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시인의 풀처럼
섬유실험때문에 섬유를 흙 속에 일주일간 묻어놨던 비커에 이름모를 무명초가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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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의 침입을 막기 위해 팩킹필름으로 막아놓아도, 아무 소용이 없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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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모를 무명초들은 어딘가 뚫려있을 미세한 틈으로 저마다 필요한 양분을 확보하고 그들만의 세계를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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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시인의 저항시 [풀]에서 찾아볼 수 있듯, 풀은 강인한 생명력 그 자체를 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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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김수영 시인의 풀은 드러눕고 울지만, 바람을 굳이 피하려고 어떤 행동을 한다고 분석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바람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저항시의 정점으로 여겨져왔다. <김수영과 하이데거>의 저자 김유중 서울대학교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바람과 풀의 관계에서 우리가 한 가지 반드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위에서 보듯, 풀이 드러눕고 울지언정 바람에 대해 저항하거나 애써 피하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풀은 다가오는 위험에 대해 스스로의 존재를 초연히 ‘내맡김’으로써, 그 위험을 역설적으로 초극하는 자세를 보여 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와 같은 ‘내맡김’의 태도로부터, 풀은 현실의 극복 가능성과 자기의 존재의 구원 가능성을 더불어 키워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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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 풀은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었다. 비커에 담기기전, 수많은 돌과 흙 사이에 어딘가 끼어있을 씨앗이 딸려왔던 것이다. 패킹필름으로 외부를 차단하거나 햇빛을 전혀 볼 수 없는 캄캄한 공간에 놓여진 외부환경조건에도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영락없이 김수영 시인이 말한 풀과 다름없다. 그럼에도 일주일만에 싹을 피워냈다. 기어코 건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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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특이점이 있다. 우리 사회의 민족적 암흑기나 사회적 저항기에는 많은 문학가들이 풀과 같은 식물의 끈질긴 생명력을 작품의 주제로 했다. 이 암흑기나 저항기는 실로 어려운 시대였지만, 오히려 문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태동이 일기에 충분한 시대였다고 판단되고있다. 김수영 시인의 [풀]처럼, 이 암흑기의 많은 문학가들은 식물의 끈질긴 생명력을 빌어 훌륭한 작품을 엮어내 현대에서 찬사를 받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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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암흑기는 언제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암흑기를 맞이한 대상이 개인이냐 사회이냐의 개념적 크기의 차이일 뿐이다. 지금 서로 다른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흐르고 있는 나 또는 당신, 혹은 누군가 또한 암흑기는 존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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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같은 숨을 쉬는 당신 곁의 누군가 또한 암흑기에 갇혀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누군가 또한 암흑기에서, 태동이 일고있을 수 있다. 누군가의 암흑기도 저 비커 속 풀처럼, 아니 김수영 시인의 [풀]처럼, ‘내맡김’의 태도와 끈질긴 생명력처럼, 시간이 흘러 찬사를 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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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혹은 당신 곁의 누군가는 과연 어떤 이름모를 무명초일까, 그렇다면 나는 어떤 이름모를 무명초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