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수원도 식후경 (2)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아보카도도 아니고 레몬도 아닙니다. 심지어 옆집에서 서리해 온 오렌지도 아니지요. 그 주인공은 바로 꽃게탕입니다. 사실 이걸 꽃게탕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고민을 좀 했습니다. 꽃게란 건 수많은 게의 가문 중 한 종류일 뿐이고, 한국에서 탕을 끓일 때 사용하는 게의 일종이지 우리가 먹은 에콰도르 게가 꽃게는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냥 '게탕'이라고 부르자니 뭔가 허전하고 어색한 겁니다. 영어로 crab soup이라고 해도 나쁘진 않지만 은근슬쩍 영어를 던지고 가자니 내키지 않고. 그래서 그냥 꽃게탕으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이 녀석들 아주 토실토실합니다. 한국의 꽃게보다는 좀 크고 색이 더 진합니다. 그리고 게딱지가 조금 더 움푹합니다. 생게 열두 마리에 20불 정도 한다고 하니 확실히 한국보다 저렴합니다. 이날은 12마리짜리 게를 4 손이나 끓였습니다. 거의 50마리에 가깝죠. 다 익은 게는 건져내고 그 국물에 플랜테인(Plantain: 요리용 바나나)과 유카(Yuca: 중남미에서 주식으로 많이 먹는 마와 비슷하게 생긴 뿌리 식물) 그리고 각종 해산물을 넣어서 다시 한번 끓입니다. 에콰도르가 유명한 게 있다면 바나나, 장미 그리고 해산물이 있습니다. 저도 여기 와서 알게 된 사실인데, 에콰도르가 적도 국가이다 보니 해산물이 많이 나고 크기가 크다고 합니다. 그래서 에콰도르산 새우는 크고 맛있기도 유명해서 대부분 미국으로 수출된다고 하네요. 그래서 그런지 게도 새우도 살이 오동통하고 쫀득한 게 식감이 살아 있습니다.
이제 완성된 게탕을 먹을 시간입니다. 얼마나 기다렸는지요. 제가 주인공이라고 가장 먼저 한 그릇 퍼 주셨습니다. 사실 에콰도르에선 한국처럼 어른들이 먼저 식사를 시작해야 젊은 사람들이 그다음에 먹고 하는 그런 문화는 없습니다. 그냥 먼저 받은 사람이 먼저 먹는 거죠. 그런데 전 한국 사람이라고 또 그게 불편하네요. 다들 한 그릇씩 받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대장이신 외삼촌이 한 술 뜨시고 나서야 폭풍흡입을 시작했습니다. 이날 한 사람당 한 마리씩 게를 받아서 여기저기서 나누어 앉아서 야무지게 게를 부수고 쪽쪽 빨아가며 게를 먹었습니다. 아….
지금 생각해도 침샘이 자극되네요. 배가 고파옵니다. 여하튼 제 평생 이렇게 맛있는 게탕은 처음이었습니다. 가리는 음식은 없지만 해산물을 싱싱하지 않으면 잘 안 먹습니다. 비린맛이 싫어서요. 그런데 이번에는 정만 레전드 급이었습니다. 전혀 비린내도 나지 않고 먹으면 먹을수록 감칠맛이 나고. 게 살이 통통하게 꽉 차있어서 수저를 망치 삼아 게다리 하나하나 남기지 않고 부셔서 살을 발라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국물은 또 얼마나 구수하고 진한지요. 온갖 해산물의 바다 기운과 플랜테인, 유카의 산정기가 하나로 뭉쳐 저 드래곤볼을 만들어 끓였다면 이런 맛일까요. 유카에 스며든 적당히 짭짤한 해산물 국물이 입에 들어가면 그 육즙을 쫘악 뱉어냅니다. 유카가 살짝 감칠맛이 나는 감자 같다면, 플랜테인은 쫀득한 고구마 구이 같습니다. 환상의 궁합이죠. 거기에 토실한 새우와 오징어가 매 술마다 등장하고, 맛을 들인 사람만 알 수 있다는 고수의 향긋함이 우러나 있습니다. 아무래도 전 음식 리뷰 블로거를 했어야 했던 것 같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땐 어찌나 행복한지…… 진짜 맛있는 음식을 입에 넣으면 나도 모르게 어깨춤을 추고 있습니다. 정말 말 그대로 어깨를 들썩들썩 없는 리듬에 맞춰 흔들흔들. 아쉬운 건 내가 만든 음식을 먹고 그런 춤을 춰본 적은 한 번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언젠가 맛있는 컵케이크와 디저트를 파는 카페를 차리고 싶었는데 그건 홈카페로 만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깨춤이 절로 나는 게탕을 먹고, 한 마리로는 성이 안차 총 네 마리의 게를 야무지게 발라먹었습니다. 배가 너무 불러서 약간 속이 메슥거리는 기분 아시나요? 오버해서 딱 기분 좋은 상태는 이미 벗어나 버렸습니다. 그래도 어떡하나요. 더 먹고 싶은걸. 아마 소화만 할 수 있었다면 게 두 마리는 더 먹을 수 있었을 텐데…… 지금도 생각하면서 입맛을 다십니다.
꽃게탕이 끓여지는 동안 저와 짝꿍은 이미 한 포대 가득 레몬과 아보카도를 땄습니다. 높지는 않지만 아보카도 나무에 올라가서 있는 힘껏 가지를 당겨 다 큰 녀석들만 골라 땄죠. 아보카도는 나무에서 물러지면 이미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크기가 다 자라면 딱딱한 녀석들을 따서 실온에 보관했다가 익혀 먹습니다. 그 녀석들. 어찌나 크고 먹음직하던지. 한국에서 보던 고사리 손등만 한 아보카도가 아닙니다. 제 크디큰 손바닥을 다 채울만한 크기입니다. 이걸 밥에도 비벼먹고 롤도 만들어 먹고 샐러드도 해 먹고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바쁘네요. 전 한국에서도 외국 요리 사이트나 블로그에 올라온 레시피들을 보고 요리를 해보는 걸 좋아했습니다. 물론 대부분 한국에서 구하기 힘들거나 비싼 재료들이 많아서 원하는 요리를 마음껀 해보는 게 소원이었죠. 그런데 에콰도르 큰 마트에 가면 웬만한 재료들이 다 있습니다. 요즘은 비건 요리에 빠져서 더 구하기 힘든 재료들을 구하느라 짝꿍을 달달 볶긴 하지만, 그래도 찾으면 다 있네요. 이런 것도 저에겐 에콰도르의 매력입니다. 식료품이 저렴하고 제 스타일에 맞는 재료들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레몬으로는 뭘 만들까요. 사실 한국에서는 레몬이 식재료에 많이 사용되진 않습니다. 한국 음식 중에 신 음식이 별로 없잖아요. 그런데 남미 음식에는 레몬이나 라임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냥 과일청이나 잼만 만드는 게 아니라 수프나 샐러드에 많이 넣어 먹습니다. 신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저도 에콰도르에 와서 거의 하루에 1~2개의 레몬을 먹는 것 같습니다. 물에 타 먹고 수프에 짜 먹고. 하지만 이날 딴 레몬은 하루에 한두 개씩 먹어도 두 달 이상은 먹을 양입니다. 이걸로 뭘 만들지. 궁리해봐야겠습니다.
신나게 과일도 따고 게탕도 배가 늘어지게 먹었더니 벌써 시계가 오후 5시를 향해 갑니다. 여기 와서 매일 느끼는 사실 중 하나는 시간이 참 빨리 지나간다는 겁니다. 매일 만들고 싶었던 요리 하나씩 해보고, 레시피 찾아다니고, 스페인어 공부하고, 글 쓰고 하다 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갑니다. 참 감사하지요. 아직까지는 하루 종일 혼자 있는 시간이 아주 좋습니다. 한국에서는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보다 어떻게 살아야 성공한 삶인지에 대한 고민을 주로 했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도착한 결론들은 거의 돈을 열심히 벌어야 여유롭게 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정해져 있는 답이었는데 왜 새삼스럽게 고민을 하냐는 듯 말이죠. 하지만 여기서는 어떻게 하면 더 나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물론 저도 지극히 한국사람인지라 한국적 의식의 흐름을 따라갈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익숙한 길이 아닌 원하는 길을 걷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더 나답게, 천천히 그리고 매 순간을 감사하면서 말이죠. 이렇게 에콰도르의 즐거운 주말이 지나갑니다. 내가 불편하지 않도록 항상 배려해주고 괜찮냐고 물어봐주는,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된 이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