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제주의 바람은 거셌고 우리는 그곳에서 '즐거운 실험'을 했다. 한남동 본사는 멀었다. 바다를 건너는 대신 전파를 띄웠다. 줌이나 구글밋이 세상에 없던 시절, 우리는 화상으로 대면했다.
화상회의는 방송이다. 말과 말이 공중에서 부딪히면 오디오는 엉킨다. 엉키면 뜻은 죽고 소음만 남는다. 그것은 사고다. 그러므로 기다려야 한다. 상대의 말소리가 완전히 끊어지는 지점까지 침묵으로 버텨야 한다. 이것은 물리적인 룰이다.
그러나 인간의 혀는 조급하고, 귀는 닫혀 있다. 듣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자들은 타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신의 말을 뱉으려 안달한다. 나는 룰을 세웠다. 앞사람의 말을 요약한 뒤에야 자신의 입을 열 수 있게 했다. 회사 회의에서도, 내 어린 아들의 독서 모임에서도 그리했다.
앞사람의 말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듣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내 안의 아집을 비워내고 그 빈터에 타인을 들이는 일이다. 귀를 연다는 것은 나를 비우는 고된 노동이다. 그 노동을 통과해야 비로소 말은 소통이 된다.
회의 자료는 사전에 읽고 와야 한다. 만나서 종이를 넘기는 것은 직무유기다. 회의는 읽는 자리가 아니라, 결정하는 자리다. 이미 공유된 활자를 다시 읊는 것은 생명을 갉아먹는 시간의 낭비다.
리더는 문서를 들추어 지적질하는 것으로 자신의 권위를 세워서는 안 된다. 아픈 곳을 찔러 피를 보는 것은 하수다. 진정한 고수는 부족한 틈을 메워준다. 지적이 아니라 보완이다. 상대를 베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키우는 것이다.
진정한 리더는 사람의 지능과 역량을 곱절로 증폭시키는 사람이다. 당신이 리더라면 입을 닫고 귀를 열어라. 경청은 태도가 아니라, 조직을 살리는 생존의 기술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추신.
경청하는 법은 내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도서 《멀티플라이어(리즈 와이즈먼, 그렉 맥커운 저)》에서 배웠다.
#경청 #리더십 #멀티플라이어 #회의문화 #소통 #조직성장 #지적대신조언 #일하는방식 #화상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