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고하던 마음의 벽이 녹기 시작했다.
고양이들과의 동거는 매일이 달랐다. 얕게 알고 있던 정보와도 개묘차가 있어 전체적으로 퉁칠 수 없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들은 개와도 달랐고, 내가 예전에 키웠던 신기하다는 말을 가끔 듣던 토끼와도 달랐다.
흔히들 독립적이라 비교적 외로움을 덜 탄다고 하던 고양이들의 사회는 의외로 복잡하고 체계적이었고, 가끔 고양이들 중에는 인생의 부침에 달관한 현자 같은 태도를 보이는 녀석도 있었다. 함께 살며 보고 느낀 고양이들의 세계는 생존과 번식을 위한 본능과 공존을 위한 시스템이 잘 마련된 사회였다.
고양이는 영역 동물로 독립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무리를 이루지 않는 모습이 가장 보편적인 이미지였다. 그 이면에 사회화가 덜 끝난 어린 개체나 임신한 상태의 어미 고양이들에게는 영역을 공유하며 공격하지 않는 암묵적인 약속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은 모르던 사실이었다. 약한 새끼는 버리는 비정한 모성을 적자생존이라는 자연의 섭리에 따라 선택적인 양육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어미 고양이는 특유의 분별력으로 도움을 줄 만한 인간을 선택해 새끼의 목숨을 구할 줄 아는 생명체들이었다. 심지어 가끔은 어리석고 둔한 자식을 위해 싸워서 쟁취한 풍요로운 영역을 물려주고 떠나버리는 모성애를 가진 개체도 있다고 한다. 마치 우리 집 막내 고양이만 남겨두고 다른 두 자식들은 챙겨서 가버린 그 어미처럼.
누리는 어미가 밖에서 부르는데 내려가지를 못하고 쳐다보며 울기만 하다가 결국 우리 집에 무단 침입한 후 눌러살고 있다.
큰 고양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꿋꿋이 버티던 아기고양이.
모든 걸 다 누리며 잘 살라는 의미로 누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지금은 집에서 사회성이 가장 좋은 고양이이자 누님들에게도 사랑받는 막내다.
우리 집 고양이들의 사회 또한 단순하지 않다. 때로는 영역을 공유하기도 하고, 서열이 평생 가는 줄 알았던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뜻밖의 장소에서 또 다른 서열로 엎치락뒤치락하기도 한다.
그들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유연한 어울림은 무채색뿐이던 내 일상에 색깔을 입히기 시작했다. 삶에 대한 의욕을 되살린 것은 물론이고, 다시 인간 사회 속에 뛰어들 용기를 주었다.
지금의 나는 가진 것이라고는 쥐뿔도 없지만 이들과의 동거를 위한 기본적인 지출만은 유지하기 위해 신경을 쓴다.
고양이를 키우지 않는 친구들은 도도하고 귀여운 모습만 보고 돌아가지만 함께 지내면서 보게 되는 그들은 매력적인 겉모습 이외에도 뭉개지다 못해 무뎌진 나에게도 소소한 감정들을 다시 느끼고 표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감정 표현의 달인들이다.
해리는 입양 후 한 달을 곰처럼 잠으로 보낸 후 분리불안을 거쳐 1년이 채 지나지 않았을 시기부터 작년까지 나의 낮밤이 바뀐 생활에 맞추어 생활했다.
성장하면서 점점 집에서의 생활이 괴로워졌다. 고등 1.2학년이 되었을 때 나의 하루는 살자 충동과의 싸움이었고, 고3으로 올라간 후에는 '그저 흐르는 대로 흘러가보자. 나는 잡초처럼 악착같이 살 거다.' 독하게 마음먹으려 채찍질 해댔지만 깊은 속마음은 자포자기에 가까운 상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해리를 입양한 후 나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함께한 시간이 쌓이면서 눈치를 보면서도 주위를 맴돌며 떠나지 못하는 모습이 고맙고, 무뚝뚝한 나의 태도가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어느샌가 서서히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었던가 보다. 나그네의 옷을 벗긴 것은 따뜻한 태양이었다는 우화가 떠올랐다. 해리의 한결같은 애정과 그럼에도 자신 있게 애정을 요구하지는 못하는 모습이 학창 시절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 마음에 100% 어미처럼 챙겨주지는 못하겠지만 뭐라도 한 마디 답을 해 주고 싶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른 순간 "사랑한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고 있었다. 전혀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없었다. 거부감이 심한 말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막상 입 밖으로 나온 나의 애정표현에는 어떤 부끄러움도 오글거림도 없었다. 그저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그 한마디가 내 세상을 변화시키는 마법의 열쇠가 되어 주었다.
우리 집 고양이들 중 해리와 행복이를 제외하고는 다들 상황에 떠밀려 함께 지내게 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입양이 되지 않아 함께 지내게 된 그들은 제각기 환경도, 나이도 달랐다. 당연히 서열 다툼을 비롯한 적응의 시간이 필요했다. 뒤늦게 고양이의 서열이 늘 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더욱 집중하며 살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양이들이 집사인 나를 대하는 모습과 자신들끼리 어울리는 모습이 상당히 다름을 알게 되었다. 서로 늘 사이가 좋은데 함께 놀지는 않는다거나 만나면 살뜰하게 그루밍 해 주지만 캣타워 사용은 절대로 공유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사료는 양보하지만 간식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행동 등등. 상대나 장소, 또는 컨디션에 따라서도 미묘하게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집사로서 중재를 위한 관찰이 언제부터 나의 사회생활과 비교해 보는 시간으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다. 당연히 자꾸 그런 비교를 하게 되는 상황들이 생기는게 마음 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인간과 동물이라는 종을 떠나 생각해 보자고 스스로 설득했다. 인간 사회 속 나의 대인관계나 상황들이 조금씩 희미하게나마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남은 인생을 위해 변해야 했고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고 유지하기 위해 나름 신경쓰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 집 고양이들 모두 인생의 변화를 가져와 준 소중한 길잡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