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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공이 Apr 12. 2019

개인주의자 선언

저는 선언과 고백 그 중간쯤 어딘가로 하겠습니다.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걸 좋아했다. 

내가 잊지 않겠다며 꽁꽁 챙겨둔 어릴 적 기억인지, 아니면 부모님이 말해준 나의 어릴 적 모습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걸 좋아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는 책을 사는데 재미를 붙였고, 그게 또 10년이 넘으니 글자 쓰는 즐거움이 생겨 만년필을 사는데 재미를 붙였다. 좀 더 나이가 드니 언어에 까지 관심이 확장되고 있다.


  여행을 하거나 휴가를 떠날 때는 반드시 책을 챙긴다. 여행, 휴가 중에 읽으려고 일부러 책을 아껴두는 때도 있고 책을 다 읽어서 여행이나 휴가 때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때도 있으며, 읽지도 못한 책을 챙겨 온 나 자신을 탓하는 때도 있다. 사실 여행이나 휴가의 짐으로서 책은 퍽 적절하지 않은 물품 중 하나이지만 그래도 반드시 책 한 권은 챙긴다.


  책 읽는 걸 좋아하지만, 한참 책을 읽지 못한 시기가 있었다.

업무가 바뀌어 새로 알아야 할 정보들과 기억해야 할 사항들, 문서, 문헌을 읽어야지만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닥치는 대로 모든 것을 읽었어야만 했다. 그야말로 활자에 치였던 시기다.

  이때 SNS를 보면 '1일 활자 총량이 있고, 나는 퇴근 전 이미 총량을 전부 소모했기 때문에 더 이상 활자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스트레스 가득한 기록들이 많다.

  이제는 새로운 정보만 업데이트하면 되고, 활자의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도 적절히 맞출 수 있게 되어 편안하게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위시리스트에 담아두었던 문유석 판사님의 '개인주의자 선언'을 이제야 읽었고, "죄송한데 판사님, 이거 제 생각하고 같은데요?"라고 책에 대고 말을 걸어 버릴 뻔할 정도로 격하게 공감했다. 나는 도대체 이 책을 왜 이제 읽었을까 한탄을 금치 못하며 발간 연도를 보니 활자에 치였던 그 시기다.




판사가 스스로 개인주의자라고 뻔뻔스럽게(?) 선언하다니 말세라고 할 이들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개인주의란 유아적인 이기주의나 사회를 거부하는 고립주의가 아니다. (중략) 합리적 개인주의자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이루어 살 수밖에 없고, 그것이 개인의 행복 추구에 필수적임을 이해한다. 그렇기에 사회는 공정한 규칙이 필요하고, 자신의 자유가 일정 부분 제약될 수 있음을 수긍하고, 더 나아가 다른 입장의 사람들과 타협할 줄 알며, 개인의 힘만으로는 바꿀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인들과 연대한다. (후략)
(문유석. (2015). 개인주의자 선언. (주)문학동네, 이후 동일 출처인 경우 본문 내 출처 표기 생략함)


  '개인주의자 선언'으로 저자를 처음 접하게 되어 저자에 대해서 아는 것은 저자 소개에 적힌 내용밖에 없다. 하지만 책의 1부인 '만국의 개인주의자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에는 끊임없이 밑줄 그으며 공감을 표시했고 그의 생각이 내 생각인 것만 같았다. 손석희 앵커의 서평과 똑같이 말이다.


나는 문유석 판사 생각의 대부분과 그의 성향의 상당 부분이 나와 겹친다는 데에 경이로움까지 느끼면서 이 책을 읽었다. (후략) - 손석희, <JTBC 뉴스룸> 앵커


  가장 많이 밑줄 쳐진 곳은 '프롤로그', '마왕 혹은 개인주의자', '행복도 과학이다', '개인주의자의 소소한 행복'편인데, 사실 이 편들의 본문 전체에는 밑줄을 전부 그어도 될 정도이다. 


(전략) 합리적 개인주의는 공동체에 대한 배려, 사회적 연대와 공존한다. 자신의 자유를 존중받으려면 타인의 자유도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먼저 주체로 서야 타인과의 경계를 인식하여 이를 존중할 수 있고, 책임질 한계가 명확해지며, 집단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에게 최선인 전략을 사고할 수 있다.


  개인주의자는 이기주의자와 같다고 오해받는다. 다른 나라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개인=이기적'로 자연스럽게 치환되는 것은 유독 집단 혹은 공동체 문화를 사회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한국인의 무의식 어딘가에 대대로 전해져 온 고정관념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물론 이는 비슷한 문화권에도 해당되겠지만).

  아니면 사실 집단 논리, 집단 활동에 신물이 났지만 집단을 박차고 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 개인주의자가 부러워서 일부러 이기주의자로 치환해버리는 건가라는 영양가 없는 생각도 해본다. 어찌 됐건 한국 사회에서 '개인'이라는 단어 자체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것만큼은 확실하다. 

  

    하지만 '개인주의자 선언'의 본문 인용과 같이 개인주의는 이기주의가 아니다. 외려 개인주의에서의 개인은 자신이 존중받기 위해 타인을 존중한다. 사회는 공정한 규칙이 필요하고, 자신의 자유가 일정 부분 제약될 수 있음을 수긍한다. 

  그리고 개인주의자는 집단을 배척하는 존재가 아니다. 집단 논리에 휘둘리지 않을 뿐, 공동체에 대한 배려, 사회적 연대와 공존한다.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타인과 연대하여 해결한다.



고백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사람들을 뜨겁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혐오증이 있다고까지도 할 수 있다.


  '개인주의자 선언'에서 무엇보다도 공감하는 문장이다.

  내가 언제나 당당하게 하지 못했던 자기 고백이다. 자기 자신의 한 부분을 규정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인간 혐오증이 있다고까지도 할 수 있다'라고 프롤로그에 남기다니! 읽는 것만으로도 속이 다 시원하다.


  나도 선언보단 조금 얕고, 고백보다는 조금 공식적인 의미(두 단어가 갖는 의미의 중간 수준쯤)로 기록해보건대,


 나는 인간을 싫어하고 꺼리는 개인주의자이다.


  나는 인간이면서 인간이 싫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관계를 전부 단절하고 세상과 등지고 사는 것도 아니고, 인간과의 활동을 일체 거부하는 것도 아니며, 인간에 대해 공감 못하는 게 아니다. (대화 중 공감과 리액션으로 나를 이길 사람 몇 없다.)

  그저 인간이 싫고 가능한 최소의 접촉만 하게 되길 바랄 뿐이다.

  *사실 위 문단의 강조 부분과 아래의 주요 문단에는 '인간이 싫다' 대신 '인간 혐오증'이라고 단호하게 작성했으나, 글을 수정할 때마다 '혐오'라는 단어에서 턱턱 막혔다. 나의 상황을 표현하는데 사전적 의미로는 적확한 단어지만, 현재의 사회적 의미로는 전혀 적확하지 않다.
  결국 '혐오' 대신 '싫다'로 전부 수정했다. 나는 별다른 감정 없이 인간이 싫고 꺼려지는 의미로서 '혐오'를 사용했는데, 지금 사회에서는 차별을 위해 분노와 증오를 담아 경멸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인간을 싫어했다. 어린이 시절 부모님이 안아주는 것조차 싫어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인간人間'이라는 단어, 의미, 그리고 뜻이 상상되는 생김새가 싫어 나는 나 자신을 '사람'으로만 규정했다.

  사회생활을 하며 어릴 때보다 좀 더 넓은 의미의 인간관계를 경험해봤지만 여전히 인간이 싫다.


  인간이 싫은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의 모순성과 배타성 때문인데, 문제는 이 두 가지가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이라 나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모순되게도 나는 인간을 싫어하면서 인간이 나를 싫어하는 게 싫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관계에 시달린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싶다. 내 공간을 침해받고 싶지 않은 것이 내 본능이고 솔직한 욕망이다.


  저자와 같이 나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관계를 맺고 싶으며, 관계에 시달리고 싶지 않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있고, 친밀도에 따른 허용 범위가 존재한다. 거기에 더해 나는 가족에게도 보이지 않는 경계선과 허용 범위가 명확한 사람이다.


  인과관계라는 게 내 마음대로 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누군가가 나의 보이지 않는 선과 허용범위를 존중해주기를 바라며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타인을 존중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한국사람들은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내 경계를 침해한다. (관용구로 오지랖이라고 한다.)


  이 책이 속 시원했던 이유는 저자가 책의 가장 첫 번째 문장에서 '오히려 인간 혐오증이 있다고까지도 할 수 있다'라고 고백하며 혐오라는 단어도 서슴없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반면 나는 '인간을 싫어하고 꺼리지만, 인간(공동체)에 대한 연구를 합니다'라는 말을 했을 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며 더 이상 이야기 들을 가치도 없다고 치부하며 무시하는,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만 눈에 선해 인간을 싫어하고 꺼리는, 개인주의자로서의 나를 규정해보지 못했다.


  '혐오'라는 단어도 타인이 곡해할까 쉽게 사용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무시당하고 존중받지 못하는 게 걱정되어 나 자신을 규정해보지 못한 내가, 굳이 공개된 공간에 나 자신을 '인간을 싫어하고 꺼리는 개인주의자이다.'라고 기록을 남긴 이유는;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고 내 안의 많은 것들이 한결 정리가 되어 나 자신을 언어로 규정할 수 있는 준비를 드디어 마쳤고, 앞으로 이에 대해 글을 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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