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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슬플 예정 65

술 먹고 토하다! 그렇게 나아가다!

나의 술 인생에 대한 기억은 딱 2년이다.

대학교 1학년 & 대학교 2학년.


입시에서 벗어났다는 것도 좋았지만, 

걸어서 20분 거리의 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이제 아버지의 술 취한 모습을 더는 안 봐도 된다는, MT나 동아리, 미팅 같은 대학 3대 낭만을 마음껏 즐겨도 된다는 것들이 더없이 자유를 느끼게 했다. 그게 더 좋았다.

술을 마셔야겠다는 생각도 못한 채, 아니 어쩌면 술을 절대 마시지 말아야겠다(아버지 때문에)는 결심으로 입학을 했고, 영어 듣기 동아리에 들어갔다.

학술동아리라 해서 들어갔더니, 공부는 안 하고, 선배들이 술만 마시게 했다.

“학술은 술을 배운다는 말이야!”라며, 정말 매일매일 술을 마셨다. 38일간을 안 거르고 술을 마신 기억도 있고, ROTC 하던 동아리 회장과 장흥 MT에서 소주를 밤새 마시고, 다음 날 두리랜드에서 바이킹 타다가 토한 기억도 있고...


선배들과 술 마신 것도 좋았지만,

내 동기들.. 그중에 광주에서 올라온 경제학과 친구, 마산에서 올라온 무역학과 친구!

이 둘이랑 진짜 어찌나 죽이 잘 맞았던지, 얼굴만 봐도 낄낄대며 생의 가장 유쾌하고, 행복하고, 재미있는 시간들을 보냈다. 생각해보니, 1993년은 내게 참 감사한 시간이다. 죽음의 계곡을 벗어나는 방향을 잡게 된?


그렇게 2년을 술이 주는 몽롱한 아름다움에 취해, 보내다가, 군에 가기 직전에 술을 너무 많이 먹고, 화장실에서 토하고 있는데, 엄마가 뒤에서 

“느그 아빠도 술 때문에 나를 이렇게 고생시키더니, 너도 그러냐?”

갑자기 눈물이 났다. 나오려던 토도 다시 속으로 쏙 들어가는 것 같았다.

내뱉었던 토 위로 눈물이 흘렀다.

'아 맞다! 엄마! 나의 엄마! 자식들 대학 보내기 위해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처절하게 희생하신 우리 엄마!'

그 후로 거짓말처럼 술을 끊었다.

별로 마시고 싶지도 않고, 심지어 맛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첫 직장인 신한은행에서도 신입사원 환영회에서도 술을 거의 안 마신 것 같았다. 다행히 선배님들이 잘 이해해주셔서 무사히 넘어간 것 같기도 하고...

여하간, 가급적 웬만해서는 술을 거의 입에 안 대는 삶을 거의 25년 가까이 살아온 터다.


그러다 며칠 전에 술을 엄청 마셨다.

가볍게 한 잔, 두 잔 하다가,,, 필 받아서 엄청 마시게 됐다.

안 취하려고, 물을 같이 엄청 마신 탓인지 그 물도 뱃속에서 술로 변한 듯했다. 

결국, 집으로 오는 길에 대리기사님께 차를 멈춰달라 부탁하고, 길거리 전봇대를 붙들고 토하고, 다시 집에 와서도, 화장실 변기 붙들고 울었다. 우웩, 우웨에엑...

입에서 폭포수가 쏟아져 나왔다.

내가 이렇게 많이 마셨나?

한참을 게워내고 나니, 속이 쓰렸다.

아마 위액도 쏟아낸 탓이겠지...

새벽 2시.

식탁에 앉았다.

이 조여 오는 위장을, 찌르는 듯한 내장을, 잘리고 뚫리는 듯한 간을 달래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꿀차를 타기로 했다.

포트를 찾았고, 뚜껑을 열고, 정수기 물 500ml를 눌렀다.

전원을 켜서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머그컵에 꿀을 짜 넣었다.

부글부글 소리가 들리고, 포트를 들어 머그컵에 부었다.

스푼으로 저었고, 스푼을 내려놓고,

머그컵을 쥐고, 후후 불었다.

적절히 식었다 생각되어, 한 입 살짝(많이 들이켰다가는 바로 혀 데인다)!

뜨거움이, 건강한 달콤함이 목구멍을 타고 100m 달리기를 하는 기분?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며 타고 내려가는....

 그러다, 레몬 생각이 났다.

'여기에 레몬 하나 넣으면?'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다.

레몬이라니..

입에서 상큼한 자극이 침을 노래한다. 

레몬 꿀차!

 꿀 차 만으로 충분했는데, 레몬이 들어가니 더 충분해졌다.

마치 스티브 잡스 같았다.

“고객들은 자기들이 뭘 원하는지 몰라! 우리가 내놓으면 '와 이거 우리가 원하는 거야!'라고 얘기하지”

꿀 차 만으로 충분히 맛있었는데, 레몬 꿀차를 마시니

“와! 이거 내가 원하는 거잖아!”

 나도 미처 몰랐는데, 경험해보고 나서야, 

“와! 이거 내가 원하는 거잖아!”하는 게 또 뭐가 있을까?

요즘에 포도가 나오는 철인데,,

어제 포도를 먹었는데, 그때 

“와!” 했던 것 같고,

275,000원 하는 검은색 스웨이드 구두를 67,000원에 팔길래, 신어봤는데, 크기도 딱 맞고, 편하고, 게다가 멋있어. 그래서

“와!”하며 잘 신고 다니고 있고,

i5 노트북을 쓰다고, i7 노트북으로 바꾸고 나서는, 

“와! 이거 좋은데?”(실제로 i5는 줌인원이 25명인가 밖에 안 되는데, i7은 50명까지도 한 화면에 나온다)

어느 카페에 갔는데, “와!” 하던 순간도 있고....

기대도 하지 않은 영화를 보다가 “와!”하는 순간도 있고...

그러고 보니, 내가 더 많은 경험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이렇게 술도 마시고, 꿀차에 레몬도 넣어마시고,,, 

좋아지고 있다는 느낌이 확연하다.

발작이 없어진 지 한 달이 넘었다.

요즘엔 깨지 않고, 2~3시간을 자기도 한다.

우울감도 오는 가을과 함께 서서히 물러가는 듯하다.


이렇게 낫는 건가?

이렇게 회복되는 건가?

이렇게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건가?

뭔가 특별한 계기를 통해 우울증, 불면증, 공황장애에서 벗어날 줄 알았는데,,,

어느새 나는 회복을 길에 들어서 있었고, 그 길을 묵묵히 걸어오고 있었던 걸까?

언제부터 나는 회복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걸까?

그때가 언제였을까?

그때가 언제인지 몰라 많이 아쉽다.

알았더라면, 더 기뻐했을 터인데, 더 희망찼을 터인데..

마치 '있을 때 잘할걸...'같은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매일매일 감사하고, 매일매일 잘해야겠다!'

 

삶에는 오르막, 내리막이 있을진대, 이제는 오르막으로 가나보다. 

당분간 괜찮을 예정!

어쩌면 이제는 괜찮을 예정!

그러면 감사할 예정!


#우울증 #공황장애 #레몬 꿀차 #대학 #동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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