가 불편해서 카톡 ID를 교환하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전화번호를 교환하기에는 투머치라는 것을 서로 암묵적으로 동의한 듯했다. 아주 가끔 밥 먹었냐? 이 정도 일상 안부를 묻긴 했지만 대부분은 내가 미련을 가지거나 마음이 흔들릴 때만 연락했다. 그때마다 매번 본인이 저장해둔 이미지, 글귀 혹은 그의 생각들을 나에게 공유해주며 내 마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칠 법도 했을 텐데 말이다. 


어느 날 밤, 퇴근했는데 '전'남자 친구가 미치도록 너무 보고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못 참겠어서 전'남자 친구의 회사 근처에 가서 멀리서나마 몰래 얼굴만 보고 올까 했다. 그 친구에게 말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제발 발걸음을 멈추라고, 아무 생각 말고 자기 듣고 그냥 집에 가라고 했다. 버스에 타려고 했던 그 순간 친구가 보낸 카톡을 보고는 ' 그래 , 일단 오늘은 그냥 집에 가자 '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행스럽게도 두 번다시 그런 충동은 들지 않았다.  내가 만약 그날 장장 2시간을 걸려 거기 멀리까지 얼굴을 보러 갔었다면 내 인생 엄청난 흑역사였을 것이다.


그렇게 몇 번 연락을 주고받던 우리의 카톡은, 내가 새로운 남자 친구가 생김으로써 자연스럽게 대화가 단절되었다. 그 친구도 요즘은 왜 연락이 없냐고 구태여 나에게 묻지 않았다. 몇 달이 더 흐르고 갑자기 그 친구가 문득 생각나서 카톡으로 잘 지내냐고 물었다. 공부하느라 바쁘다고 했고 나는 나의 근황을 업데이트하였다.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라고 진심 어린 축하를 받았다. 

안면도 없던 나를 도와주었던 나의 랜선 친구에게, 작지만 고마움의 표시로 커피 기프티콘을 선물하였었다. 


소녀시대 태연을 좋아했는지 닉네임이 태연**이었던 나의 랜선친구

나중에 알고 보니 동갑내기였고 임용을 준비했었던 그 친구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 보관 만료로 쪽지 보관함에서 사라져 버린 쪽지.

어떠한 사심이나 흑심 없는 그런 도움이었기에 더욱 진심이었거늘

지금 내가 잘살고 있는 만큼

그 친구도 진심으로 잘되었기를 생각하는 비 내리는 어느 날 아침이다. 


살다 보면 때로는 낯선 이에게 서 예상치 못한 도움과 위로를 받을 때가 있다.

나도 살아가면서 언젠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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