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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 by you Nov 30. 2019

비커 속의 풀

김수영 시인의 풀처럼



섬유실험때문에 섬유를  속에 일주일간 묻어놨던 비커에 이름모를 무명초가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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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의 침입을 막기 위해 팩킹필름으로 막아놓아도, 아무 소용이 없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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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모를 무명초들은 어딘가 뚫려있을 미세한 틈으로 저마다 필요한 양분을 확보하고 그들만의 세계를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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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시인의 저항시 []에서 찾아볼  있듯, 풀은 강인한 생명력  자체를 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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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김수영 시인의 풀은 드러눕고 울지만, 바람을 굳이 피하려고 어떤 행동을 한다고 분석되지 않는다. 오히려  바람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저항시의 정점으로 여겨져왔다. <김수영과 하이데거> 저자 김유중 서울대학교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바람과 풀의 관계에서 우리가  가지 반드시 주목해야  사실은, 위에서 보듯, 풀이 드러눕고 울지언정 바람에 대해 저항하거나 애써 피하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풀은 다가오는 위험에 대해 스스로의 존재를 초연히 ‘내맡김으로써,  위험을 역설적으로 초극하는 자세를 보여 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와 같은 ‘내맡김 태도로부터, 풀은 현실의 극복 가능성과 자기의 존재의 구원 가능성을 더불어 키워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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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풀은 어떤 저항도   없었다. 비커에 담기기전, 수많은 돌과  사이에 어딘가 끼어있을 씨앗이 딸려왔던 것이다. 패킹필름으로 외부를 차단하거나 햇빛을 전혀   없는 캄캄한 공간에 놓여진 외부환경조건에도 어떤 저항도   없었다. 영락없이 김수영 시인이 말한 풀과 다름없다. 그럼에도 일주일만에 싹을 피워냈다. 기어코 건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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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특이점이 있다. 우리 사회의 민족적 암흑기나 사회적 저항기에는 많은 문학가들이 풀과 같은 식물의 끈질긴 생명력을 작품의 주제로 했다.  암흑기나 저항기는 실로 어려운 시대였지만, 오히려 문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태동이 일기에 충분한 시대였다고 판단되고있다. 김수영 시인의 []처럼,  암흑기의 많은 문학가들은 식물의 끈질긴 생명력을 빌어 훌륭한 작품을 엮어내 현대에서 찬사를 받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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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암흑기는 언제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암흑기를 맞이한 대상이 개인이냐 사회이냐의 개념적 크기의 차이일 뿐이다. 지금 서로 다른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흐르고 있는  또는 당신, 혹은 누군가 또한 암흑기는 존재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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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같은 숨을 쉬는 당신 곁의 누군가 또한 암흑기에 갇혀있을  있다는 말이다. 누군가 또한 암흑기에서, 태동이 일고있을  있다. 누군가의 암흑기도  비커  풀처럼, 아니 김수영 시인의 []처럼, ‘내맡김 태도와 끈질긴 생명력처럼, 시간이 흘러 찬사를 받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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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혹은 당신 곁의 누군가는 과연 어떤 이름모를 무명초일까, 그렇다면 나는 어떤 이름모를 무명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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