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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이 Sep 05. 2023

하나의 나뭇잎에서부터 01


-1-


케이는 화방에서 4절지 종이를 샀다.


얼마 전부터 새로 이사한 집의 휑한 벽을 꾸미기 위해 케이는 적당한 식물그림 액자를 찾아보고 있었다. 조금 괜찮다 싶은 액자가 있으면 가격이 제법 나갔다. 세입자로 살 집의 인테리어로 투자하기에는 상대적으로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취향도 아닌 그림을 그저 저렴하다는 이유로 구매하고 싶지는 않았다. 케이는 쇼핑사이트들을 더 둘러보다가 액자를 구매하는 대신 직접 만들어보기로 했다.


액자틀을 구매하는 대신 적당한 두께감의 종이에 그림을 그려 벽에 자국이 남지 않는 접착스티커로 붙일 계획이었다. 참고할 나뭇잎 사진과 그림들은 넘쳐났지만 문제는 결과물의 완성도였다. 뭐 못 그리더라도 그 나름대로 괜찮지 않을까. 케이는 작업자체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케이가 화방에서 고른 종이는 미색의 도톰한 4절지였다. 반짝이는 가루를 얇게 부셔서 뿌려놓은 것처럼 종이를 움직일 때마다 광택이 돌았다. 종이의 반짝이는 질감이 그림의 미흡한 부분을 보완해주지 않을까 하는 심산도 있었다. 화방에서 구매한 종이를 옆구리에 끼고 걷는 케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케이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닥에 종이를 펼쳐 보았다. 생각해 보니 그림 재료가 마땅치 않았다. 물감이나 오일파스텔 같은 재료들은 이사를 하며 지인들에게 나눠주거나 중고거래로 판매하고 난 뒤였다. 갖고 있는 것은 36색 프리즈마 색연필이 전부였다. 얇은 색연필 심으로 4절지를 채우려면 품이 많이 들 것이었지만, 케이는 그냥 질러보기로 했다. 옅은 연두색 색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정밀묘사가 많이 필요 없는, 나뭇잎이라고 하면 흔히 연상되는 한쪽 끝이 뾰족한 타원형의 단순한 문양이었다.


스케치로 형태를 대략 잡아놓고 채색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진과 비슷하게 색감을 재현하려고 노력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진은 보지 않게 되었다. 그림 전체를 놓고 볼 때 어울릴 것 같은 색을 골라 칠했다. 생각했던 대로 색연필로 작업하기에는 종이 사이즈가 너무 컸다. 한참을 칠한 것 같은데 숨 고르기를 하고 보면 나뭇잎의 8분의 1 정도 밖에는 안되었다.


칠해야 할 범위는 많은데 속도는 느리니 행위는 단순해지고 마음은 편안해졌다. 복잡하던 케이의 머릿속도 가라앉았다. 해결되는 것은 없어도 그저 잠시 내려두고 여유를 갖는 것도 좋구나 싶었다.




-2-


케이가 몇 번의 이직 후 다시 입사하게 된 회사는 규모는 크지 않았어도 내실이 단단한 강소기업이었다.  근무했던 회사들 중에 업무 분담이 잘 되어있고 일의 순서가 체계적으로 진행되어 일하기가 수월하게 느껴졌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팀장을 향한 디자인팀의 분위기였다.


같은 업무를 배정받아 실질적으로는 사수의 역할을 하던 동료디자이너는 첫날부터 팀장에 대한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쏟아냈다.

“팀장, 너무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아요? 말을 얼마나 세게 하는지 상처받지 않은 디자이너가 없다니까. 케이 님은 괜찮았어요? “

케이는 동료의 말에 쉽게 동조하기가 조심스러웠다.

“네, 저는 세게 말해도 뒤끝이 없으면 괜찮은 것 같아요.”

“아직 케이 님이 팀장을 잘 몰라서 그래요. 워크숍 때 술 마시고 얼마나 행패를 부렸는지 임원들도 기를 찰 정도였어요.”

“네.”


동료 디자이너의 험담은 시작에 불과했다. 알고 보니 팀장은 디자인팀의 공공의 적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팀장은 오랜 경력에도 불구하고 디자인 실력이 좋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모든 작업은 팀장의 최종 컨펌을 받아 진행되었는데, 팀장이 체크한 수정안을 보면 납득하기가 힘들었다. 시안의 주요 컬러와는 상관없는 형광색을 시안 중간에 삽입해 두거나 타이틀 텍스트만 지나치게 확대한 식이었다. 몇 번 그런 과정을 겪으니 팀원들의 반발심도 이해가 갔다. 그렇지만 팀원들의 뒷담화 역시 지나친 데가 있었다.


디자인팀은 사무실의 가장 안쪽 방에 위치해 있어서 입구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내부에서 하는 이야기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팀원들은 팀장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를 틈나 팀장이 방에 들어오기 직전까지도 팀장의 험담을 했다. 없는 자리에선 나라님도 욕한다는 말도 있고 그렇게라도 업무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는 동료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실컷 욕을 하고 나서 팀장 앞에서는 세상 밝은 미소를 짓는 이중적인 태도는 견디기가 어려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케이 역시 뒷담화를 하는 동료 무리에 섞여 있었고 적극적으로 팀장욕을 하지는 않아도 암묵적으로 동조하게 되었다. 팀장에 대한 저항도 점차 커졌으며 한편으론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동료들이 케이가 없는 자리에서  자신의 욕을 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할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괴감만 커져가던 하루하루, 팀장은 결국 팀원들의 성토로 회사에게 내쫓기다시피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고 케이 역시 얼마 후 그 회사를 퇴사했다. 케이는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예전 회사 동료에게 디자인팀 소식을 들었다. 새로운 팀장은 실력도 좋고 인성도 좋다고 했다. 다행이라고 말하는 케이에게 동료는 덧붙여 말했다. 요즘 팀원들이 디자이너 M에 대한 뒷담화를 자주 한다는 것이었다. M은 팀장의 험담을 주도하던 케이의 사수 디자이너였다. 케이는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그 회사를 그만두기를 참 잘했다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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