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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재미없을 때

ep.08

by 유자씨






고등학교 시절 친구와 함께 길을 걸으며 아무 이유도 없이 깔깔거리며 웃었던 그때가 생각났다. 함께 웃음을 기 시작했다 동시에 멈췄을 때, 서로의 눈을 보며 그저 좋아 까르르 웃어대던 그때가 문득 그리웠다. 그때는 무엇이 그리도 즐거웠을까? 아니면 내가 즐거웠던 순간들만 기억하는 것일까? 그런 것 일 수도 있겠다. 학교 시험기간을 버텨내는 것, 매일 같은 시간에 학교를 등하교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찾기 위해 하기 싫은 것들을 해내는 시간이 필요하다기에 그저 매일 해야 할 일들을 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내 인생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았을까?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가슴 설레고 좋아하는 것을 찾았다는 생각도 잠시뿐, 그 일들을 성취해 내기 위해서는 또다시 재미없고 지루한 고독의 터널을 지나가야 하겠지. 아무리 긍정적 사고회로를 굴리려고 해도 요즘은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고, 재미없다고 느껴진다. 내가 아무리 아등바등 발버둥 쳐도 제자리에 있는 것 같다고 아이처럼 투정 부리고 싶다. 답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걸어가야 하는지 알고 있지만 그냥 여기 잠시 멈춰 서있고 싶은 그런 날들이 지나간다.


'어떻게 늘 좋을 수 만 있겠어. 어떻게 매일 재밌는 일만 있을 수 있겠어. 심심해봐야 재밌는 것을 찾을 수 있는 것 아니겠어?'


나도 잘 알고 있다. 한없이 가라앉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날에도 내 발은 이미 수영장 가는 길 쪽으로 향한다. 마음은 가기 싫지만 몸은 습관처럼 가야 할 곳을, 해야 할 일을 기억하고 있다. 고대 인도속담 중에서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인생의 첫 30년은 사람이 습관을 만들고, 나머지 30년은 습관이 사람을 만든다." 작 2년 매일같이 했던 수영이 어느새 몸에 배어 이제는 수영을 가야 할 아침시간에 수영을 못 가게 되면 허전한 느낌이 든다. 이틀이상 수영을 안 하면 몸이 찌뿌둥하게 느껴진다. 작년 한 해 동안 계속해서 글을 써왔다. 글을 쓰지 않는다고 아무도 나무라는 이는 없지만 글을 쓰지 않으면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 마치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사람처럼 우왕좌왕 마음이 불안했다. 이제는 처음처럼 글을 쓰는 게 부담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습관처럼 글을 쓰는 게 편안해진 느낌이 든다. 을 걸으며 떠오르는 영감을 메모하고, 딸아이의 놓치고 싶지 않은 말 한마디를 노트에 적어두었다 글을 써 내려가고는 했다. 그렇게 특별할 건 없지만 매일매일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을 채워둔 하루하루를 살아나간다. 갑작스러운 변화는 두렵지만 한 방울씩 가랑비에 옷 젖듯 변하는 것은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느껴진다.


잠시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사는 게 재미없다.'


그러다 발걸음에 밟히는 바싹 마른 나뭇잎과 흙, 나뭇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너무 추운 날씨에 몸이 웅크려지지만 나무들은 벌써 새싹을 피워낼 준비를 하는 것 같아 보였다. 나도 나무와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나뭇잎이 물들었다가 다시 떨어지는 사계절의 변화를 나도 피해 갈 수 없는 것이다. 나무들처럼 지금의 나도 겨울을 지내고 있었을까.


'그래, 재미없어봐야 또 재밌는 일이 생기겠지. 재미없다는 건 내가 지금 성실히 해야 하는 일들을 해나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지.'


내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내가 사는 이곳이 지옥이 될 수도 천국이 될 수도 있음을.


매일같이 하던 수영이 재미없어질 만도 한데 계속 이렇게 재밌다는 건 참 감사한 일이다. 그저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마음에 쓰기 시작한 글이 <좋은 생각 3월호>에 실리게 되었다. 예전에 써뒀던 글을 우연히 응모해 보았는데 채택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지난주 좋은 생각에 실린 내 글을 받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보던 <좋은 생각>이라는 잡지에 내 글이 실리다니. 잠깐이었지만 붕 떠오른 마음이 구름을 뚫고 올라갔다.


사는 게 재미없다기엔 사실 너무나 재밌는 일들이 많다. 다만 내가 발견하지 않으려고 할 뿐이었다. 아이들이 작은 것에도 즐거워하는 이유는 아이들이 사는 세상은 아직 천국에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어른들은 애써 나의 시선을 천국으로 향해 바라보려 해야 그곳에서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바탕에는 살아있다는 감사함이 깔려있다. 나의 발걸음이 땅을 힘차게 딛고 있다는 것이, 나의 들숨날숨을 세상의 모든 생명들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나의 따뜻한 온기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미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이 모든 것이 살아있기에 느낄 수 있는 것임을.


그저 잠시 겨울을 지냈던 내 마음에게 이따금 사는 게 재미없더라도 곧 따뜻한 봄이 올 거라고 위로해주고 싶다. 꽃이 피는 봄이 오면 다시 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살랑일 것이라고. 갑작스럽지 않아도 잔잔하고 은은하게 나의 인생이 꽃길을 향해 갈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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