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도시 일기 1

by 김영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다른 날과 다를 바 없는 오후의 서점이었다. 서점은 나른한 소음들과 희미한 종이냄새가 안개처럼 자욱하고, 빼곡히 쌓인 책들이 새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듯 눈을 치뜨고 있었다.


얼마 후, 단정한 이마, 외꺼풀의 갸름한 눈매에 맑고 또렷한 검은 눈동자, 균형이 맞은 콧대와 코끝, 실수 없이 한 번에 칠해진 듯한 립스틱의 그녀가 걸어온다. 책의 장벽을 지그재그로 피하며 온갖 종류의 소설들이 두줄로 빽빽이 늘어선 서가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지나치는 서가의 책들은 갖가지 색의 책등을 보이며 그녀를 유혹한다. 추측건대, 읽었던 책과 읽지 않은 책과 읽은 듯해 보이는 책과 읽을 필요가 없는 책과 읽었지만 다시 읽고 싶은 책들 중 하나일 거다.


이봐요, 멋진 아가씨, 어디를 가는 거야? 이 책 한번 읽어보지, 그래. 이 책은 말이야,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인간이 무심코 내뱉은 농담 한마디가 순식간에 인생을 바꾸어버린 이야기야. 그 이야기보다는, 내 이야기가 더 매력적일 거야. 장래가 촉망되던 학생이 자살을 하는데 아무도 그가 자살을 왜 했는지 모르는 가운데 사십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그의 친구가 무심코 보낸 한 통의 편지가 엄청난 파국을 일으켰음이 밝혀지는 마지막 반전이 놀라운 이야기야. 그것도 흥미롭겠지만 내 이야기 좀 들어봐. 어느 무더운 여름날 오후, 감수성이 풍부한 어느 소녀의 오해가 젊은 연인들의 비극을 불러오고, 이를 되돌리려고 60년에 걸쳐 속죄하는 소설가의 이야기는 처음 들어볼 거야. 그것보다 더 기이한 이야기가 있어. 태평양 한가운데서 배가 침몰하여 사랑하는 가족을 모두 잃고, 구명보트에서 호랑이와 함께하는 227일간의 표류기는 어때? 모험이라면 내 책도 빠질 수 없지. 화성에서 오롯이 혼자 남은 최초의 인간이야기야. 감자를 심으며 살아남은 화성판 어드벤처 생존기야. 그런 모험도 좋겠지만 서양문학의 근원이자 가장 오래된 서사시는 어때? 전쟁에서 승리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고난을 겪는 이야기이지. 고전 중에 고전이라고 할 수 있어. 유행만 따라가는 요즘 소설이랑은 다르지. 여보시오, 젊은이, 내 책도 모험과 관련되어 있지만 좀 달라. 항해 중에 적에게 납치되어 도착한 곳에 외모뿐만이 아니라 지식이나 관심사가 같은 사람을 만나면서, 나는 왜 나인가를 고민하는 이야기야. 만약, 그런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면 내 얘기도 관심이 생길 거야. 미래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운명론과 자유의지를 다룬 소설이지. 여봐요, 당신이 소설께나 읽었다면 이런 소설도 괜찮을 거야. 머릿속에 무심코 떠오르는 정돈되지 않은 생각이나 기억, 꿈과 느낌을 있는 그대로 적은 소설인데 과거 속 잃어버린 시간과 감각을 일깨워 사물, 사람, 풍경등을 세밀하게 묘사한 이야기인데 색다른 재미가 있을 거야. 그런 것도 나름 의미가 있지만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려면 추리소설을 읽어야 돼. 여러 소설에서 쓰는 기법이지. 제대로 된 추리소설은 단어하나 문장하나에도 의미가 담겨있어. 어느 것도 낭비되지 않아 끝까지 읽지 않고는 못 배기는 소설이야. 사소하고 하찮게 여겨졌던 것들이.. 내 말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곁눈질은 왜 하는 거야. 내 책은 어느 한 부분도 소홀히 할 수가 없는 소설이란 말이야.


그녀의 시선이 서가의 한 부분에 모인다. 서가의 책등을 살피고 책 한 권을 빼든다. 책을 빼내는 능숙한 손놀림, 주저함이 없는 자연스러움. 하얀 팔뚝을 움직여 왼손으로 좁고 긴 책을 꼽아 눈높이에 두고 겉표지를 살핀다. 표지그림은 '프랑시스 피카비아'의 '열대'라는 작품이다. 그림 속 연인은 괴기스러우며 우스꽝스럽게 부둥켜안고 키스를 하려고 한다. 여자의 손은 남자를 끌어당기지만 여러 개의 눈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하고 입속에는 또 하나의 입이 있고, 남자의 코는 비정상적으로 크고 눈도 세로로 돌아갔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하얀 벽에 빨간 지붕의 집도 있다. 기성 예술의 규범과 관습을 무시하고 변화를 시도하는 듯하다. 표지색깔도 그림톤에 맞추었다. 책의 표지가 이야기의 줄거리와 컨셉이 맞다면 서로 엇갈리는 사랑이야기쯤 될 거 같다. 그녀는 안쪽으로 접힌 날개 부분을 훑어보고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다가 다시 책을 제자리에 꼽는다. 너무나 많은 책들 속에서 선택을 주저하는 듯하다. 그녀의 모습에 안심한 듯, 주변의 책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다시 말한다. 그래, 잘 생각했어, 방금 그 책은 분량이 너무 많은 데다가 철학적인 얘기로 시작해서 진입장벽이 있어, 그 책보다는 내 책이 분량도 적당하고, 손을 놓을 수 없는 짜릿한 내용뿐 아니라 구조적으로 아름다운 소설이야. 내 책도 사람을 이야기에 꽁꽁 붙들어 놓는 이야기지, 한창 때는 베스트셀러였고 지금도 중쇄를 거듭하고 있어. 아마 초판 가격은 어마어마할 거야.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이때다 싶게 옆 친구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현명한 아가씨, 생각 잘했어. 내 책은 죄는 무엇이고 벌은 어떻게 해야 하고 용서와 화해는 누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얘기야. 비록 두 권으로 되어 있지만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마치 자전거를 타듯 스르르 미끄러지며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 거야. 그녀는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한 듯, 아니면 듣고도 모른 체하는지, 옆 친구로 시선을 돌린다. 그 친구는 그녀의 시선에 수줍은 듯 말이 없다. 그녀는 그 책을 집어 든다. 표지는 '에곤 쉴레'의 '꽈리열매가 있는 자화상'이다. 머리와 가슴을 화면밖으로 과감히 밀어내고, 움츠리고 있는 인간뒤로 빨갛게 익은 꽈리와 쪼글쪼글해진 갈색의 껍질이 있다. 오른쪽 어깨의 선은 도드라진 턱뼈와 연결이 되고, 머리는 오른쪽으로 향해 있지만 그의 눈은 왼쪽을 바라보고 있다. 붉은 눈동자는 불안한 듯 우울해 보이고, 엷은 갈색과 푸른색과 보라색 컬러의 풍부한 뉘앙스의 피부는 문지른 듯하고, 검은색 옷은 생채기를 내듯 긁어댔다. 그녀는 책의 첫 문장을 조심스럽게 읽는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라고 시작된다. 그녀는 목을 살짝 비틀며 의아해한다. 부끄러운 인생이 궁금한 듯 조금 더 읽고는 책을 옆구리에 낀다. 그 부끄럼 많은 친구와는 한 두 마디 말밖에 건네지 못했지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잘 가게 수줍은 친구', '고마워, 모두들 잘 있어.' 그녀는 다시 매장 중심의 신간코너로 발걸음을 옮긴다.


선택받지 못한 것에 실망한 쩌렁쩌렁한 목소리의 친구가 말을 건넨다. 자네는 왜 말 한마디도 안 하고 있나, 자네의 이야기가 남들한테 내세울 게 없어선가. 그런 건 아니라네. 이제는 이곳 환경에 완전히 적응한 거라네. 내 소설은 재미없는 소설이 전혀 아니라네. 굳이 내 소개를 하자면, 한 때는 내 제목 앞에 지나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호기심 어린 시선들을 모았다네. 나는 누구 앞에서도 당당한 자신감이 넘쳤다네. 스스로가 그렇게 자랑스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을 거야. 이렇게 말하니, 내용이 궁금해 할거 같네. 시대적 배경은 나풀레옹이 몰락한 이후에 스무 살 소년이 계급을 뛰어넘어 출세의 정점에서 급전직하하는 사랑과 야망의 이야기인데 사실적인 묘사와 인물들의 복잡한 심리묘사가 탁월한 작품이라네. 여기에 있는 다른 책들처럼 내 작품도 어떤 소설과 견주어보아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라네. 나도 누군가의 시선을 받는 기분을 알지. 낯선 사람과의 만남, 서로가 순수한 상태로 만나 궁금증을 풀어가는 상태. 그 감동은 잊을 수 없을 거야. 지금은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진열된 지 몇 개월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네. 다른 서가의 책들처럼 시선을 끌만한 위치도 아니지. 고작 보이는 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신발들 뿐이고, 눈을 치떠야 온전하게 보인다네. 게다가 나도 자네같이 일란성쌍둥이처럼 두 권이라 누구의 선택을 받을 만한 처지도 못된다네. 나는 항상 준비된 상태지만 나를 소중히 여기는 독자가 나타날지 궁금하다네. 가끔 그런 상상을 하곤 해. 어떤 지적이고 호기심이 강한 여인이 두리번거리다 멀리서부터 시선을 고정한 체 나에게 슬로모션으로 다가오는 거야. 내 심장은 불규칙하게 뛰겠지. 내 곁에 다가온 그녀는 허리를 굽혀 나의 책등을 살면서 만지며 나를 친구들로부터 조심스럽게 꺼내고는 왼손 바닥으로 나를 받치고 뾰족하게 잘 다듬은 오른손 손가락으로 책갈피 삼아 양옆을 지그시 누른 후 시선은 글 속을 지나치는 상상, 나는 햇살이 눈썹에 닿듯 간질간질해지지. 순간, 그녀에게 좀 더 매력적인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이 일겠지. 그녀가 보일락 말락 입술 끝을 찡그리면, 아직도 내 차례가 아닌가 하고 불안해지지만, 이내 그녀는 확신이 생긴 듯 나를 움켜쥐고 매장의 계산대를 향해 당당히 걸어가서 계산을 하고, 그녀와 나는 거리로 나와 태양빛을 받고 시원한 바람을 맞고, 그녀와 함께 가는 중에 그녀는 왼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오른손을 뻗어 책표지를 만지작 거리고, 신호등 앞에서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책날개를 다시 훑어보겠지. 그녀와 나는 별안간 동일시되는 신기한 느낌이 들겠지. 그녀는 며칠 동안 나를 응접실 테이블 위에, 작은 방 책상에, 침대옆 탁자 위에서 손을 놓지 않고 틈만 나면 읽지. 나는 테이블 위에 이리저리 놓인 책중에서 잠깐 스쳤던 반가운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시집이라는 새로운 친구도 만나고 시를 사랑하면서 들뜬 상태로 며칠을 보내다가 서가에 꽂히겠지. 가끔 그녀가 시선을 다시 보내고 나를 꺼내어 아무 곳이나 펼쳐 몇 문장을 읽으며 경쾌하게 알 수 없는 메모를 하는, 이런 꿈을 꾼다네. 이해가 가네. 괜히 사놓고, 다시는 거들떠보지 않을 거면 지금 이대로가 좋아. 그렇다네,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독자를 만난다면 나의 정체를 파악도 하지 않은 채 읽기를 그만두고 한편에 내버려 두겠지. 그러다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들려오는 어느 날, 변덕스러운 그녀는 무언가 갑자기 생각이 난 듯, 손톱으로 탁자를 신경질적으로 두들기다, 덩그러니 한편에 있는 나를 신중하게 몇 초를 바라보다가 종이상자에 던져버리겠지. 나는 종이상자 귀퉁이에 부딪히면서 밑으로 떨어지지. 한 줌의 빛도 없는 상자의 어둠보다는 영원히 잊히고 말 거 같은 두려움과 절망감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겠지. 그 속에는 겉표지가 너덜너덜하여 제목도 작가도 알 수 없는 책들, 아무렇지 않게 졸고 있는 책들, 무언가 뜨거운 물체에 눌려 겉표지가 일그러져 갑자기 늙어버린 듯한 책들, 오랫동안 물속에 있은 듯 부풀고 쭈글쭈글 해지고 하얗게 된 책들이 우울해하고 자포자기의 심정에 빠져 있겠지. 그러다 만약에 운이 좋다면 중고 책방으로 옮겨지고, 상자에 나와 다시 서가에 꽂히고, 나를 소중히 여길 새로운 얼굴을 기다리겠지. 물론 몇 푼 안 되는 내 몸값에 우울해지지만 어쩌면 교양 있는 독자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으며 또 몇 개월을 버티겠지. 일 년, 다시 여섯 달이 지나, 호기심 가득 찬 누군가가 나를 다시 넘기기 시작하거나 폐지로 팔려 희미한 전등불 아래 먼지 쌓인 절름발이 소파위에 아무렇게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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