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도시 일기 2

by 김영


가끔 지하철의 어두운 차장을 멍하니 바라볼 때면, 스스로 굳게 입을 다문 휑한 표정의 남자가 누군가 싶을 때가 있다. 그가 알고 있는 그가 맞긴 한데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 이에 더해, 계단을 오르고 내려갈 때는, 에스컬레이터 위에 망연스레 서 있을 때는, 오름차순과 내림차순으로 바뀌는 엘리베이터의 숫자를 바라볼 때는, 공항과 기차역에서 우두커니 기다릴 때는, 공원 벤치에 앉아서는, 책상에 발을 올리고 의자를 뒤로 젖히고는, 차 안의 좌석에서 발가락을 곰지락거리면서는, 따뜻한 욕조의 찰랑거리는 물을 휘저으면서는, 도시의 거리를 걸어가면서는, 걸음을 멈추고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거슬러 여름방학 전날 버스로 통학하면서 맨 앞 운전석 옆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느꼈던 순간에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어떤 화창한 날 마당에는 하얀 빨래가 흔들리고 엄마 무릎에 누워 귀 청소를 받으며 엄마의 냄새와 그의 빰이 엄마 허벅지에 닿았던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 들었을 때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생각이란 걸 처음으로 한 날의 생각이 무엇인지가 궁금할 때 있다. 처음으로 생각을 한 날은, 그가 자신 안에서 어린 소년으로 살았던 어느 날, 불현듯 내면의 목소리를 처음 듣던 날이었을 거다. 소설가를 지망하는 그가, 그날을 뭉뚱그려 말하는 것이 마음 내키지 않지만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아무 말없이 넘어가는 게 낫다. 어쨌든, 그날은 생각이란 걸 스스로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날이고, 그저 존재했을 뿐인 존재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존재로 바뀐 날이고, 자신의 영혼을 구원한 날이고, 비밀스럽게 혼자만 아는 자신과 내통한 날이다. 그날부터 그의 내러티브는 시작되었다.


"이번 정차할 역은 중앙공원, 중앙공원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그는 검은 차장의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발걸음을 옮긴다. 땅속에서 부양하듯 역에서 나온 그는 부산스러운 길을 벗어나 공원에 들어선다. 주말이면 그는 가까운 거리의 집에서 지하철을 타고 공원을 들렀다 서점으로 가던지, 반대로 서점을 들렀다 공원에 가는 일을 버릇처럼 한다. 도시의 중심에 위치한 공원은 보통걸음으로 남에서 북으로 가로지르면 대략 한 시간이 걸리고, 동에서 서까지는 30분 정도로 직사각형에 가깝다. 공원 중심을 가로지르는 인공호수가 있고 인공호수를 엇가로지르는 몇 개의 다리와 호수 끝에는 호수 위로 데크길이 있다. 남쪽과 북쪽의 경계선 너머로 아파트가 기하하적 무늬를 만들고, 동쪽과 서쪽으로는 이 빠진 빗처럼 들쭉날쭉한 건물들이 도로를 경계로 서있다.


그는 도시에서 태어나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 여러 도시에 살아왔다. 처음의 도시는 개울물이 지나던 길이나 동물들이 지나던 길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길이 만들어진 도시였다. 내세울 만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곳이지만 상대적으로 작은 몸의 그에게는 거대한 놀이터이고 박물관이었다. 얼굴에 바람을 느끼며 달리고, 경사진 곳에서는 미끄럼을 탔고, 높은 곳에서는 뛰어내렸다. 세상과 부딪히며 몇 번이나 발가락을 채이고 손가락을 찧고 무릎이 까지고 울음을 터뜨렸지만 귓가에서 맥박이 고동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오랫동안 시간을 끌면서 저무는 여름날에는 여전히 옆구리가 아파올 때까지 달리기를 하고, 혼자 운동장에서 공을 허공으로 던지고 떨어지는 공을 잡고 다시 허공으로 조금 더 높이 던지고 다시 받았다. 연녹색 테니스 공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를 반복한다. 순간, 세상은 그와 연녹색 공과 푸른 하늘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관심을 차지한 기어 다니는 개미, 시냇물을 따라 일렁얄랑거리며 좌우로 흔들리는 종이배, 유연하게 포물선을 그리며 나는 종이비행기, 놀이터 모래바닥의 반짝이는 것들, 그리고 민들레와 코스모스와 클로버. 그 시절부터 여태까지, 그가 무엇이건 간에 사랑에 빠지지 않은 때는 없었다. 그중 가장 설레고 열렬했던 건 한눈에 반했던 여자들이다. 소년으로 사랑했던 여자들과 남자로서 사랑했던 여자들, 그들은 생김새부터 모든 것이 달랐지만 평생 그녀들의 아름다움에 단 한 번도 저항할 수 없었다. 그에게 마음을 주는 소박한 여자보다는 줄 마음이 없는 화려한 여자에게 마음이 끌렸다. 마음을 빼앗긴 후, 잘못 고른 상대를 향한 용감한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여자를 두고 내린 결정은 하나같이 어리석고, 서로가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타이밍은 어긋났다. 간간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더라도 결국은 갈라섰다. 서로가 불행한 건 참아도 지루한 건 참지 못했다. 나이가 들어서도 자기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지 못해 잘못된 접근을 하곤 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만이 남들이 발견하지 못하는 그녀들만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구불구불한 길이 실타래처럼 연결된 도시를 떠나 자동차가 지나는 직선의 길을 따라 만들어진 도시로 옮겨간 건 직장생활을 할 무렵이었다. 그때까지 십여 개가 넘는 주소가 바뀐 후, 치밀하게 계획된 신도시로 이사했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건물들이 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지고, 화려한 장식의 카페와 상점들은 활기 넘치고, 도처에 공원이 있다. 시골 마을처럼 너무 빨리 바닥을 드러내 결국 더 이상의 관심을 사로잡지 못하는 그런 곳이 아니다. 황혼의 저녁 무렵이면 건물들의 스카이라인 뒤로 노을이 불그스레 물들고 그 위로는 새털구름 뒤에 희끄무레한 하늘이 있었다. 절대 물리지 않은 장면이다. 순간 입이 떡 벌어졌지만 애써 담담한 척했다. 그 순간은 아직 다 펼쳐지지도 않았는데 바람에 돛이 부풀어 오르듯,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두루뭉술하지만 뭔가 낭만적인 일이 생길 거만 같은 도시였다.


그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의 과정은 막연한 짐작과 추측만이 가능한 영역이다. 그의 조상들은 수만 년 동안 기후의 변화와 먹잇감을 따라 먼 길을 돌고 돌아 떠돌았을 것이다. 위기의 순간마다 변화를 시도하고 다시 이동하며 정복하고 정복당하고 약탈을 하고 약탈을 당하며 수많은 곳을 떠돌다 이곳까지 왔다. 온 세상을 돌면서 누가 누구를 낳고 그 누구는 또 누군가를 낳고 또 낳고 낳아, 결국에는 그를 낳았다. 그의 부모는 둘 다 거칠고 가난한 시절을 보냈지만 처음 만난 날부터 이별하는 날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진 긴 대화 속에서 살았었다.


그가 사는 곳은 멀찍이 보면 한 뼘 손안에 들어오지만 벌집 같은 곳에는 천여 명 내외가 산다. 그들의 몸은 다른 크기의 거대한 직사각형 상자 같다. 앞면과 뒤면에 서로 다른 형태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서로가 등지고 있다. 겉면은 희번드르한 거대한 유리가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씨실과 날실처럼 철근이 교직으로 짜여있다. 그 주위를 발딱 발딱 뛰는 핏줄처럼 상수도관이 있다. 수평으로 땅을 지나던 수도관은 아파트를 만나 수직으로, 나뭇잎의 잎맥처럼 질서 있게 올라간다. 수직으로 올라간 수도관의 끝에는 수도꼭지, 샤워기, 세면대, 변기가 은빛과 우윳빛으로 매달려있다. 사람들은 잠긴 집에서 각자의 몸을 부리고, 열린 창문으로 다른 풍경을 본다.


그들의 역할은 무대만 바뀌었지 어느 도시와 같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집과 직장을 오가며 일을 하고, 당연하게도 미친 듯이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 밤을 새우고, 직장에 허둥지둥 출근해 회의를 하고 기획서를 작성하고, 다시 돌아와 간단한 식사와 빨래를 하고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고, 직장에 나가고 회식을 하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다음날 허둥대며 출근하고 승진을 위해 미친 듯이 일하고, 휑한 얼굴로 돌아와 소파에 기댄 채 잠이 들고, 꽃들이 폭발하듯 핀 길을 지나 출근해서 일하고, 백화점 유리천장을 뚫고 들어온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계절에 맞는 옷을 구입하며 무엇이든 가능할 거라 생각하고, 다음날 때로는 농담을 하며 미소 지으며 일하고, 퇴근길 뭔지 모를 퀴퀴한 냄새가 나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다 잠이 들고,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는지 모른 체 일하고, 최신 핸드폰을 구입하고, 일하고, 자동차를 바꿀까 생각해 보고, 일하고, 하릴없이 제 손톱을 세우고 바라보며 결혼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보고, 다시 일하고, 문득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고, 일하며 그녀를 생각하고, 그녀와 만나며 이런저런 약속을 하고, 다시 일하고, 집 장만에 대해 생각하고, 일하고, 이제 그녀가 지겨워지고, 다시 일을 미친 듯이 하고, 운 좋게 내게 싫증난 그녀가 먼저 떠나버리고, 하루종일 일하고, 조용하고 고독한 일요일이 지나가고, 늘 그렇듯 기분전환이라도 할 겸 여행을 하고, 비행기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더 열심히 일하자고 다짐하며 돌아와, 다시 연봉협상을 하고 좌절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간다는 확신 없이 가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보다가 나를 사로잡은 여행지의 풍경이 내 안에 불러일으켰던 것을 기억해 내고, 다시 일하다가, 어머니의 죽음을 연락받고 얼굴은 흰 시트로 덮이고 맨다리는 침대 가장자리밖으로 삐져나온 체 바퀴 달린 침대에 실려가 그녀를 불길이 할퀴고 집어삼키는 걸 보고, 다시 아무 일도 없는 양 일하고, 베란다 귀퉁이에서 바깥세상을 보고, 다음날 다시 일하고, 어느 날 이메일을 확인하고 경조사에 가서 친구의 갑작스러운 작별에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다시 일에 몰두하기 위해 책상으로 다가가고, 다시 출근해 일하고, 자신에 대해 돌아보고, 잠이 덜 깬 채로 일하러 가고, 자신이 해놓은 일이 소용없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 나와 세계 사이에 뭔가 삐걱거림을 느끼고, 다음날 또 일하고, 태양이 비치는 날 창밖을 내다보고 저물어가는 마지막 빛이 맞은편 아파트 창문과 마주하는 벽에 던지는 형상을 바라보고, 하루종일 일을 하고, 비 오는 날 밀리는 차 안에서 전조등 불빛에 반짝이는 아스팔트와 유리창을 타고 흐르는 빗물에 반사되는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고, 다시 지친 몸으로 같은 사무실에 나가고, 어딘가 정답이 따로 있을 거라 믿고 일하고, 문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일하고, 저녁시간 마주하고 있는 벽에 던진 공이 벽에서 손으로 손에서 벽으로 하얗게 선을 그리는 모습을 보다가 서서히 어두워지는 창밖을 바라보고, 멍하니 일하고, 주변과 대화는 점점 줄어들고, 가라앉기만 하는 마음으로 쓸쓸히 집으로 돌아오고, 일하고, 멀리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고, 예전처럼 일을 나가고, 어둠 속에 오래 앉아 바람에 커튼이 흔들리는 걸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하고, 어두운 표정으로 일하고, 생각한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지쳐 일하고, 나의 삶이 영원히 창밖에 서성대며 서있을 거 같은 생각이 들고, 일하고, 어느 날 몸이 아프고, 그래도 일하고, 같은 욕망 같은 걱정에 매달려 지내다가 마침내 직장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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