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을 읽고
들국화의 ‘그것만이 내 세상’을 듣는다.
송골매의 ‘세상모르고 살았노라’를 듣는다.
머릿속이 꽃밭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언제부터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과도하게 이상적인 사람
자기중심적으로 정신승리하는 사람
을 두고 머릿속이 꽃밭이라고 한단다.
곰곰 생각해 본다.
머릿속이 꽃밭이라는 이 말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사례에 사용할 수 있을 거다.
- 타고나길 금수저라 세상 물정 잘 모르는 사람
- 금수저는 아니지만 철없이 현실감각이 뒤떨어진 사람
- 세상에 대해 지나치게 이상적 기대를 하는 사람
- 순진할 정도로 세상이 공정하다거나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나는 어떤 경우에 해당할까.
금수저는 아니지만…세상 물정? 잘 모르긴 한다.
현실감각도…떨어지는 편이다.
세상이 공정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직도 이상적인 기대를 할 때가 종종 있다.
여기서 맴도는 의문.
그런데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게 아니라면 머릿속이 꽃밭인 게 문제가 될까? 오히려 꽃밭을 황폐하게 만드는 환경이 문제인 건 아니고?
꿈과 희망이 바래져 의심과 회의가 되고
소히 말하는 사회에 때가 묻어 머릿속이 풀밭도 아닌 벌판이 되어버린 것이 ‘현실적’이다는 이유만으로 더 나은 것으로 혹은 ‘정상적’인 것으로 취급받는 게,
정말 맞는 것일까?
어쩌면 네 머릿속이 꽃밭이라는 말은
포기를 강요당한 그이가
아직 포기하지 않은 누군가에게
‘현실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녹록하지도 아름답지도 바꾸기도 쉽지 않으니 너도 그만 포기하고 받아들여’라며 포기를 강요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포기를 강요하는 시대에 그이 역시 길들여진 탓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근데 머릿속 꽃밭을 포기하고 살면
삶이 더 나아지긴 하는 걸까?
아님 기대를 안 하니 실망하는 일도 없는걸까?
문보영 시인의 에세이집 ‘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을 읽었다.
이 책엔 작가가 아이오와 글쓰기 프로그램 IWP(International Writing Program)에 참여하며 겪은 일들과 생각들이 묶여져 있다. 묶여져 있다, 이 단어를 소리 내어 읽어본다. 시인은 이 표현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마치 작가의 생각이 묶여있다는 어감으로 들리기도 해서. 내가 이 책을 통해 느낀 작가는 그렇다. 그녀는 묶여있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자꾸 묶으려는 사회에서 숨어지내던 사람, 아이오와에서 드디어 마음껏 풀어진 사람. 그러나 말 그대로 이건 내 느낌이고 나는 시인이 어떤 사람인지 -책을 통해서만 알뿐-자세히는 알지 못한다.
시인은 IWP에서 다양한 국적의 작가들을 만난다. 그중에는 자신의 나라를 떠나 타국에서 타국의 언어로 글을 쓰는 작가들도 있다. 그런 작가들을 엑소포닉 작가라고 부르며, 잭 케루악, 사무엘 베케트, 줌파 라히리 등 자신이 잘 알고 있던 작가들이 바로 엑소포닉 작가였다는 사실을 시인은 알게 된다. 엑스포닉 작가들을 만나 아이오와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지내는 내내 시인은 마음속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품는다.
자신이 살아가는 곳을 사랑하기란 너무 어렵지 않은가요?
IWP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작가들이 머무는 아이오와 하우스 호텔 주변에는 강변을 따라 들판이 펼쳐져 있었는데, 시인은 밤마다 들판을 걸으며 생각했다. ‘삶의 반의어는 들판이구나. 그럼 들판을 걸어야지.’라고.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하루 동안 책을 되새긴 후에야 나는 ‘삶’과 ‘들판’이 시인에게 무얼 상징하고 있었는지 어렴풋이 짐작했다. 아이오와라는 들판과 시인의 삶에 대하여.
시인의 시집 [책기둥]의 후기에서 박상수 문학평론가는 시인에 대해 ‘명랑한 사람’이라고 썼다. 평론가의 말처럼 시인의 글엔 기발한-기발하다는 단어가 진부하게 느껴질 만큼-상상력과 표현들이 많다. 그런데 왜인지 나는 그 명랑한 문체에서 절절한 슬픔 같은 걸 느꼈었다. 아주아주 깊은 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의 절망 같은 것. 너무 슬퍼서 일부러 더 많이 웃는 반어법 같은걸.
나는 도서관에서 [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을 읽다가 코를 막고-눈물보다 콧물이 더 많이 나서- 울었다. 시인의 또 다른 에세이 [일기 시대]를 읽다가도 조금 울었는데 그건 시인의 명랑한 문체에 숨겨진 습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대체 어느 대목에서 그렇게 눈물이 났느냐고 감정 과잉인 것은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럴 땐 행간의 구절에서 울 수밖에 없었다고, 아마 다 쓰지 않음으로써 쓰는 사람이 시인인가 보다고 답할 수밖에는 없겠지만….
박완서 작가의 ‘나의 아름다운 이웃’이란 에세이를 떠올린다. 작가는 오랜 한옥생활을 벗어나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는데, 기대와 달리 아파트는 낯설었고 주민들은 무정하고 쌀쌀맞게 느껴졌단다. 그러다 이삿날 작가의 집에 인사를 온 옆집 이웃 여자를 만나게 되는데 이웃 여자는 남 유달리 착하고 밝은 표정 때문에 눈부시게 느껴졌고, 그런 여자를 이웃으로 둔 것이 예기치 않은 행운처럼 즐거웠단다.
그랬던 그녀가 큰 병을 앓게 되어 작가는 이웃들과 옆집 여자의 병문안을 가게 되고, 수척해진 그녀는 병상에서도 화사하게 웃으며 ‘큰애가 대학 갈 때까지만 살게 해달라 기도하는데 과한 욕심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작가는 그게 어떻게 과욕이 될 수 있는지, 손자의 결혼을 볼 때까지 살고 싶은 자신의 과욕을 줄여서라도 그 여자에게 목숨을 보태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저 이웃일 뿐인데, 내 몫을 줄여서라도 그이의 목숨에 보태고 싶은 마음은 대체 얼마큼의 온도와 깊이를 가진 것일까. 호감을 가진 이의 병환에 순간적인 연민이 솟구쳐 나와 평소보다 과장된 선의가 생긴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말이다.
나는 누군가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에 대해서 헤아려보았다. 내 목숨을 보탤 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이가 그이 몫의 행복을 야무지게 챙겨 충분히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에 대해서.
나는 시인을 모르고 내 행복이 석자인 내가 누군가의 행복을 빌어줄 자격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런 마음이 들었다. 시인이 시인의 들판 속에서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시인이 쓴 어떤 ‘장’에서 혹은 어떤 ‘문장’에서 얼핏 나를 발견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 역시, 나만의 들판을 걷고 싶다고.
책을 덮고 생각했다.
시인 덕분에,
꽃밭까지는 아닐지라도
숨이 쉬어지는 너른 들판을.
20250409 독서일지 by 리라작업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