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과수원에 갔을 때 비니시오(Vinicio)라는 짝꿍의 사촌 한 명이 다음 주말에 외삼촌의 깜짝 생일파티를 열 거라고 살짝 귀띔해주었습니다. 본인 집에서 하니까 와서 집 구경도 하고 에콰도르 파티도 경험해 보라고. 생신이라기에 선물을 뭘 준비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15년 만에 초상화를 그리기로 했습니다. 뭔갈 사서 드리는 것보다 뜻깊은 선물이 될 것 같았지요.
사실 어릴 적 제 꿈은 화가였습니다. 그 당시는 디자인이나 그런 건 모르고 그저 그림이 좋아서 화가가 되고 싶었죠. 어려운 집안 살림에 미술학원에 갈 형편이 안되는데도 엄마를 졸라서 가정집에서 하는 화실에도 잠깐 다녔었습니다. 그땐 제 학원비를 대기 위해서 엄마가 우유배달이며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했었다는 걸 몰랐었죠. 제가 다 크고 나서야 그게 제 학원비 때문이었다고 말해주시더라고요. 지금도 생각하면 너무 죄송하고 눈물이 찡하네요. 암튼 그렇게 엄마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는데 미대에 못 갔습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지례 겁을 먹고 포기했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때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여기도 복잡한 사연이 있는데 이 얘기도 다음에 자세히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하튼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과외활동으로 미술부에 들었습니다. 그때 만난 미술 선생님 Mrs.DeBaylo는 저에게 미술 분야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으로 도움을 주시고 조언을 해 주셨습니다. 아직도 페이스북으로 가끔 안부를 묻곤 합니다. 미국에 있는 미대에 가고 싶어서 주립 대회에 나가서 상도 타도 열심히 활동을 했는데 막상 대학교를 물색하기 시작하는 11학년 말에 뉴욕주에서 미대 진학 희망생들을 위해 개최한 미대 오픈 캠퍼스에 방문했다가 좌절하고 말았습니다. 다른 친구들의 그림을 슬쩍 훔쳐보았는데 상력이 너무 대단하고 창의적이라 기가 죽었던 거죠. 그래서 미술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때마침 온 가족이 불법체류자 신분이 되었습니다. 우리 가족의 비자 문제를 담당하던 변호사가 돈만 받고 전혀 일을 안 했다고 합니다. 그땐 그런 일이 빈번했습니다. 불법체류자가 되니 어디 가서 항의할 길도 없고요.
그래서 전 대학을 포기했습니다.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간호사가 되면 영주권을 빨리 받을 수 있다기에 가족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2년제 주립대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영주권 문제로 간호사 자격증 취득 과정을 수강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미술이라는 영역과 점점 멀어졌습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일반 대학교를 다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미술을 아예 잊고 살았습니다. 내가 그림이란 걸 그린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차단하고 살았죠. 사는 게 팍팍하고 여유가 없어서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15년 이상을 미술과 담쌓고 살다가 에콰도르에 와서 처음으로 연필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페드로 삼촌의 사진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흰 공간을 채워갔습니다. 사실 '못 그리면 어쩌지. 맘에 안들 수도 있는데' 등 과거의 나를 옥죄었던 생각들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냥 무시하려고 노력했죠. 최근 읽은 책 '하마터면 열심히 살뻔했다.'의 저자 하완 씨가 그러더군요. 하마터면 열심히 살뻔했다고 ㅎㅎㅎㅎ 언젠가 한국에 나가면 꼭 가서 사인을 받고 싶은 분입니다. 다들 생각만 하지 실천으로 옮기는 사람들은 많이 않은데 과감히. 용감히. 실천으로 옮기고 출판으로 저의 영웅이 되었죠. 사실 제 자신도 저의 영웅 중 한 사람입니다. 오랜 시간 어떻게 하면 가장 나답게 살 수 있을까,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일까 고민해왔고 그 삶을 위해서 맨땅에 헤딩을 수도 없이 했거든요. 죽을 때까지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고민하며 살기로 다짐하고 그 다짐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전 제 자신이 매우 자랑스럽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좋은 삶, 좋은 사람, 완벽한 커리어가 아니라 오늘 하루 만족한 하루를 살았는지가 제 삶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었거든요. 지금까지 잘하고 있습니다.
사진을 보고 그렸는데 솔직히 아주 잘 그린 그림이라고 하긴 힘듭니다. 그래도 15년 만에 처음 그린 그림치곤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아뇨. 훌륭합니다. 앞으로 그림을 자주 그려야겠어요.
한국에서는 사실 가족, 친척들과의 교류가 많지 않았습니다. 한국 문화가 핵가족의 정점을 달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언젠가부터인가 우리 가족의 교류가 부쩍 줄었습니다. 제가 공부를 오래 하면서 스스로를 고립시켰던 것도 있고, 서로들 일상이 바쁘고 피곤하니 자연스럽게 만나는 횟수가 줄었죠.
하지만 항상 그랬던 건 아닙니다. 초등학교 시절만 해도 여름방학 때마다 조부모님 삼촌댁과 함께 강원도로 캠핑을 다니곤 했습니다. 아직도 캠핑 가던 어느 날 깜깜한 밤에 아빠가 갑자기 운전하던 차의 시동을 끄고 온 가족을 놀라게 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장난이었지만 그땐 달빛밖에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에 정적이 흐르고 늑대 울음소리(?)까지 들리니 여간 무서웠던 게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는 소중한 추억 중 하나입니다. 이렇게 제 가족도 함께한 좋은 추억들이 있습니다. 에콰도르에 와서 (새) 가족들과 또 다른 추억을 쌓아가다 보니 마치 제 어린 시절로 시간여행을 온 기분입니다. 매주마다 친척들과 만나서 같이 저녁을 해 먹고 농구도 하고, 깜짝 생일파티로 가슴 뭉클한 순간을 나누기도 합니다. 서툰 그림에도 고마워해 주고, 함께 춤추고, 행복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 순간들을 함께 행복하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행복하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