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날에 대한 긴 끄적임
곧 내 생일이다.
또 곧 오빠의 생일이기도 하다.
나와 오빠는 딱 2년 차이로 생일이 같다. 주민번호 앞의 뒷자리가 같다는 뜻이다. 친한 친구들에게 오빠에 대해 설명할 때 으레 제일 먼저 소개했던 말은 생일이 같다는 거였다. 굳이 물어오진 않았지만 어렸을 땐 생일이 같은 남매가 뭔가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남매가 생일이 같으면 같은 날 미역국을 끓여주는 게 당연하겠지만, 엄마는 꼭 음력 생일로 따로 챙겨주셨었다. 달력의 그 조그마한 숫자를 매년 체크해두고 생일상 준비를 각각 따로 해주셨다. 한마디로 한 번에 퉁치지 않으셨다. 둘 다 20대가 되어 오빠의 친구들이, 또 나의 친구들이 생파라는 걸 해주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도 양력 생일을 챙기게 되었다. 자녀가 둘 다 성인이 된 우리 집은 생일날만 되면 냉장고에 케익이 가득했다.
공교롭게도 나는 생일이 같은 쌍둥이 딸을 키우고 있다. 아마도 아기들이 성년이 되면 같은 풍경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이를 낳고 나서 나는 내 생일이 예전 같지 않다.
불과 작년을 제외하고 내 생일은 ‘생일 주간’이다 뭐다 나를 축하하는 자리에 다니기 바빴다. 엄마가 차려준 미역국보다 떠들썩하게 여러 자리의 케익을 먹어야 생일이 지난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젠 35년 전 4.3킬로의 나를 낳았을 엄마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어졌다. 내가 배 아파 생명을 잉태한 경험은 한 세대 전 같은 경험을 한 여성의 고통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과 같았다. 어떻게 4킬로가 넘는 우량아인 나를 자연분만으로 낳을 수 있었을까. 감사함과 미안함이 교차한다.
그리고 곧 물을 것이다.
“엄만 어떻게 자분으로 나 같은 우량아를 낳았어?”
2.76kg, 3.11kg 두 명의 아이를 같은 날 낳은 내가 묻는 말이다. (물론 나는 제왕절개로 출산했다) 수술로 아이를 낳은 나로서는 자연분만의 과정이 더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애초에 쌍둥이라 제왕을 택한 것도 있고, ‘예측가능성’이 조금은 크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내가 묻는 대답에 우리 엄마는 “뭘 어떻게 낳아 낳아야 하니까 낳았지.” 같은 대답을 하시지만, 감히 내가 그 물리적 고통을 헤아릴 수 있을까 싶다.
올해부터 나는 일부러 내 생일상을 차리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결혼하면서부터 내 생일상은 남편이 차려주거나 시부모님이 챙겨 주시거나 외식을 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나와 오빠를 낳고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된 엄마를 위한 귀한 한 끼가 더 의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적어도 온통 나를 위한 축하만으로 끝나는 하루는 아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감사함과 고마움.
“생일 축하해”와 “낳아 주셔서 감사해요”라는 말이 호응이 되는 모든 이의 생일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