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토에는 일요일마다 자전거 전용 도로가 생긴다. 시클로 파세오(Ciclopaseo)라고 부르는 이 프로젝트는 키토 도심 곳곳의 공원과 주요 명소를 지나 남북을 가로지르는 30km 정도의 도로를 막아 자전거 및 보행자가 이용할 수 있도록 매주 일요일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 시행된다. 몇 주째 벼르고 벼르다 지난주에 자전거 수리를 마치고 어제 비로소 자전거 행렬에 참여했다. 정오가 되면 햇빛이 너무 강할 것 같아 아침 일찍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8시가 되자마자 물과 간단한 과일을 챙겨 길을 나섰다. 짝꿍은 나에게 너무 무리하지 말고 언제든 돌아가고 싶으면 얘기하라고 당부를 했다. 물론 나도 그럴 생각이었지만, 어째서 누군가 나를 챙겨주는 이 말 한마디가 이리 달콤한지. 슬쩍 눈을 흘기며 "나 생각보다 더 약골이야, 알지? 중간에 쓰러지면 꼭 엎고 와야 해?" 라며 엄살을 피워본다.
자전거를 타고 짝꿍 회사 근처를 지나 유명한 파네시요 성모상이 있는 센트랄을 지나면 바로 키토 남쪽 지역으로 이어진다. 캐롤리나 공원, 에히도 공원을 가로질러 센트럴에 있는 키토 역사 센터를 지나는데 평소에 그렇게나 많던 차가 하나도 없으니 기분이 묘하면서도 짜릿했다.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그렇게 멀게 느껴지던 센트럴에 도착. 키토의 지형 자체가 워낙 산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언덕을 오르내리는 일은 각오했으나, 한 시간이 지나자 나의 허약한 다리가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만 가라고. 집에 어떻게 갈 거냐며.
서쪽 지역으로 넘어가는 지점에 있는 성당 앞 공원에서 잠시 쉬었다 돌아가기로 했다. 첫 도전 치고는 꽤 멀리 왔다고 자부하면서 짝꿍한테 은근슬쩍 자랑도 한번 해 본다. "우리 생각보다 멀리 오지 않았어? 중간도 못 갈 줄 알았는데 벌써 중간은 지났잖아. 이쯤에서 돌아가야 다음에 또 타고 싶을 것 같아. 다음 주에 쓸 힘은 남겨놔야지." 잠시 앉아서 숨을 돌리고 집에서 싸온 귤도 까먹고. 돌아가는 길에는 천천히 느긋하게 무심히 지나쳐온 공원 구경도 할 생각이다.
시클로파세오 프로젝트는 비시아씨온(Biciaccion)이라는 단체에서 처음 시작했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자체적으로 루트 중간중간에 봉사원들이 길을 관리하고 안내했는데 그 이후에는 시클로폴리스(Ciclopolis,자전거경찰)가 관리를 하다 2017년 이후부터는 키토 교통부에서 도맡아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특이한 점은 자전거 도로가 주요 공원과 관광명소들을 가로질러 나 있고, 키토의 남과 북의 극명한 차이를 극적으로 느낄 수 있게끔 짜여 있다는 것이다. 도시의 남과 북은 마치 한국의 분단처럼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남과 북이 반대라는 점만 빼고.
도시 북쪽 지역은 상업 중심지로 은행과 각종 다국적 기업들의 본부가 밀집되어 있다. 아무래도 큰 건물들과 쇼핑몰이 많고 도로와 공원들도 비교적 깨끗하다. 센트럴을 지나 도시 남쪽으로 진입하면 급격하게 거리에 그라피티가 많아진다. 예술이라고 봐야 할 만큼 섬세한 것도 있지만 많은 경우 지저분한 담벼락 낙서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길거리 쓰레기도 많고 유랑하는 개들도 확연히 많다.
에콰도르 사람들은 애완견을 많이 키우는데 남쪽에서는 대부분 밖에 풀어놓고 키운다. 그래서 길거리에 자유롭게 활보하는 개들을 많이. 아주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니 길에 견 변이 많은 것이 당연할 수밖에. 그리고 도로변에서 물건이나 과일을 판매하는 사람들도 아주 많다. 한국에서도 막히는 고속도로에서 가끔 뻥튀기 장사를 볼 수 있는데, 키토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어디서 건 만날 수 있다. 사과, 귤, 오렌지 같은 과일을 파는 사람들도 있고, 즉석에서 짠 오렌지 주스나 스포츠 음료를 파는 사람도 있다. 남미에서 많이 먹는 엔파냐다(고기나 치즈로 속을 채운 파이)를 파는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 독한 술과 토치를 들고 불쇼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에콰도르로 이사 오기 전에 2주 정도 여행을 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진짜 도시의 얼굴은 보지 못하고 이쁘고 아름다운 모습만 담아 갔었다. 여행이 다 그렇지 뭐. 내가 사는 도시인 키토는 여행에서 본 키토와 많이 다르다. 여행과 현실의 차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여행도 현실도 어떤 관점으로 사물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감동을 줄 수도 실망을 할 수도 있다. 내가 만난 현실의 키토는 여행으로써의 키토와 많이 다르지만, 내가 가진 눈은 여행으로 즐겼던 키토과 현실의 키토를 또한 다르게 보고 있는 것 같다. 처음 키토에 이사 왔을 때는 한국에서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부재로 인한 불편함에 불평이 많았다. 2달이 채 되지 않은 지금, 내 눈은, 내 마음은 여행에서 봤던 키토보다 더 영롱한 내면의 진주를 발견하고 있다. 시클로파세오도 그런 진주였다. 알록달록한 무지갯빛 진주.
자전거를 타고 달리니 도시 마디마디 언덕 하나하나 담벼락 색색깔이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 도시의 곳곳이 너무도 사랑스럽게 보인다. 아, 나 또 이렇게 키토의 매력에 빠져드는 건가. 도시 센트럴 꼭대기에 도착했을 때 들렸던 에콰도르 정통 음악과 레게 음악의 어색한 불협화음마저 너무도 푸르른 하늘과 손에 닿을 듯 떠있는 구름에 취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듯했다. 이게 키토의 매력이구나. 어느 것 하나 고칠 것 없이 완벽한 하늘과 푸른 자연을 가진 곳. 그 자연 모습 그대로를 숨김없이, 가감 없이 사랑하는 도시. 삶을 사랑하는 나라 에콰도르에서 오늘도 삶, 사랑을 배운다. 눈으로 마음으로, 얼굴에 스치는 바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