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이판, 한 달은 아쉬우니 두 달 살기

워킹하는 와중에 홀리데이도 챙기니 이것을 자체 워킹홀리데이라고 부르자.

by 여름

최근 친구가 '20대 빙고'를 보여줬다. 아직 3년 하고도 2개월가량의 시간이 남았지만 재미 삼아해 봤다.

KakaoTalk_20191110_160813028.jpg 빙고가 많다고 성공한 삶은 아니지요, 그저 내가 무엇을 했는지 '점검'해봅시다.

결과는 거의 위정척사파 수준이었다. 바쁜 대학생활을 보냈지만 해외 경험은 정말 부족했고 사실 이 부분이 취업 준비를 할 때 스스로 아킬레스건으로 삼기도 했다. 구사할 줄 아는 언어는 한국어 영어 중국어 3개가 아닌 각 0.7 0.2 0.1로 도합 1개 국어의 삶을 사는 핑계를 거기서 찾기도 했다. 26살은 아직 20대가 조금 남았지만 이제 와서 어학연수가 교환학생은 어렵고, 워킹홀리데이는 마음을 먹으면 갈 수는 있는 어중간한 상태. 하지만 담이 작은 내가 어렵사리 들어온 회사를 그만두고 미지의 땅으로 떠날 용기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런 나에게 회사가 준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이번 사이판 파견근무였다. 해외 경험이 거의 없는 나에게 파견 근무는 외국에서 두 달 지내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교육 차원에서 가는 거지만 '해외 파견'이라는 말이 주는 괜한 멋에 취하기도 했었다. 현실적으로는 하루하루가 고민의 연속인 회사생활에서 잠시 도피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기회 역시 회사에서 줬지만.

두 달이라는 긴 듯 짧은 듯한 시간에, 주 40시간을 근무하고 월급도 받으니 어쨌든 working도 하고, 남은 시간은 내 것이니 Holiday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것을 자체 워킹 홀리데이라고 부르자. 마치 체험판 워홀과 같은 이 시간의 소중함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을 시작한다. 사실 사이판이 미국령인 것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온 김에 영어도 조금 늘었으면 좋겠고, 외국에서도 그럭저럭 잘 지낼 수 있다는 나의 생명력도 확인해보고 싶고, 무척 숨 막혀했던 조직에서 벗어나 내 안의 소리에 집중하는 시간도 많이 보내고 싶다.



전 날까지 짐을 다 쌌는지 가족들과 연거푸 확인하고, 이제 생각이 안나는 것은 가서 사야 할 것이니 그만하자고 억지로 고민을 끊고 캐리어 문을 닫았다. 아침엔 눈이 금방 떠졌는데 부랴부랴 머리를 말리고 요란스레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결국 노트북 가방을 두고 와 다시 집으로 돌아간 나다운 출발을 했다.


IMG_2463.jpg

출발하는 비행기에선 선물 받은 책을 뒤적거렸다. 온전한 여행은 아니지만 익숙한 곳을 떠나 낯선 어디론가 향하는 것은 뭐든 여행이니 <여행의 이유>라는 책은 참 잘 어울린다.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하고 싶어 했던 옛 마음가짐이 고개를 든다. 선물해준 이의 캐리어 속 책 한 권의 부피만큼 자기 존재감도 기억해달라는 귀여운 당부도 잊지 않았다.


IMG_2465.jpg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대신 먹고, 자려고 노력하고, 건조성 비염을 고통받다 보니 창밖에 다와 가는 듯한 풍경이 보인다. 한국은 코끝에 겨울이 왔는데 반팔 티셔츠로 갈아입는 모습이 아직도 어색하다.



IMG_2481.jpg
IMG_2496.jpg

내리자마자 어항 속을 헤엄치는 듯 덥고 습한 공기에 숨 쉬는 것 하나는 끝내주게 편해졌다. 깨끗한 하늘, 맑은 공기, 이국적인 풍경 모든 게 신기해서 한참 두리번거렸다. 이 풍경이 익숙해질 쯤이면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한 첫날부터 조금 서글퍼졌다. 이별의 순간을 생각하며 미리 푹 빠지려 하지 않는 겁 많은 사람은 앞으로는 이 두 달에 충실해보기로 한다.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하고 쓸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