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도시 일기 5

by 김영


여행이 설렘과 부담감이 동시에 존재하듯, 그녀를 생각하면 들뜬 기분과 불편함이 뒤섞여 있다. 설렘과 들뜬 기분은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부담감과 불편함은 뭔가 비어있는 말이다. 다시 말해, 그 상황을 반만 설명하는 이름 없는 감정이다. 언젠가 그는 그런 글을 읽었던 적이 있다. "그녀의 대화는 늘 비어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진정한 말을 사용한 적이 없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사랑'만 해도, 그녀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고 '나는-뭔지-모르겠는-것'이라고 불렀다". 당신들이 이 말을 이해한다면, 좋지만, 이해하지 못해도, 좋다.


다시 그녀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는 그녀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매혹적인 여인이라고 생각되지만 안개가 낀 듯 불명료하다. 조금 전의 생생한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그녀의 이미지 위에는 그 이미지를 흐릿하게 만드는 덧바른 이미지가 있다. 마치, 조금 전에 꾼 꿈이 시간이 흐르면서 윤곽들이 흐트러져 경계선이 사라진 거 같다. 그것이 예상치 못한 일을 경험할 때 생기는 감정의 고양이든, 그의 선입견으로 생긴 잔상이든, 램프 밑의 연기처럼 공중에 떠돈다.


어쨌든, 그녀를 처음 본 순간 그는 사랑에 빠졌다. 단순한 충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녀도 그를 사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남녀관계는 모래밭에 물거품을 남기는 차가운 바닷물처럼, 끝나게 돼 있다고 생각해 왔던 그였지만, 혹시 누가 알겠는가, 반대로 좋은 일이 생길지. 점차 그녀도 그를 사랑하게 되고, 멀리서도 그에게 자연스레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고, 테이블에서 일어나면서 자연스레 그의 손등을 건드리며 지나갈 수밖에 없을지.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 우연히 지나치는 여자를 보고, 그의 심장은, 파닥거리는 작은 새 한 마리를 삼킨 듯 심장은 뛰고, 가던 길을 멈춰 서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다시 가던 길을 갔던 많은 순간들. 그런 용기 없는 그에게, 뭐 하나 잘하는 게 없는 그에게, 이 도시에서 같은 책에 관심을 가진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온갖 종류의 음악 중 같은 음악을 듣는 것 같은 일이다.


때가 되면 연락이 올 거라 생각되지만 설령 오지 않아도 그로서는 어쩔 수 없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일단, 새로 구입한 소설을 읽도록 하자. 읽으면서도 그녀 생각이 날 거다.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직업은 무엇인지, 결혼은 했는지, 사는 곳은 어딘지, 전화 목소리는 어떨지, 그의 목소리는 그녀가 느낄 때 어떨지, 떨리는 목소리는 누구의 목소리인지, 인사말을 하고 무슨 말을 할지, 결국은 만나게 될지. 그는 속으로 자신에게 진정하라고 한다.


그건 그렇고, 이제 새로 구입한 김영의 소설을 읽어야 한다. 약간 흥분된다. 그의 지난 이야기는 지어낸 것이긴 해도 진실되게 느껴졌었다. 구두점을 찍는 방식이 하나로 정해져 일정한 어조를 가지고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과즙이 풍부한 형용사와 부사들이 적재적소의 알찬 명사를 묘사하고, 날렵한 동사들이 당장이라도 움직일 것 같은 화려함 대신, 사실을 담담하게 시간순서대로 써 내려갔다. 새를 그리려고 하는데 너무 순식간에 날아가버릴까 두려워하며 새에만 집중하는 모양이다. 뿐만 아니라, 모터사이클을 타고 서로 소리치며 불가능한 대화를 하기보다는, 서두르지 않고 지나가는 시골풍경을 보며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과 같다. 현재 존재하고 있는 것을 깨닫는 것, 뻔히 보고 있었지만 깨닫지 못했거나 깨닫지 못하도록 길들여진 것을 발견하는 것 같다.


긴장을 풀고 주의를 집중할 때다. 갈증을 해소할 차나 물을 준비하고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을 음악을 준비한다. 가사가 나오는 음악과 비트가 강한 음악은 피한다. 잔잔한 클래식이나 재즈 정도면 좋을 거다. 서정성 깊은 나만의 플레이리스트가 있으면 좋고, 때마침 유리창을 때리는 빗소리가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빗소리에 마음을 빼앗기면 안 된다. 조명에도 신경 써야 한다. 자연광이든 스탠드의 빛이든, 너무 어두우면 글씨들이 개미떼처럼 보일 수도 있고, 너무 밝으면 글자들의 음영이 사라질 수 있다. 책 읽는 자세는 아무래도 좋다. 가장 편안한 자세를 취하면 된다. 책상에 앉아서 읽어도 좋고,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발을 올려놓아도 좋다. 물론, 독서대를 이용해도 좋다. 침대에 기대거나, 착안감이 좋은 패브릭소재에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발은 베드에 뻗어도 좋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조명은 적당하고 자세는 편하고 음악은 흐른다. 라라- 디라라 -라라라-라.. 현의 반주에 따라 서정적인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온다. 러시아 색채가 가득 담긴 연주곡이다. 호로비츠의 연주가 봄의 들판에 가벼운 미풍이 불고 풀들은 물결처럼 일렁이고 그 위에 음이 실린듯하다면 그보다 100년 후에 태어난 임윤찬의 연주는 한겨울 시베리아의 광활한 순백의 대지에 켜켜이 쌓인 눈 위로 바람이 불고 미끄러지듯 음이 선율을 타고 전해오는 듯하다. 둘 다 낯선 곳을 여행하는 듯 조심스럽게 시작된다. 설렘과 불안감이 묻어있다. 얼핏 들어보면 로맨틱하지만 그 안에는 다층적으로 겹겹이 쌓여있는 화성적인 평화가 있다. 음악을 들으며 복잡한 마음은 하나둘 정리가 되고, 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평화롭고 서정적인 선율은 조금씩 고조된다. 피아니스트가 오케스트라와의 협주 없이 기량을 뽐내는 카덴자가 나온다. 연주자는 심플한 버전과 화려한 버전 중 심플한 버전을 선택했다. 음 하나를 소중히 다루듯, 모든 손가락이 한음한음을 놓치지 않는다. 모래를 뿌려놓은 것처럼 많은 음표를 스피디하면서 가볍게 지나고 있다. 피날레를 위해 힘을 축적하고 있다. 조금씩 밀어붙인다. 음이 단단하고 쫀득거린다. 밀어붙이지만 불안하지는 않다. 연주자는 음 하나하나를 기억해서 치는 게 아니다. 정확한 음정을 손에 익힌 다음 머릿속에서 악보를 지워버리고, 가슴으로 치고 있다. 피아노는 오케스트라와 싸우는 듯하고, 오케스트라와 교차로 불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파우스트가 악마와 결투를 하는 것 같다. 연주자의 몸과 머리카락이 들썩인다. 몸을 사리지도 않고 겁 없이 달려간다. 연주자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보인다. 시대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인간다움을 잃지 않을 거라 다짐하는 듯하다. 따뜻한 멜로디가 나온다. 고통은 천천히 해결되고, 음울한 분위기는 서서히 극복되고, 화려한 피날레로 향한다. 그의 몸과 머리는 말랑거리고, 시선은 글 속을 헤매고 있다.


김영의 소설은 술자리 대화로 시작된다. 뿌연 유리를 통해 술집 안을 들여다본다. 담배연기와 각종 음식들의 잔향과 쉴 새 없이 오고 가는 대화가 한데 뭉쳐 웅웅거린다. 그들의 대화가 들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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