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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쟤와 별 Jan 03. 2024

은유 철거(撤去): 2인칭과 체현하는 시

홍지호, <사람이 기도를 울게 하는 순서>(2020) 리뷰

<은유 철거(撤去): 2인칭과 체현하는 시1)>

   

     

2020년의 1인칭: 실존적 슬픔과 ‘마음의 시학’2)


문학장에서 2020년은 어떤 해로 기록되었나. 


*


김봉곤의 사적 대화 무단 인용 사건은 그해의 일이었다.

2020년 여름까지 김봉곤이 문학장에 도착한 좌표는 단순히 ‘퀴어 서사’의 자리라고는 말할 수 없다. “퀴어 예술가 화자의 자기 재현에서 퀴어 당사자성에 입각한 수행성을 읽고, 그것이 “재현의 방법일 뿐만 아니라 재현의 윤리 그 자체””3)인 지점에 있었다. 사건 이후, 강동호는 비평사를 재정리하며 김봉곤의 좌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이른바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김봉곤의 작품이 지닌 문학사적 ‘상징성’은, 신경숙과 문단 내 성폭력 ‘이후’라는 새로운 문학사적 시간을 향한 적극적인 비평적 응답과 무관하지 않으며, (…) 넓은 의미의 ‘정치적 비평운동’처럼 해석될 수 있다. (…) 새로운 비평은 김봉곤을 비롯한 젊은 작가들의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여성과 소수자’라는 주체 담론, 정치적 재현의 가능성, 새로운 독자성에 대한 탐구 등과 같은 주요한 의제들을 내놓는 데까지 이른다.”4)


말하자면 김봉곤은 1인칭의 한계를 극단까지 가져가서 정치성을 획득하는 방법론을 보여준 작가였다. 어쩌면 그는 내면성을 끝까지 파고든 반대편에서 보편성과 조우하는, 즉 1인칭과 3인칭을 매개하는 변증법적 역할5)을 짊어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를 위해 문학장은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더욱 내밀하고 구체적인 개인적 서사를 추동했고, 이내 2인칭의 삶을 침탈하는 글쓰기가 등장하고 말았다.


이렇듯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포스트모던 정치의 테제를 체현하리라 믿었던 작가의 윤리적 추락은, 상징성을 동력 삼아 올라간 위치만큼이나 낙차가 컸다. 단순히 한 작가의 ‘일탈’로 치부할 수 없을 만큼 문학장 전체가 긴밀히 얽혀 있는 문제였으니까. 문학장은 밀쳐두었던 ‘오토픽션’에 대한 장르적 재검토와 더불어, 1인칭에 몰입하는 여러 작품의 ‘진정성’과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돌아보기 시작했다. 진실한 고백을 통해 삶과 문학을,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문질러 보려던 기획이 무력해진 것이다. 이후 김봉곤의 글에 적극적이었던 비평가들의 성찰6)이 줄 이었고, 계간 《문학동네》는 당해 겨울 ‘오토픽션 트러블’이라는 이름의 제호를 발간했다. 이러한 흐름은 뒤이은 김세희의 아웃팅 논란 등과 더불어 ‘재현의 윤리’ 전반에 관한 논의로 번져나갔다.


*


한편 ‘재현의 윤리’에 이목이 집중되었던 그해 가을, 홍지호의 데뷔 시집 『사람이 기도를 울게 하는 순서』가 조용히 상재되었다. 시인은 2015년 등단했고, 시편들은 아마도 2010년대를 가로지른 사회적 비극과 개인사적 레이어가 중층적으로 결합되어 씌었을 것이다. 


이 시집에서 홍지호가 주목하는 것은 ‘마음의 개별성’이다. 1인칭을 3인칭으로 변환하는 작업에 몰두해온 많은 이들과 달리 그의 시는 ‘겸손한 1인칭’을 겨냥한다. “‘나’는 ‘너’가 될 수 없다”는 명제는 냉혹하지만 명징하다. 심지어 공동체적 비극 앞에서도 우리는 각자가 어떤 마음으로 건너왔는지 알 수 없다. 홍지호는 이 명제를 바탕으로 ‘너’의 고통은 오롯한 ‘너’의 것이라는, 당사자성 앞에서 극도로 ‘겸손한 마음’을 불러온다. 고통에 대한 존중. 이것이 슬픔의 레이어를 사회적으로 현상하기에 앞서 (개인의) 실존적 슬픔에 주목해서 독해하려는 이유이다. 사회학적 언어로의 섣부른 인코딩은 때로 고통과 슬픔의 고유성을 납작하게 만들기에, 2인칭을 충분히 읽어낸 뒤에야, 그래서 당신의 1인칭 발화가 너(2인칭)에게 어떠한지 충분히 사유한 뒤에야 ― 겨우 3인칭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극한 고통은 인간을 주체로부터 박탈하므로 슬픔을 말하기 위해서 ‘나’로 돌아가야만 한다면7), 홍지호는 특히 ‘너(의 부재)’와 마주보는 ‘나’의 슬픔을 말함으로써 주체의 자리를 재탈환하는 셈이다. 주체의 자리에 ‘나’와 ‘너’를 다시 데려다 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집은 ‘너’를 잃어버린 ‘나’의 기나긴 추도사인 동시에, 2020년 이후 물어진 재현의 윤리에 관한 답신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


만약 “‘그해’라고 말문을 여는 순간 쓸 것이 떠오르는 사람”8)과 말문을 열기 위해선 ‘그해’를 떠올려야만 하는 사람으로 나눈다면, 홍지호는 후자에 해당할 것이다. 그에게 ‘그해’가 언제를 말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해의 질량이 여생의 무게와 기꺼이 치환할 만큼 거대하다는 점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해를 ‘재현’하는 데 온힘을 쏟진 않는다. 이미 현재를 쓰는 순간 과거가 될 뿐더러, 현재는 궁극적으로 과거의 숱한 가능태 중 하나에 불과하니까. 그는 대신 슬픔을 ‘체현(Embodiment)’한다.


홍지호에게 ‘그해’가 중요한 것은 그가 현재가 흘러 과거가 된다는 문장이 아니라, 과거 위에서야 현재에 도착할 수 있다는 명제와 바투 서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얼핏 같은 말처럼 보이지만, 홍지호의 과거는 흐르는 강물보다는 퇴적되는 지층과 같다. 과거로 쌓아 올린 현재가 결국 미래를 지탱할 것이고, 마침내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기억함으로써’ 단절되지 않는다. 시인은 연표의 시공간적 위계를 전복하며 덩굴처럼 삶을 감아 올라간다. 이를 두고 가능태(가능했을 시간)와 미래까지 모두 현재의 자리에 불러들이는 일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그렇다면 그의 시는 “어제를 쓰기 위해 계속 버려질 오늘”(「일요일」)에 관한 기록일 것이고, 그의 쓰기는 먼지 쌓인 파피루스에 전언을 필경하는 대신 오늘의 육체 위에 아리도록 너의 말을 아로새기는 일(文身)에 가까울 것이다.



언제나 누군가 누군가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네: 상실 이후의 마음


홍지호의 시에 깔린 상황적 모티브는 ‘상실’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상실의 순간이 아니라 ‘상실 이후’의 순간이다. ‘그해’에, 상실의 순간에 곁에 있어주지 못했기에, 너의 마음에 지각한 죄책감으로 인해 ‘순서’에 대해 내내 읊조린다.


임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전과로 미루어보아 게으름 때문은 아닙니다


당신이 기도하던 언덕에서

그 한 발자국을 내딛지 않았으면

날아가지 않았을까요 새는

놀라지 않고

_「금요일」 발췌


가끔 우리는 늦을 때가 있다는 것과


비가 들이닥칠 것입니다

무언가 기다리는 시간 사이로

_「번개가 천둥을 기다리는 시간 혹은 천동이 번개를」 발췌


우리가 상실의 순간에 지각할 때, 기다리는 ‘너’로부터 비처럼 들이닥치는 가능태적 세계가 발생한다. ‘나’는 지각이라는 “전과”가 있을 정도로 늦었던 사람이기에 ‘너’가 “내딛지 않았”을 가능성을 놓친 사람이다. ‘너’를 상실하지 않았을 수 있었던, 혹은 곁에 있어줄 수 있었던 가능세계에 대한 안타까움은 죄책감으로 화하여 시집 전체에 퍼져 있다. 그리고 죄책감은 자연스레 “가정법의 세계”를 반복하는 일로 이어진다. 가정법의 세계는 무거워진 슬픔의 중력이 인과관계와 상관관계의 차원을 하나로 뒤섞는다. 시간을 거슬러 갈 수 없음을 잘 알면서도, 가정법으로 모든 죄책감을 느낀 다음에야 애도의 과정에 진입할 수 있다. 무용한 가정법의 세계 안에서 충분한 단죄가 이루어진 후에야 애도할 수 있는 것이다. 


애도는 상실 이후에도 “별수없이 좋아하는 음식의 종류가 늘어나”(「정시성(定時性)」)기 때문에 생겨났다. 애도는 슬픔의 종료를 내포한다. 기어이 살아가야 하기에 망각과 수용이라는 단계로 발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설사 내가 딛지 않더라도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는 삶으로 떠밀 것이다. ‘슬픔’이 주체가 되는 사태, 그리하여 사랑하는 자를 또다시 잃지 않기 위한 지극함. 인간의 장례의식은 복잡다단한 절차를 거치 부디 짐을 내려놓기를, 내려놓은 만큼 삶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며 설계되었지만, 의식은 짧고 애도는 길며 부재는 영원하다. 돌아오기란 불가능하다. 


때가 되면 꽃이 피고 진다는 생각이 스쳤고

죄책감을 느꼈다


(중략)


우리의 행성에서는 떠다니지 못하는 기차

사람들이 가득했다


빈 좌석들과 상관없이


기차는 조금도 지연되지 않았다


알고 보면 모두 

슬픈 일이다 

_「정시성(定時性)」 발췌


자연은 모두 슬픔을 남긴다. 내가 무엇을 하든 꽃은 생몰하고, 기차는 왕래한다. 화자는 이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죄책감”을 느낀다. 가정법의 세계를 닫고 나오면 상실의 수용이라는 서늘한 세계가 자리하지만,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 하여 슬퍼하지 않고, 아파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이에 화자는 자신을 포함한 자연의 ‘질서’를 원망한다. 그는 작위(가정법의 세계)가 무작위(벌어진 세계)와 다르지 않을 때, 어떤 작별을 ‘가정’으로도 막을 수 없을 때, 가정법의 세계에 기댈 수도 없는 절대성 앞에서 시간이라는 ‘순서’를 만든 자에게 기도하고 자신을 의탁하는 대신, 분노에 찬 질문을 전송한다. “찾고 있던 신에게/ 질문할 기회가 생긴다면/ 처음으로 하고 싶은 질문이 있다/ 나를 만든 건 처음이지요?/ 세상을 만든 것도 처음이지요?/ 그러면/ 봐줄 수도 있을 것 같다”(「월요일」).


질서를 만든 신에 대한 원망이 묻어나는 「월요일」이 첫 번째 수록작이라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신성모독의 메시지를 던지는 듯한 이 시에서, 시인은 ‘사람’이 울게 되는 사태에, 기도가 철저히 무용한 사태에 분노한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섭리에 기대고 싶은 배면의 마음까지도 미워한다. 그러나 마지막 행에 다다라 화자는 신을 용서한다. 왜 용서한 것인가. 질서에 순응한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오히려 반대에 가까울 것이다. 신도 처음이라면, 순서의 문제라면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이 지점에서 시인은 신을 이해하는 ‘권능’과 그에서 비롯된 용서를 통해, 질서에 수록된 인간이 아니라 질서와 독립적인 인간을 기획한다.


*


세상의 모든 기둥이 울고 있다


기둥은 감당하는 것


세상은 신전이었다


사람들은 계속 

신전 기둥에 쓰여 있는 말씀들을 

잘못 해석했으므로


항상 기뻐하라는 문장은 또한 

잘못 해석되었으므로


(중략)


서사에 관한 강의 시간에 선생님들이

이야기를 지탱하는 힘은 무엇인가, 질문할 때마다

아무도


슬픔입니다

대답하지 않았다

누구도 슬퍼하지 않는 이야기의

슬픔은 어디서 오는가

묻는다면


아마도 

전지적 작가 시점


이제 슬픔은

이야기를 아는

우리들의 몫이다


슬픔은 감당하는 것


기둥이었다

_「참배」 발췌


그렇다면 권능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시선의 여부다. 슬픔은 “전지적 작가 시점”, “이야기를 아는” 이들의 몫이다. 이것이 분노가 기도로 전송될 수 없는 까닭이며, 질문이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홍지호의 세계에서 신은 인격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질서(자연)은 어떠한 의도가 없다. 차라리 어떤 명제에 가깝다. 이러한 측면에서 인칭적 권력이 아니라 푸코의 ‘(비인칭적) 권력’ 개념과 공명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전 기둥에 쓰여 있는 말씀들”은 무엇일까. 가장 보편타당하게 감각 되어 온 질서인 ‘선형적 시간관’일 것이다. 푸코의 권력 개념을 전유할 때, ‘시간은 순행·선형적이다’라는 타당해 보이는 시간관은 의식 저편에서 모든 언행을 통제한다는 면에서, 심지어는 애도의 마음까지도 이 명제에 종속된다는 면에서 권력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이를 바꿔 말한다면, 신은 인칭이 아니기에 인간과 신의 시차(視差)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인간은 권력으로부터 탈주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의 세계)을 지탱하고 있는 건 “슬픔을 감당하는 기둥”이고, 세계는 이미 퇴적된 슬픔을 감당하는 기둥으로 이루어진 신전이며, 마침내 모든 슬픔이 퇴적된 지층이다. ‘세계’라는 공간은 ‘과거’라는 시간과 ‘살지 않은 과거’라는 복수의 가능태를 품으며 같은 자리에 서서 시간‘들’을 호출한다. 우리는 호출된 자리에서 슬픔을 초대한다. 상술했다시피 슬픔은 “언제나 누군가 누군가를 좋아하기 때문”(「가창력」)에 발생한다. ‘누군가(2인칭)를 좋아하는 누군가(1인칭)’이어야만 비로소 ‘슬픔’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이 없다면, 그런 시선이 없다면 상실으로 인한 슬픔은 해명할 수 없다. 우리가 슬픈 이유는 신으로 표상되는 질서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으로 신을 감싸 안을 수 있는 권능을 지니게 되고, 주체의 자리는 ‘너’와 ‘나’에게 재귀한다. 이윽고 홍지호는 오독된 신성이 철거된 자리에 먼지처럼 피어오르는, 정직한 2인칭의 세계를 호출한다. 

 

 

말하자면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자 했던 말은 


홍지호가 시인이 애도의 공간 위에 시간을 불러들이는 방식은 슬픔의 재현이 아니라 ‘슬픔의 체현’이다. 눈앞에 불러오는 재현이 아니라 체현으로서의 슬픔인 것이다. 그리고 체현하기 위해서, 새기기 위해서 수행해야 할 언어는 바로 오롯한 ‘반복’이다. 어떤 형태의 수사건, 결국 당사자로부터 박리된 슬픔의 언어는 오독되기 마련이다. 예수도, 붓다도, 소크라테스도 직접 저술한 텍스트를 남기지 않았다. 변증법의 도식대로라면 표상은 사유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오독된다. 체험되지 않은 슬픔은 결국 잘못 읽힌다. 


그러므로 읽거나 전해 듣지 않고 스스로 이야기를 ‘체험’하는 일은 우리들의 몫이며, 그것이 우리가 세계라는 공간 속으로 가능할 시간과 가능했던 시간을 모두 소환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래서, 체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끝없이 기억을 되뇌어야 한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통합하기 위한 시도는 마침내 ‘기억’이라는 중력으로 수렴한다. “이야기를 아는 우리들”은 존재할 수 있었던 모든 가능태마저 ‘기억’함으로써 ― 정확히 말하자면 가능태를 품었던 그 마음을 기억함으로써 ― 다른 자의 1인칭을 경유하는 시선이 아니라 오롯이 그 시간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슬픔과 고통은 1인칭으로만 호명할 수 있다. 당사자가 아니면 슬픔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당사자처럼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역학적으로 어떠한 에너지가 다른 에너지로 변환될 때 일부 에너지는 유실되는 것처럼, 인칭의 문제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과연 우리는 1인칭을 3인칭으로 변환할 때, 유실되는 1인칭에 대해 충분히 고민했는가. 너무 섣불리 기억의 중력을 극복하려 하지는 않았던가. 


말하자면 시공간적 위계를 구부려 한곳으로 모으는 하나의 중력인 기억을 통해, 슬픔을 오롯이 체현함으로써 마침내 홍지호의 세계는 생겨난다. 역설적이게도 “항상 기뻐하라”는 전언을 거부함으로써 신성은 수용될 수 있는 셈이다. “활자를 활자의 의미대로 읽는”(「네온」) 일, “검은 새가 대신 울어주고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 될 수 있다”(「검은 개」)며 누군가를 경유하지 않고 직접 우는 일. 홍지호는 은유를 버리고, 반복해서 중얼거림으로써 자신의 몸에 ‘너’의 이야기를 새긴다. 겸손하게, 어떠한 해석도 없이. 이러한 벽돌을 쌓아 ‘말씀의 불복종’을 통한 ‘신성(神性)의 정확한 수용’이라는 정직한 신전을 건축한다. 그리고 이 신전 위에서 마침내 “은유를 잃어버렸던”(「화요일―철거」) 시인이 등장한다. 


창문을 닫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축축하더라도 자꾸만 꽃들이 피어나더라도

슬픈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는 것을


(중략)


젖어가더라도 다 젖어가더라도


창문을 닫는다거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_「번개가 천동을 기다리는 시간 혹은 천둥이 번개를」 발췌


나는 너를 잊었다 나는 너를 잊었다

중얼거리다가

잊었다고도 말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_「포기하고 싶다면」 발췌


어제는 그늘이야

너의 그늘이고


그늘은 어둠이

빛을 압도하는 유일한 지점


나무를 심으면서

내일로 끌려갑니다


문장과 오독 사이의 침묵처럼

나무는 자라지 않았는데

그늘이 자라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자유롭고 싶지 않습니다

_「화목」 발췌


말하자면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자 했던 말은


연소로 보여주고자 했던 설경은

_「재」 발췌


“자유롭지 않은 그늘”처럼, “젖어가더라도 창문을 닫지 말아야 하”고, “잊었다고도 말하지 말”아서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자 했던 말”은 내내 기억하고 슬퍼하자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가 기억하고 반복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타고 남은 것에 대해 쓰고 싶었던 것 같다”(「캠프화이어」)는 화자는 간절한 불꽃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네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려 한다. 그러니까 “연소로 보여주고자 한 설경”은 아마도 네가 존재했음을, 무의미하지 않았음을, 가정법의 세계가 존재함9)을. 그리고 이것들이 순서 없이 한 자리에 모이는 세계를 지시할 것이다. “증거 없는 ‘믿음’”은 힘든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다면, 가능태가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소멸하는 것이 있으니까. 


친구는 무슨 말을 들으면 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못 믿겠다는 말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중략)


믿을 수 없는데도

청력을 극복하여 들리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친구야

여기가 안국이냐

여기가 정말 안국이 맞으냐


친구는 아직 안국을 찾지 못한 모양입니다


나는 아직 친구를 믿지 못하는 육신이며


안국에서 만나자 꼭 안국에서 만나자

울먹거렸습니다

_「안국역」 발췌


「참배」가 2인칭을 섬기는 신전의 조감도라면, 「안국역」은 시인이 중력의 한계까지 다가가 모든 감각이, 빛마저 소멸하는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으로 진입하려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청력을 극복하여 들리는 소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려 하는 일이다. 믿기 위해서 청력의 여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정말 다른 누군가의 1인칭을 체현할 수 있거나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애쓰는 것이다. “기록해두었기 때문에 기록되고”(「화요일―철거」), “셔터를 누르자 눈이 내리는”(「동화」) 거니까. 감각할 수 없는 것을 믿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감각하는 마음. 변증법적으로 구현된 시차의 패러독스는 이윽고 마음의 시학에 이식된다. 시차의 변증법이 마음의 시학에 접붙은 순간, 우리는 믿을 수 있어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으려 하기 때문에 믿을 수 있게 된다. “있었는지 없었는지, 오로지 리얼의 문제만을 생각하면 나아감이란 없습니다. 없는 것을 있게 만든다, 그것이 모던 걸들이니까요.”10)


*


그러므로 우리의 죄는 너무 늦게 믿어준 것이다. 시인은 “문장에는 순서보다 중요한 것이 많”(「일요일」)으며 “편지를 적어두었기에 편지가 생길”(「존재」)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저 믿어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믿어주지 않았기에 영영 2인칭을 잃어버렸다고, 그래서 너의 모든 가능태를 잃었고,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르지 못해 남은 삶을 기나긴 장례처럼 치르며 살아야 한다11)고 믿는다. ‘그래서’와 ‘그리고’로 연결되는 인과의 사슬 속에서 슬픔 속에 발 딛고 계속 살아가는 것만이 정직한 애도라고 말이다. 어쩌면 조금은 미지근한 춤으로, 오독된 말 없이 서로의 체온만을 감각할 것이다. 얼어붙은 시간의 강 위를 건너는 사람들을 의심하며 미끄러지는 나와 그런 나를 마주 보며 함께 왈츠를 추는 너. 신의 질서를 얼린 곳에서 비로소 너와 나는 춤을 춘다. 신성의 정체는 당‘신성’이다.


그래도 우리가 함께 추고 있는 춤은, 왈츠를 네가 마음에 들어했으면 좋겠다


스텝 스텝 스텝


원을 그리며

스텝을 밟아도


앞으로 나아가지는


강을 건너지는 못할 것이다

_「왈츠」 발췌


시간의 강 위로 마음을 떠내려 보내는 대신, 그것들을 건너서 어딘가에 다다르는 것 대신 ― 시간을 얼려 너와 함께 계속 탑을 돌듯이 기도를 멈추지 않는다면, 이내 네가 마음에 들어 한다면 그걸로 되었다는 시인의 마음. 이런 마음 때문에라도 당신은 신보다 오래 살 것이다. 아니, 살아야만 할 것이다. “필요한 만큼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면, 어디를 가든 슬픔의 공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럴 바에야 오히려 슬픔의 흔적이 가득한 공간에서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살아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다.”12)



신을 몰아낸 자리에 당신의 신전을: 2인칭과 마음의 시학

 

홍지호의 시가 도착한 좌표를 해명해야 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포스트모던 인류학자인 M. 스트래선은 총체적 인식론과 단절을 선언하며 문학적 시선을 인류학에 도입한다. 해설에서 박혜진은 스트래선을 인용하여 “타인의 슬픔에 동참하고 나의 슬픔에 타인을 초대하기 위해 슬픔을 재배치해야” 한다고 밝힌다. 다만 조심스러운 것은 이러한 마음도 오독/전언 되어 우리가 타인에게 허락받지 않은 초대장을 보낸 게 아닐까, 하는 것이다. 연대라는 아름다운 이름과 3인칭이라는 환한 빛에 묻혀서 말이다. 그러니까 ‘나’가 ‘우리’로 전환될 때, ‘너’를 결락한 것이 아닌가. 이러한 시도를 통해 과연 문학의 시차(時差/視差)는 극복될 수 있는가, 하는 새삼스럽고도 찜찜한 질문을 접어둔 채로 말이다.


*


‘나’는 ‘너’를 기억하고 체현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지만, 끝내 눈앞에 재현(Represent)할 수는 없다. 다시 오는 현재(Re-present)는 공허한 바람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돌아오기란 불가능하다. 대신 어제의 슬픔이 켜켜이 퇴적된 지층 위에 건축된 신전처럼, 그저 정직하고 정확하고 겸손하게 ‘너’를 몸에 새긴다. 은유 없이, 끝없이, 그 어떤 수사 없이 말이다. 그러다 보면 복수의 ‘너’가 서 있고, ‘너’에 대한 마음이 다른 종류의 에너지로 전환될지도 모른다. 다만 순서의 망각을 주의해야 한다. 광장에 모여든 뒤에 축제가 벌어지고 촛불이 밝혀져야 한다. 역은 성립해선 안 된다. 축제 속에서 연대라는 찬란하고 따뜻한 이름표를 달고 초대장을 건넬 때, 이름표가 ‘너’를 가리지는 않았는지 돌아보는 일은 원론적이거나 도덕적 강박증에 불과한 것일까. 여전히 ‘마음의 시학’이 유효한 것은 이러한 질문과 맞닿아 있다. 그러므로 무력한 언어와 기도일지는 몰라도 우리는 궁극적으로 전지전능함을 철거한 자리에 서서 오래도록 시간을 적립하며 신전을 쌓아나가야 한다. 


비록 이러한 노정에서 자기연민에 몰입하거나 3인칭을 업고 길게 드리워진 담론의 그늘 아래 눈을 뜨게 될지도 모르지만, 또 모르기에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정직한 2인칭으로 나아가는 길 위로 나서는 것뿐이다. 당장 같은 땅을 딛고 서 있는 ‘너’를 향해서. 그리하여 보름이 그믐이 되어도 이내 다시 보름이 온다고, 설령 너를 잠깐 잊는 날이 있더라도 영영 잊지는 않을 것이라고, 절절한 1인칭과 2인칭을 함부로 3인칭으로 바꿔 말하지도 않겠다고 다짐함으로써 말이다. 


보이지 않는 것도 때때로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달에 가보고 싶다고 했었지

달이 크게 보여도 유독 밝아 다 보이는 거 같아도

골목을 다 걸어야 한다


달에 살자

어떤 빛들이 달의 모양을 바꿔도

문 앞에 섰던 마음은 잊지 말자

우리는 달의 뒷면에 숨어 살자

_「주기」 발췌

        

       

       

1) 이 글에서는 홍지호, 『사람이 기도를 울게 하는 순서』(문학동네, 2020)를 중심으로 다룬다. 이하 인용 시 작품명만 표기한다.

2) “왜 우리 시대는 특별히 ‘마음’을 읽으려고 하는가. 다시 말해, ‘마음을 경유하여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를 논하고 있는데 여전히 왜 ‘마음을 통해 읽으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이 잔여물처럼 남는 것이다.” 김행숙, 「이 계절의 시집에서 주운 열쇠어들 2」 (《문학동네》 2020년 여름호), 533~534쪽

3) 김건형, 「2018 퀴어전사―前史, 戰史, 戰士」 (《문학동네》 2018년 가을호) 참고.

4) 강동호, 「비평의 시간―김봉곤 사건 ‘이후’의 비평」 (《문학과사회》 2020년 가을호), 410~411쪽

5) 조대한, 「나의 응답: 2000년대 시를 경유한 1인칭의 진폭」 (《자음과모음》 2021년 봄호) 참고.

6) 한설, 「어찌됐든 평론가라서」 (《오늘의 문예비평》 2021년 가을호)와 김건형, 「「2020, 퀴어 역학 - 曆學·⼒學·譯學」을 위한 설계 노트 1」 (《문학동네》 2020년 겨울호) 참고.

7) 엄기호,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나무연필, 2018) 참고.

8) 신형철, 발문 「조금 먼저 사는 사람」,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박준, 문학과지성사, 2018) 참고.

9) 이 지점에서 시인은 “나는 생각으로 죄를 짓는 사람”(「씽크홀」)이라며 생각(혹은 가능태)의 무의미성을 부정하고 있는 셈이다. 시인에게 가능했던 과거는 존재했던 과거와 다르지 않다. 

10) 한정현, 「과학 하는 마음―관광하는 모던 걸에 대하여」, 『소녀 연예인 이보나』 (민음사, 2020), 201쪽

11)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14), 99쪽

12) 유병록, 『안간힘』 (미디어창비, 2019), 59쪽

       

      

       

어설프게 썼다. 나의 무능을 알면서 썼던 글이다.


홍지호의 <사람이 기도를 울게 하는 순서>라는 시집을 감명 깊게 읽었고 내 마음을 설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감정이나 직관에 논리를 구축해, 설득하는 작업은 젤리를 쌓아 자동차를 만드는 일 같았다.


도무지 손에 잡히지도 않았고, 요령부득의 세계 속에서 남들의 씽씽 달리는 자동차를 보며 침만 삼켰다.


여전히 이론을 주물러 감정을 규명하는 비평의 세계란 아름답고, 납득불가능하다.


요는 부끄러운 글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자기 이름을 검색하다 내 글을 한 줄이라도 봐준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이상 비평을 쓰고 싶다며 노력하는 일은 없기에, 오로지 팬심으로 남기는 기나긴 리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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