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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글로제이 Aug 12. 2018

전기, 또 나갔어?

  이로써 에콰도르에 온 지 2달이 안된 사이에 네 번째 전기가 나갔다. 처음 이사를 하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정전으로 꼬박 20시간의 정전 후에 전기가 들어왔고,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를 와서 이번이 세 번째다. 첫 번째는 집주인이 밀린 전기세를 내지 않아서 전기가 끊겼는데, 한국과 다르게 에콰도르는 전력 회사 직원이 출동(?)해서 전기를 끊고 연결하는 일을 직접 해줘야 한다. 주인과 연락이 잘 안 되고 전기세 지불이 늦어지고 전력회사의 늦은 대응으로 꼬박 2박 3일을 전기 없이 지낸 후에야 냉장고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물론 냉동고와 냉장고 안에 있는 대부분의 음식을 버려야 했지만. 다 녹아서 먹지 못하게 된 냉동식품들을 버리면서 속으로 얼마나 짜증이 났는지…… 아무리 "오늘도 행복하겠어!"를 매일 아침 주문처럼 외워도 전기 없는 48시간은 나의 행복에 대한 다짐을 의심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전기가 끊기자 나는 더 많은 글을 읽고 썼다. SNS에 글을 올리거나 '좋아요'를 확인하던 시간에 아이패드에 담아놓은 책을 읽었고, 넷플릭스를 틀어놓고 멍 때 리던 시간에 책을 읽은 느낌을 바탕으로 글을 썼다. 온종일 요리를 하거나 집안 청소를 하면서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던 하루가 그렇게 길 수가 없었다. (인덕션 레인지를 쓰기 때문에 전기가 나가면 요리도 할 수 없다.) 그리고 저녁에는 촛불을 켜고 짝꿍과 뜻하지 않은 로맨틱한 시간을 보냈다. 항상 집에 오면 서로 핸드폰을 붙잡고 각자 인터넷 삼매경에 빠져 시간을 보내는데 전기가 나가니 서로 얼굴을 보면서 얘기를 하는 것 밖에 할 일이 없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오늘 무슨 책을 읽었는지 얘기하면서 뜻밖의 건설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그 불편하고 느린 하루가 덧없이 흘러가던 그 어느 날 보다 충만하고 알찼다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다음 정전은 전열기 과다사용으로 일어났다. 전혀 예상치도 못하게 오븐을 40분 정도 사용했을 뿐인데 전기가 나갔다. 또 한 번 황당, 당황, 어이상실. 에콰도르에서 판매되는 대부분의 가스 또는 인덕션 레인지들은 오븐과 한 세트로 만들어져 나온다. 그래서 나는 쓰라고 만들어 놨는 줄 알았는데. 그건 그저 장식품일 뿐. 일반 가정에서는 오븐을 요리에 거의 쓰지 않는단다. 오븐이 딸린 레인지를 파는 이유는 대부분 그 초기 모델이 미국산이기 때문에 다들 그러려니 하고 판매하고 구매한다고. 전열기를 조금만 오래 쓰면 전기가 나간다. 갑자기 많은 전력을 요구하니까 평소에 안 하던 운동을 갑자기 하고 쥐가 나는 것처럼 전기도 쥐가 난 것이다. 물론 이번에는 30분 정도 있다가 다시 전기가 들어왔다. 하지만 그 이후 오븐요리는 자주 하지 않는다. 또 전기가 나가면 오븐 요리를 못 먹는 게 문제가 아니라 또 냉동고 청소를 해야 할까 봐.


  그러면서 깨달았다. 한국에서는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여러 편리하고 막힘없는 공공재, 서비스들이 얼마나 소중했었는지. 값싸고 편리한 전기,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어디든 이어져 있는 대중교통, 어딜 가나 친절한 서비스 등. 전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처럼 여러모로 선진화되어 있는 나라는 많지 않다는 걸 에콰도르에 와서 새삼 뼈저리게 깨닫는다. 어느 노래 구절에서 그러던가, 소중한 것은 떠났을 때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된다고. 한국에서야 한여름 열대야가 피크에 치달아서 온 국민의 에어컨 과다 사용을 해야만 전력 부족으로 인한 정전 가능성을 뉴스에서 들을 수 있었는데. 이거야 원, 오븐 40분 썼다고 전기가 나가다니. 40시간도 아니고 40분인데.


  오늘 정전의 이유는 뭘까. 오븐을 쓰지도 않았고. 다른 전열기(라고 해봐야 헤어드라이기?)도 쓰지 않았는데. 난 그저 음악을 틀어놨을 뿐이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우리 집만 전기가 나간 게 아닐지도 몰라. 용기를 내서 옆집 문을 두드렸다. "안녕하세요. 실례합니다. 혹시 전기 있나요?" 이상하게 들리지만, 정말 이렇게 물었다. 짝꿍이 알려 준 문장 그대로. Tiene luz? (전기 있나요?) 이렇게 이사온지 이주만에 처음으로 이웃집에 인사를 하게 될 줄이야. 얼떨결에 인사했다. 옆집에 사냐고 물어보는 것 같아서 씩씩하게 "네" 하고 대답하고 그간 외워놨던 짧은 스페인어로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제이미입니다." 그러자 친절한 이웃집 아저씨, 본인은 에드왈도라면서 단번에 한국사람이냐고 물어보신다. 에콰도르에는 아시아계 외국인들이 많지 않다. 드물게 한두 명 본다고 해도 대부분 중국인이기 때문에 거리에 나가면 거의 중국인으로 오해를 받는다. 그런데 첫눈에 한국인이라고 알아본 이웃집 에드왈도 아저씨. 느낌이 좋다. 좋은 이웃이 되겠는걸.  


  잃은 건 전기 하나뿐인데 너무 많을 걸 얻었다.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당연히 여기는 많은 것들이 내 삶에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지. 있을 때 잘하자. 책도 더 읽고. 글도 더 쓰고. 넷플릭스는 멀리하고. 전기야 언제든 다시 들어오겠지만 이 또한 에콰도르에 와서 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일 테니까. 지금껏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수많은 시간과 공간들이 이 시간을 통해 조금 더 특별해졌으니 정전도 그리 나쁘진 않다. 가지고 있다는 걸 깨달아서 특별한 게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이 특별하다는 걸 깨달아서 가지고 있는 게 더 소중하 다는걸. 그리고 무언갈 잃어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걸. 어쩌면 가끔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내 삶을 더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오늘 당신의 삶은 특별하게 만드는 건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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