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평생 해야 하는 말인가 보다.
유학 와서 또 시험에 치이며 학생으로 살다 보니
한국에서 입시할 때 생각이 종종 난다.
근데 나이 먹고 달라진 건, 나를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릴 때보다 강해지고, 동시에 인생에 이것만 있는 게 아닌 것도 알아서 결과에는 좀 더 관대해진다.
그래서 매번 이 두 가지 사이에서 새로운 중심 잡기가 요구된다.
뭐 이렇게 항상 새로울 일이야? 인생 가끔 야속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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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가 가시고 2월이 되자 졸업과 입학의 계절이 왔다. 연일 학교 안에는 꽃을 들고 학사모를 쓴 사람들이 가득하고 여기저기 축하 메시지가 담긴 플래카드들이 걸려 있다. 때마침 지금 다니는 대학원 졸업식의 송사를 부탁받는 바람에 나의 지난 입학식들과 졸업식들은 어땠는지 곰곰이 떠올려 봤다. 어색함에 계속 뒤에 있던 엄마를 돌아봤던 초등학교 입학식, 난생처음 교복을 입고 운동장에 줄지어 서서 남들보다 밝은 머리카락 색을 지적받았던 중학교 입학식, 또다시 머리카락 색을 지적받고 그 때문에 전교생 앞에서 불려 나갔던 고등학교 입학식과 굳이 가 보지는 않았던 대학교 입학식이 있겠다.
항상 긴장이 뒤따랐던 입학식과 달리 졸업식은 그게 언제건 항상 아쉬움과 후련함의 시간이었다. 이제 친구들과 매점에서 빵을 사 먹지는 못 하겠군 싶은 아쉬움과 아침마다 올 나간 교복 스타킹과 씨름하지 않아도 된다는 홀가분함, 읽고 있던 책을 마치고 장을 덮는 것 같은 후련함. 약간의 두려움과 또 그만큼의 설렘. 의미 없는 요식 행위는 싫어하는 성격이지만, 입학식과 졸업식을 떠올려 보면 왜 사람에게 세리머니가 필요한지 조금 알 것도 같다.
지난 십 대 시절의 일이 그렇게 많이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래도 아마 대부분의 추억은 싸이월드 사진첩에 남아 있을 테니 다행이라면 다행인 걸까. 그나마 기억나는 것은 정문을 지나면 펴 있던 벚꽃과 점심시간이면 친구들과 밖에 나가 볕을 쬐던 것, 종일 학교 안에 갇혀 모르다가 정신 차려 보니 물들어 있던 은행나무와 채 말리지 못해 매일 등굣길에 얼어 버렸던 뻣뻣한 머리카락.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웠던 교칙들과(겨울에 교내에서 코트를 입지 말라니!) 학생들에게 큰 애정을 쏟았던 선생님들이다. 이밖에 수많은 사건과 경험이 지금의 나를 구성한다는 걸 부정할 도리는 없다. 물론 그 사건과 경험이 항상 유쾌하지는 않았다. 한국 십 대의 삶이란 보통 입시 시스템과 함께 달려가고, 그것은 꽤 고생스러우니 말이다.
나는 지금도 찬 바람이 부는 계절이면 가끔 입시를 치르는 꿈을 꾼다.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사람이 '남은 인생이 달린' 시험을 본다니. 나는 지금도 나 자신을 온전히 믿기 어려운데, 고작 열몇 살의 내가 시험장에서 자신에게 홀로 의지해야 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면 조금 슬퍼진다. 안타깝게도 대학을 못 가도 인생이 망하지는 않는다고 위로해 주는 어른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미래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게 무엇인지도 모른 채, 어른들이 말하는 대학 생활의 낭만은 사실 그런 게 아니라는 것도 모른 채, 더 '쉬운' 삶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길래 그냥 그렇게 걸었다.
가끔 그때의 나에게 돌아가 무언가 알려 줄 수 있으면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해 보곤 한다. 오늘의 나라면 그때의 나에게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너 자신으로 사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성취인 것 같아. 그러니까 다른 게 아니라 그걸 위해서 계속 공부하고 배워. 그렇다고 너무 열심히 살지는 말고..." 그럼 그때의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아마 이상한 소리라고 할 것이다. 사실 돌이켜 보면 그때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었다. "틀려도 괜찮아. 실패해도 괜찮아. 떨어져도 괜찮아."
동네에서 교복 입은 학생들을 볼 때마다 그때의 나와 친구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공부란 대체로 어려웠고 시험은 싫었지만, 처음으로 단소를 불어 소리를 냈을 때, 옆으로 돌기에 성공했을 때, 도저히 풀리지 않던 수학 문제를 풀었을 때, 그를 통해 내가 뭘 잘하고 좋아하는 사람인지 알아챘을 때의 기쁨도 분명 있었다. 학교생활을 비롯한 삶 속에서 때로는 부조리를, 편견을, 평범하고도 개성 있지만 그렇다고 튀어선 안 된다는 사회의 법칙을 학습했지만 반대로는 권위에 저항하는 용기를, 주어지는 것을 넘어 원하는 것을 찾는 기쁨을, 노력한 만큼 얻는 대가가 있음을, 경쟁에서 비롯되는 우정을 배우기도 했다. 소위 '인생 공부'라고 부르는 것들 말이다.
이러한 배움과 성취, 그것이 동반하는 어려움은 오늘도 계속된다. 대학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았지만 때로는 입시 때보다 더 오랜 시간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하고, 정말로 인생을 결정할지도 모르는 선택을 해야 하며, 필요한 갈등은 견뎌야만 하고, 나를 지키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 사이에도 항상 두려움은 존재하고 나는 여전히 저 말이 듣고 싶다. "틀려도 괜찮아. 실패해도 괜찮아. 떨어져도 괜찮아."
아직은 이 말을 시원하게 내뱉기가 두렵다. 정말 실패하고 떨어졌을 때, 맨바닥에 쿵 떨어져 일어서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두려움은 나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내일의 우리가, 내일의 사회가 떨어진 이를 받쳐 주고 일으켜 주겠노라고 약속해 주어야 가실 두려움이다.
계속해서 입안에 굴려 본다. 틀려도 괜찮아. 실패해도 괜찮아. 떨어져도 괜찮아. 우리가 서로를 받쳐 주고 또 다른 기회를 줄 수 있게 될 때, 가장 먼저 나에게 그리고 너에게 이 말이 하고 싶으니 말이다.
*본 원고는 2018년 2월 22일 가톨릭뉴스 <지금 여기>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