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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이 Mar 12. 2023

추억의 맛 떡볶이

10 산책엔 간식

금강산도 식후경


너무 자주 접해서 조금은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이 표현. 그렇지만 이 구절이 담고 있는 뜻은 진리에 가깝다는 것, 다들 공감하실 것 같습니다. 아무리 천하절경이라고 해도 배에서 밥 달라 아우성을 친다면 금세 보는 재미를 잃어버릴 테니 말입니다. 저에게 밥심은 지구력의 다른 말이기도 합니다. 책상 앞에 앉아있는 것이 하루의 대부분인 이 허약한 사람의 당 에너지는, 오래된 핸드폰 배터리처럼 금방 방전이 되곤 합니다.


그래서 저는 늘 밥을 든든하게 먹은 후에라야 집을 나섭니다. 마치 드라이브하기 전에 차에 가득 주유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산책을 마친 후에는 재충전도 잊지 않습니다. 뭐 거창한 것은 아니고 간단히 크래커를 먹거나 라면을 끓여 먹는 정도인데요. 오늘은 산책하다 마주친 초등학교 옆 떡볶이 가게에 홀린 듯 걸음이 멈췄습니다.



학교 옆 떡볶이 집


언젠가 한 번 가봐야겠다 생각은 했지만, 가게 바테이블에 옹기종기 앉아 떡볶이를 먹는 어린 학생들 틈으로 끼어들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뭔가 어린이들의 세상에 침범한 침입자가 될 것만 같았어요. 늦은 오후,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보니 가게가 한산합니다. 마침 적당한 때가 온 것일까요. 자, 그럼 드디어 기다리던 떡볶이 맛을 좀 볼까요.


주인 아주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분식 체인점 중 제법 오래된 축에 속하는 가게라고 하는데, 신기하게도 30여 년 전 먹었던 떡볶이 맛이 납니다. 중학교 앞, 간판도 없던 가게에서 먹었던 바로 그 떡볶이 맛입니다. 자글자글하게 끓인 국물 떡볶이에 넣은 건 어묵과 떡볶이 떡이 다인 데도, 달짝지근 입에 착착 달라 붙어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던 맛. 하교 후 친구들과 가게로 뛰어 들어가, 의자 위에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먹었던 바로 그 맛. 입안 가득 떡볶이를 오물거리며 친구들과 수다 한 판 하고 나면 콧노래가 흥얼거릴 정도로 기분이 좋아지던 기억. 다들 하나씩 가지고 계시지 않을까요.


동네 초등학교 옆에 위치한 떡볶이집 떡볶이


그리고 함께 떠오르는 또 다른 추억의 떡볶이 가게.


칠공주 떡볶이


어릴 적 살던 집 근처엔 오래된 재래시장이 있었습니다. 시장이 끝나는 길목엔 떡볶이 노점이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모여 있었습니다. 대폿집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동그란 테이블 위에 파라솔이 세워지고, 테이블 가운데 설치된 화로 위 커다란 사각 철판에선 먹음직스러운 떡볶이가 화수분처럼 끊임없이 만들어졌습니다.


떡볶이 노점은 장을 보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 딱 좋은 곳에 위치해 있었지요. 노점을 지나갈라치면 떡볶이 아주머니들의 호객행위가 들려왔습니다.


“이리 와.”

“여기서 먹고 가.”


호객을 하는 아주머니와 눈을 마주친 후 다른 노점으로 가면 매서운 눈총이 따라붙었습니다. 떡볶이 노점의 호객 행위라니. 지금 생각하면 조금 낯선 광경이지만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는 아주머니들 나름의 생존전략이었겠지요?


어린 저는 아주머니들과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제일 인상이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의 노점을 선택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은 ‘이쁜이 아줌마’로 통하는 떡볶이 노점의 유명 인사였는데, 다른 아주머니들보다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에 가녀린 체구를 가져 그런 별칭을 얻게 되신 듯했어요.


저는 말씀도 조용조용히 하시고 결코 서두르지 않고 능숙한 몸놀림으로 떡볶이를 만드는 아주머니의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습니다. 떡볶이를 만드는 몸짓이 저리도 우아할 수 있구나, 어린 마음에도 느꼈던 것 같아요. 물론 떡볶이 맛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당시 천 원이면 한 봉지 가득 떡볶이를 포장할 수 있었는데, 주머니가 가벼울 때엔 500원, 300원어치도 덜어 주시곤 했었어요. 내 주머니 사정대로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었던 감사한 곳이었지요.

스무 살, 처음 사귄 남자친구가 집 근처에 놀러 왔을 때 함께 갔던 곳도 바로 이 떡볶이 집이었습니다. 최대한 예쁘게 먹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던지. 어설픈 것 투성이었던 풋풋한 시절이었네요.


떡볶이 노점은 하나 둘 줄어 7개의 노점만이 유지되었고, 이 7개의 노점은 칠공주로 불리며 동네 명물이 되었습니다. 노점은 구의 지원을 받아 상가건물 1층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사방을 하얗게 칠한 가게에 노점 각각의 화구가 일렬로 놓인 멋없는 풍경이었습니다. 아주머니들이 일하는 환경은 더 좋아졌지만 파라솔 아래 노점에서 먹던 흥취도 함께 옮겨올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몇 년 전, 오랫동안 살던 동네를 떠나와 낯선 동네로 여러 번 이사를 하면서 추억의 떡볶이 가게는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떡볶이를 맛보았더니 그 시절 아주머니들의 안부가 문득 궁금해집니다. 예쁜이 아주머니는 아직 그곳에 계실까요?


추억의 맛을 느낄 수 있었던, 오늘의 산책에 감사하며

내일도 든든히 먹고 힘을 내어

다시 걸어 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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