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개월 쌍둥이 자매는 의외로 낯을 가리지 않는다...?
8년 만에 중학교 동창을 만났다.
따지고 보니 내 결혼식 이후로 처음이다. 보통 한국은 결혼식 후 참석해 준 이들에게 고맙다며 밥을 사곤 하는 문화가 있는데, 난 부랴부랴 신혼여행 후 남편과 호주로 대학원을 가는 바람에 못했다. 그 이후엔 또 미국에 가느라 못했다. 사실 미국에 살면서 자주 연락한 사이도 아니었는데, 이번에 한국에 와 있으면서 연락이 닿았다. 사실 만난 걸로만 치면 16살인 중3 때 가장 자주 봤고(같은 반이었다), 22살 즈음에도 한두 번 본 것 같다. 그때는 친구가 미국 유학 중이라 자주 보진 못했다. 그리고 26살 즈음에도 동창회가 있어서 보면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았던 기억이다. 중학생때 했던 그대로 참 실없는 농담이었던 거 같다.
그 후 또 내가 미국에 가기 전에 동창회를 주최해서 그때 또 봤다. 여기서 웃긴 건 나는 내가 중3 때 반장이나 부반장이었던 줄 알고 동창회를 소집했는데, 20명 가까이 모인 친구들의 피셜을 들어보니 내가 아니라 참석한 다른 친구가 반장이고 부반장이었다. 얘기를 듣고 보니 내가 한두표 차이로 떨어졌던 기억이 났더랬다. 인간의 기억력은 이렇게나 자의적이다. 웃긴 게 임원도 아니었던 내가 자기 미국으로 이민 간다고 단톡방 만들어서 동창회 모임을 주최했던 거였다. 그리고 그 모임은 4차까지 이어졌다. 새벽 4시쯤 파한 모임에 우리는 둘 다 또 실없는 농담을 하며 남아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 게 내 결혼식이었다.
결혼식 이후 8년 만에 본 친구는 그대로였다. 친구도 내가 그대로라 했다. 서로 그 시절 그대로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어제본 것 같은 편안함은 그대로였다. 중학교 동창이란 이런 것. 만 36세에 만나도 곧장 16살의 나로 돌아간 것 같은 잠시의 기분.
그렇지만 정말 잠시였다.
쌍둥이 자매를 데리고 나간 상황에서 16살처럼 행동할 수는 없었다. 처음 보는 삼촌 앞에서 슬쩍 낯가림을 시작한 아이들을 달래고, 안부를 물을 겨를도 없이 곧장 점심메뉴를 정하고, 그러는 내내 유모차를 끌고 있는 나는 영락없는 쌍둥이 엄마였다. 비가 오는 날씨에 우산을 챙길 겨를 없는 정신없는 쌍둥이 엄마였다. 다행히 비는 보슬비로 바뀌어 있었고, 땅은 적당히 축축했다. 잘못이 있다면 비 오는 날 아이들 키만큼 긴 아우터를 입혀서 앉은뱅이 하며 놀았던 아이들 때문에 옷이 누더기가 되었다는 점. 누구를 탓하겠니.. 쯧
점심은 이탈리안으로 했다. 둘 다 양식파이고 외출 경험상 아이들도 크림파스타나 크림리조또를 곧잘 먹었다. 다행히 서성이던 스트릿 끝자락에 정자동 속의 유럽 같은 분위기의 레스토랑이 보였다. 유아 체어는 없을 것 같기도 했으나, 슬프게도 역시나 없었다. 들어왔는데 또 나와서 다른 장소를 찾으면 시간을 지체할 것 같아 그냥 어른 체어에 앉혔다. 6인 테이블에 내가 가운데 앉고 양 옆에 아이들을 앉히려 했으나 무리수였다. 첫째를 먼저 창가 쪽에 앉히고 둘째를 안쪽에 앉히려 했으나, 먼저 앉은 첫째가 거부했다. 어쩔 수 없이 첫째를 내 무릎에 앉히고 둘째를 옆 의자에 앉혔다. 첫째가 엄마 무릎을 차지하고 앉았으니 둘째는 눈치를 보며 바로 앞에 앉아있는 삼촌에게 안아달라고 했다. 평소 낯가림이 심한 건 둘째였는데 의외였다. 옳지 하며 슬그머니 둘째는 친구에게 부탁했다.
그렇게 마주 보고 앉아서 재빠르게 미트볼 쉬림프 크림리조또를 시켰다. 친구는 미트볼 토마토 파스타를 시키고, 감튀를 추가했다. 감튀에 트러플은 빼기로 했다. 콜라와 제로 콜라를 시켰다. 핑크와 민트의 플라스틱 아이 식기를 각각 놓아주고 컵에 물을 조금 따라주었다. 유아용 숟가락으로 물을 떠먹다 엎고 쏟고 닦고를 한두 번 하니 리조또가 먼저 나왔다. 다행이었다. 첫째도 둘째도 쉬림프크림 리조또를 잘 먹는 것 같았다. 그것도 참 다행이었다. 이모들 말고 엄마의 남사친을 만나는 건 처음이었는데 이렇게나 스무스하게 따라와 준다니! 친구에게도 아이들에게도 고마운 한편 언제 또 돌발 상황이 발생할지 몰라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보통 식사 시간엔 여러 가지 카드가 있는데, 식전빵, 주문한 메뉴, 엄마가 챙겨 온 주스나 간식, 그리고 휴대폰이다. 첫째는 먹는 것보다 유튜브를 더 좋아하는 편이고 둘째는 먹을 욕심이 있는 편이다. 삼촌 옆에 앉은 둘째는 리조또도 야무지게 잘 먹고, 중간중간 감튀도 잘 챙겨 먹었다. 첫째는 둘째보다 먹다 버리는 횟수가 잦은데 내 옆에 앉아서 다행이었다. 리조또를 곧잘 떠먹고, 감튀가 나오니 관심을 보이며 열심히 집어 먹었다. 보통 아이들과 외식해서 밥을 먹을 땐 무언가를 음미하기는 어려운데 심지어 나도 맛있다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쌍둥이들의 낯선 삼촌과 무난했던 점심 식사였다.
아이들 때문에 정신없는 와중에 가족, 건강,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20년 전 대화에서는 나올 수 없는 주제였다. 세월의 길이와 깊이만큼 우리의 대화도 짧지만 진중해져 있었다. 정말 오랜만이었지만, 그간의 드문드문 연락으로 각자의 사정을 공유해 왔기에 맥락 없는 안부는 생략할 수 있었다. 비록 인생의 중요한 주제를 잠시 꺼내놓고 21개월 아이 둘에 집중하기 바빴지만 그것대로 유쾌한 시간이었다. 회사 점심시간 2시간을 쌍둥이 자매의 왈가닥과 하이텐션으로 정신없게 만들어 놓았지만, 만나서 좋았다는 친구의 배려가 고마웠다.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에 매일 공감하며 사는 중이다.
오늘도 역시 내가 20년간 가꿔온 다정한 마을 하나가 도움의 손길을 내주었다. 고마웠고, 그 친절은 곧 도움이 되었다. 친구는 그 정신없는 와중에 첫째와 둘째 사진도 요리조리 찍어도 주고, 감자튀김도 새 걸로 바꿔주고, 과자도 꺼내주고, 놀아도 주고 안아도 줬다. 내내 귀엽다 해주는 친구를 보며 새삼 우리가 아이들을 바라만 봐도 예뻐하는 나이가 됐구나 싶었다. 16세에 그림을 잘 그리고 공부도 곧잘 하며 축구를 좋아하던 소년은 여전히 축구를 좋아하고 목공을 즐기는 성실한 직장인이 되었다. 어느덧 삼촌이라 불리는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꿈에 갈팡질팡하고 못 가봤던 길에 갸우뚱하며 실없는 농담에 빵 터지는 직장인 삼촌. 누군가에겐 아저씨 혹은 아줌마라 불리는 나이가 되었지만, 나는 우리가 여전히 꿈에 대해 말하고 꿈을 꾸고 자신의 미래를 그리고 있는 게 좋았다. 정말로 내가 꿈 많은 중3 학생이 된 것처럼.
아이를 키우면서 나도 성장하는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매일 하는 요즘이다.
임신 준비를 하며 일찌감치 경력을 내려놓은 상황 때문이기도 하고, 곧 내가 졸업한 분야가 로봇에 대체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다. 어느 정도 키워놓고 사회에 나간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경력단절 기간만큼의 사회의 벽이 사실 두렵다. 아이들과 온전히 함께 보내는 이 시기가 행복하다 느끼는 한편 내 미래에 대한 걱정을 놓고 사는 건 아니다. 가정 주부, 쌍둥이 엄마라는 타이틀만으론 좀 부족한 것 같다. ‘엄마’만으로도 벅차기도 한데, 엄마라는 자아만으로는 또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요즘 느끼지만 아이들은 정말 빨리 큰다. 하루는 더디 가는 것 같지만 어느새 내 아이는 성큼 자라 내가 생각지도 못한 말이나 행동을 하고 있다. 멀찌감치 아이들이 컸을 때 엄마가 엄마의 인생을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며 아이들도 자신만의 인생을 보란 듯이 꾸려가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그렇게 키우고 싶은 마음이다.
또 오래 두고 좋은 친구들 가까이에 살면 좋겠다 내 아이들도,
엄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