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와 함께 하는 삶
고양이를 돌보는 것과 함께 내가 마음을 다잡는 방법은 감사 기도이다. 간절함보다는 습관적으로 감사 기도를 하자고 결심했고, 꾸준히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별거 아닌 것 같았는데 아주 작게나마 마음에 위안을 준다는 것을 체감하는 시간이 되고 있다.
잘 지내다가도 문득문득 너무나 허무하고 무가치한 삶을 시원하게 떨쳐버리고 떠나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 때마다 나는 무서워졌다. 죽음보다 더 두려웠던 것은 모친과 다를 바 없는 무책임한 행동의 결과였다. 전적으로 이기적인 내 선택이야 스스로 감당함이 마땅하지만 이제 나는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를 시작했다.
감사 기도라고 하면 특정 신앙생활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그저 창조주에 대한 믿음으로 지금까지 살아있게 해 주셔서 감사함을 전하고 의지를 다지는 행위라고 하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기도는 어색하고 막막하기만 했다. 무엇에 대해 감사할 수 있을까? 지금의 나는 막막함으로 마음이 어지러운 상황이고, 그 와중에 여러 번의 사고 후유증과 게으르고 무기력한 탓에 그다지 육체적, 정신적으로도 건강하다 할 수도 없는데?
그래서 그저 우선 행동하기로 했다. 떠오르는 생각에 “감사합니다”라는 말로 끝맺으며 기도의 형식을 사용했다. 어떤 형식이나 시간을 정하지 않고 생각이 날 때마다 속으로, 가끔은 입 밖으로 소리 내어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정도였다.
예를 들면, 한국 사람으로서 북한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크고 작은 사고와 그로 인한 후유증으로 체력은 약해졌고, 걷는 것조차 힘들 때도 있지만 멀쩡한 육신을 유지하고 있음에 감사하게 되었다. 모아둔 재산은 없지만 나의 고양이들과 함께 그럭저럭 한 달을 살아낼 수 있음에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
기도는 내가 원하는 삶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해 주었고, 마음의 변화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원망은 여전했지만 상황이나 감정에 대해 예전보다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들여다보게 되었다. 가족 같지 않은 혈육들, 그중에서도 대장격인 모친에 대해 나의 감정과 별개로 인간으로서 그녀의 상황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힘들고 괴로웠던 만큼 나를 볼 때마다 남편을 떠올리게 하는 내 존재가 그녀도 괴롭고 싫었을까? 괴롭힘 당하는 나를 보며 방관하거나 오히려 대놓고 그들을 편들었던 모친에게 정은 없다.
그러나 기도와 함께 시간이 지날수록 한 집에서 살게 해 준 것에 대해서는 감사할 부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단 한 번도 가출을 생각하지 못했지만 내가 집도 절도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지 않았던 것은 혐오스러운 남편과 가장 닮은 나를 그래도 용인해 준 그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그 많은 자식을 낳고 건사한 모친의 입장에서는 방치와 방관, 티 나는 편애로 남편에 대한 복수를 대신이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나를 버리거나 끝내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의 존재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이성적으로 나누어 이해해 보려고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다.
아마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본인과 자녀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지 못한 것 아니었을까?
한때 가족들에게 혈육으로서의 사랑과 인정을 받기를 원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사고로 인해 몸과 마음에 후유증을 가지게 되었다. 신의 있는 친구라고 믿었던 이들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이용당하는 일도 꽤 겪었다. 그런 상황을 마주할 때면 자책하기도 했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기도 했다. 결국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해 반쯤 포기하는 심정으로 ‘그래 얼마나 힘들면 나한테 그랬냐. 그래도 너무 크게 뒤통수 때리지만 말아라’ 하며 미덥지 못한 사람을 일부러 옆에 두고 지내기도 했다.
애초에 기대하지 않으면 상처받지도 않으리라 생각하면서 미심쩍은 상황들을 모른 척 눈감고 지내는 것이 점점 습관처럼 익숙해졌다. 인간관계에 대해 진지한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실망하고 상처받는 상황은 가끔 되풀이되었다. 실패와 자포자기의 경험이 쌓이자 감정적으로는 무감각해지고, 인간 사회에 대한 신뢰는 바닥이 되었다. 그리고 무례함과 솔직함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다.
감사 기도의 시작은 나를 위한 걱정과 막막함에 마지막 발버둥이었다. 그러나 점차 그 짧은 시간은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상황이나 사람에 대한 인식도 다시 생각할 여지를 주었다. 신뢰는 회복이 어렵지만 기도를 통해 상처로 얼룩졌던 뾰족한 감정들은 조금씩 둥글어지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신께 감사드린다.
이런 나의 삶에 대한 태도 변화는 고양이들의 일상을 지켜보며 느낀 바가 컸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어필한다. 나의 손을 끌어가서 자신을 쓰다듬도록 이끈다.
자신의 사냥 실패를 좌절과 분노로 받아들여 의기소침해하지도 과격하게 다른 개체를 공격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한쪽에 자리 잡고 털을 고르며 숨을 돌리고 기분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오래 끌지 않고 다시 사냥에 도전한다. 먹고 싶은 간식이 있으면 간식통이 있는 곳을 기억했다가 집사의 주의를 끌어 간식을 획득하기도 한다. 모든 행동이 자신 위주이고, 뻔뻔할 정도로 요구 위주라고 느낄 수도 있지만 솔직하고 당당하여 비틀림이 없다. 그리고 집사와의 관계가 돈독하다면 티 나는 애정 표현으로 꾹꾹이를 해주고 골골송을 불러가며 표현한다. 표리부동도 이기적인 계산 속없이 좋고 싫음을 확실하게 표현한다. 그 태도의 명확함은 인간인 나에게 신기했고, 생각하게 이끌었다. 그리고 나도 변하고 싶다고, 변할 수 있다고 믿고 행동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아직도 나의 사회생활은 그다지 세련되고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는 날이 많다. 단지 한 가지 확실한 변화가 있다. 더 이상 모든 일에 내가 나를 탓하거나 공격하지 않게 되었다. 나를 위해 변명도 해 주고 위로도 해주는 사람으로 변한 것이다.
우연히 만난 고양이들은 어떻게 하면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만들었고, 내일을 고민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했다. 그리고 감사함을 기도로 마음에 각인시키려 노력하는 사람이 되었다.
내게 고양이들은 내 인생을 위해 찾아온 너무나 소중한 인연들이다. 그들과의 만남으로 나는 감사함을 알게 되었고, 일상을 흘려보내지 않고 하고 싶은 일들로 채우며 살고 싶어졌다.
부디 후회보다 잔잔한 충실함으로 매일을 채워나갈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도 나는 하루를 살고 있다.
비몽사몽 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