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하는 와중에 홀리데이도 챙기니 이것을 자체 워킹홀리데이라고 부르자.
최근 친구가 '20대 빙고'를 보여줬다. 아직 3년 하고도 2개월가량의 시간이 남았지만 재미 삼아해 봤다.
결과는 거의 위정척사파 수준이었다. 바쁜 대학생활을 보냈지만 해외 경험은 정말 부족했고 사실 이 부분이 취업 준비를 할 때 스스로 아킬레스건으로 삼기도 했다. 구사할 줄 아는 언어는 한국어 영어 중국어 3개가 아닌 각 0.7 0.2 0.1로 도합 1개 국어의 삶을 사는 핑계를 거기서 찾기도 했다. 26살은 아직 20대가 조금 남았지만 이제 와서 어학연수가 교환학생은 어렵고, 워킹홀리데이는 마음을 먹으면 갈 수는 있는 어중간한 상태. 하지만 담이 작은 내가 어렵사리 들어온 회사를 그만두고 미지의 땅으로 떠날 용기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런 나에게 회사가 준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이번 사이판 파견근무였다. 해외 경험이 거의 없는 나에게 파견 근무는 외국에서 두 달 지내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교육 차원에서 가는 거지만 '해외 파견'이라는 말이 주는 괜한 멋에 취하기도 했었다. 현실적으로는 하루하루가 고민의 연속인 회사생활에서 잠시 도피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기회 역시 회사에서 줬지만.
두 달이라는 긴 듯 짧은 듯한 시간에, 주 40시간을 근무하고 월급도 받으니 어쨌든 working도 하고, 남은 시간은 내 것이니 Holiday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것을 자체 워킹 홀리데이라고 부르자. 마치 체험판 워홀과 같은 이 시간의 소중함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을 시작한다. 사실 사이판이 미국령인 것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온 김에 영어도 조금 늘었으면 좋겠고, 외국에서도 그럭저럭 잘 지낼 수 있다는 나의 생명력도 확인해보고 싶고, 무척 숨 막혀했던 조직에서 벗어나 내 안의 소리에 집중하는 시간도 많이 보내고 싶다.
전 날까지 짐을 다 쌌는지 가족들과 연거푸 확인하고, 이제 생각이 안나는 것은 가서 사야 할 것이니 그만하자고 억지로 고민을 끊고 캐리어 문을 닫았다. 아침엔 눈이 금방 떠졌는데 부랴부랴 머리를 말리고 요란스레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결국 노트북 가방을 두고 와 다시 집으로 돌아간 나다운 출발을 했다.
출발하는 비행기에선 선물 받은 책을 뒤적거렸다. 온전한 여행은 아니지만 익숙한 곳을 떠나 낯선 어디론가 향하는 것은 뭐든 여행이니 <여행의 이유>라는 책은 참 잘 어울린다.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하고 싶어 했던 옛 마음가짐이 고개를 든다. 선물해준 이의 캐리어 속 책 한 권의 부피만큼 자기 존재감도 기억해달라는 귀여운 당부도 잊지 않았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대신 먹고, 자려고 노력하고, 건조성 비염을 고통받다 보니 창밖에 다와 가는 듯한 풍경이 보인다. 한국은 코끝에 겨울이 왔는데 반팔 티셔츠로 갈아입는 모습이 아직도 어색하다.
내리자마자 어항 속을 헤엄치는 듯 덥고 습한 공기에 숨 쉬는 것 하나는 끝내주게 편해졌다. 깨끗한 하늘, 맑은 공기, 이국적인 풍경 모든 게 신기해서 한참 두리번거렸다. 이 풍경이 익숙해질 쯤이면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한 첫날부터 조금 서글퍼졌다. 이별의 순간을 생각하며 미리 푹 빠지려 하지 않는 겁 많은 사람은 앞으로는 이 두 달에 충실해보기로 한다.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하고 쓸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