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도시 일기 4

by 김영


그날의 서점은 주말답지 않게 한적했다. 서점은 책뿐만이 아니라 문구점과 액세서리 가게, 카페가 있는 대형서점이다. 그는 평소처럼 문구점에서 필기구나 노트를 살펴보고 액세서리 가게에서 눈요기를 한 후, 서점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우드 인테리어에 따뜻한 조명, 은은한 커피의 향과 잔잔한 분위기의 음악, 다양한 책표지들의 발랄함은, 그가 어쩌다 산책을 하고 어쩌다 서점을 들르는 것을 습관처럼 만들어 버렸다. 이제, 서점은 그에게는 하나의 우주가 되었다. 책 하나에는 별과 같은 반짝이는 작가의 생각이 있고, 책장은 반짝이는 별을 모은 것이다. 하물며 책도 서가도 나무로 만든 것이니 숲에 들어와 이 나무 저 나무를 보는 것과 같다. 오늘은 소설가 '김영'의 신간 '마음이 다한 다음, 남은 마음'을 구매할 예정이다. 김영은 첫 작품 '보이지 않는 도시'의 성공 이후 여러 해 동안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하릴없이 검색을 하던 어느 날 신간도서 기사소개에서 그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어찌 보면 내용은 구멍이 숭숭 뚫린 것 같고, 형식은 비 오는 땅처럼 어지럽습니다. 구멍이 숭숭 뚫린 내용들을 어지러운 형식에 담아낸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근데 말입니다. 내용이야 어떤 것을 쓴다 한들 새로운 것이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영향을 받은 누군가가 있고, 그의 영향을 받은 누군가, 그 누군가의 영향을 받은 누군가가 먹이사슬처럼 이어지는 게 글 아니겠습니까. 서로가 서로의 텍스트이고 패러디의 글감이죠. 그래서 같은 내용이라 할지라도 새로운 형식으로 담고 싶었습니다. 가끔은 형식이 내용을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불완전한 내용을 불완전한 그릇에 담다 보니 읽다 보면 어뜩어뜩 현기증 나는 엔트로피 속에서 비틀거릴 것입니다. 그 소용돌이치는 어지러움 속에서 생겨나는 것들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것들이 제 소설의 빈틈을 채워줄 거라 기대합니다. 그건 마치 원자가 핵과 전자 사이에 어마어마한 빈 공간이 있지만 단단하게 연결된 것과 같습니다. 빈틈 투성인 공간을 독자의 풍부한 상상력을 보탰으면 합니다. 무정형인 삶을 논리적으로 설득하기보다는 감성으로 매혹하고 싶었습니다. 소설이 가지는 정서적인 힘을 통해서 말입니다.'


가판대에는 두세 명이 서성거리며 책을 보고 있다. 진열된 책들의 제목을 눈으로 재빨리 훑어본다. 익숙한 이름과 이미 익숙해진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작가가 책에 자기 이름을 새겨 넣는 기분은 어떨까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도 그런 순간이 어서 오기를 바라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그의 꿈은 소설가이다. 고도로 증류된 언어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다면 시인을 바랄 수도 있겠지만 그에게는 가당치도 않다. 그는 그냥 평범 하달 수도 없고, 그렇다고 평범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는 사람이다. 평범한 점은 서른 중반의 회사원이라는 것이고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아직도 소설가를 꿈꾼다는 것이다. 공모할 때마다 긴장된 인터뷰나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자신의 독자와 만나는 즐거운 상황을 상상해 본다. 그리고 이어질 대화를 생각해 본다. 낯선 사람과 낯선 사람이 만나 같은 책을 두고 대화하는, 뭐, 그런 상상 말이다.


책을 움켜쥐고 표지와 책등의 촉감을 느끼고 책날개를 살피고 가볍게 페이지를 넘기며 냄새를 맡는다. 종이 냄새와 잉크냄새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사부작거리며 가볍게 그의 얼굴을 감싼다. 책이라는 작은 사각형의 물체 안에는 다양한 시간과 공간에 존재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서점은 모든 영혼에 의해 꾸며지는 지적이고 경이로운 장소이다. 조용히 책의 첫 페이지를 펼치고 목차로 책의 내용을 짐작한다.


옆으로 움직임이 느껴지고 새큼한 향기가 복복하다. 작약의 화려함도 아니고, 프리지어 꽃 향기의 상큼하면서 우아한 향도 아니다. 최면을 걸듯 마음을 사로잡는 감향이다. 향속에는 부드러운 관능이 가두어 있다. 고개를 들어 그녀를 힐끔 바라본다. 책을 훑어보는 커다란 눈망울에 투명한 살결, 어깨까지 내려오는 구불구불한 머리카락. 순간, 들끓는 충동이 일어난다. 일종의 채워지지 않은 허기 같다. 하지만 자신을 통제한다. 주의력이 허공을 맴돈다. 그의 시선 안에 그녀가 행복하게 등장한 것이다. 그녀는 은은한 조명 속에 잠겨있다. 심장이 그의 의지와는 다르게 빠르게 움직인다. 이미 책 생각은 없다. 다시 그녀를 힐끔 본다. 부드러우며 야무지게 보이는 손가락으로 책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훑어본다. 제목과 출판사가 적힌 연푸른색의 책등, 눈길을 끄는 띠지의 문장, 책의 얼굴인 앞표지, 두루뭉술한 책 소개와 횡단보드와 같은 바코드가 찍힌 뒤표지, 저자를 소개한 옷소매 같은 책날개의 문장을. 그리고는 책의 첫 페이지를 조용히 펼친다. 설레는 긴장감으로 첫 줄을 읽으며 시작 부분을 탐색한다. 눈길을 끌만한 시작이나 있을지 모를 작가의 독특한 어조를 찾아내려 한다. 그녀는 깊숙한 눈길을 거둔다. 없거나 찾지 못한 듯하다. 실망스러운가? 마지막 페이지를 펼치고 소설의 양을 가늠한다. 실망스럽지는 않은가 보다. 고개를 드는 그녀와 눈이 마주친다. 그는 재빠르게 들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움직인다. 그녀는 서른 살에서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고, 중간키다. 헐렁한 브이넥 티셔츠를 입고 있다. 편안함이 느껴진다.


뭔가 물어보지 않으면 후회하고 말 것이다. 물론 그녀가 나이에 상관없이 남자들의 관심을 끌 정도로 아름다움을 갖춘 건 사실이지만 중요한 건 그 아름다움에 문학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건 공감능력이 있음을 말한다. 대화가 될 수 있는 상대가 아름다움도 갖췄다는 말이다. 지금 당장 말하지 않고 또 망설인다면, 언젠가 다른 누군가와 결혼을 하고, 결혼 생활이 예전 같지 않고, 어느 날 멍하니 그의 아내를 품에 안은 체 예전에 만났던 여자들을 떠올리고, 그중 서점에서 만났던 그녀를 놓친 걸 후회할 수 있다. 시간을 허비하면 안 된다. 그에게도 훌륭한 대화주제가 있다. 말을 걸기만 하면 된다. 서둘러야 한다. 무슨 말이든 해야만 한다. 일단 대화가 시작되면 즉석에서 빨리 생각하며 말을 이어가야 간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김영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시나 보군요? 그렇죠?'라고 말하려는 순간, 그녀는 책을 집고 계산대로 향한다. 책의 소유권을 확실히 하는 절차를 실행에 옮긴다. 매장의 중앙을 지나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녀의 오른쪽 옆얼굴이 까닥거리고, 몇 걸을 더 내딛자 그녀의 뒷모습이 보인다.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그녀의 어깨에서 좌우로 흔들린다. 그녀를 따라가며 대화를 시도하려다 포기한다. 이럴 때면 어느 장소에서건 거리낌 없고 입심 좋은 사람이 부럽다. 다시 책으로 눈길을 돌리는 순간, 그녀가 서있던 자리에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과 핸드폰이 보인다. 일이 다르게 흘러갈 수도 있다. 실은, 핸드폰은 그에게 마음 내키지 않는 물건이었다. 전화가 울리면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하던 일을 멈추고 받도록 강요받는다. 게다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만든 물건이 사람들을 떼어놓기 일쑤이다. 대화를 하다가도, 식사를 하다가도, 사람들이 갑자기 말을 끊고 전화기를 습관처럼 들여다본다. 버림받은 느낌이다. 몇 번인가 없애버릴까도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그녀와 연결을 시켜줄 수도 있다. 고개를 들자 멀리서 총총히 뒤돌아 오는 그녀가 보인다. 그녀도 그를 본다. 그녀에게 슬며시 핸드폰과 책을 들어 보인다. 핸드폰을 본 듯, 그녀의 걸음은 차분해진다. 그는 자신에게 충고를 한다. '서두르지 말고 침착해야 돼.'


"핸드폰을 놓고 가셨더라고요." 남자가 말한다. "가시는 거 보고 따라가려고 하던 참이었어요."

"아, 네, 뭐라고 감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여자는 핸드폰을 건네받으며 스치는 손가락과 말투에서 따뜻함과 선함을 느끼고, 남자는 여자의 매끄럽고 여윈 손목과 푸르스름하게 정맥이 드러난 손등을 본다. 두 사람은 무슨 말을 덧붙일 것인지, 아니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인사를 해야 할지 망설인다. 남자는 이렇게 대화가 중단되면 안 된다듯이 멋쩍게 말을 잇는다.

"그럼,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불편하시면 들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남자는 눈치를 보는 듯, 눈동자에 가벼운 흔들림이 있다. 남자의 불안한 태도에 여자의 마음이 약해진다.

"제가 무엇을 해드려야 하나요?" 여자는 뜻 모를 표정에 얼굴을 갸우뚱하며 묻는다.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소심한 듯 대담한 말투다.

"무슨 얘기를"여자는 적잖이 당황한 눈빛으로 성급하게 말을 받는다."제가 약속이 있는데요.."


여자는 얼굴이 붉어짐을 느꼈다. 머릿속에서 분방한 생각들이 오간다. 사귀고 있는 남자 생각이 난다. 그와 함께했던 시간들을 모아보면 3년이 지났다. 기쁨과 회의가 뒤범벅된 시간이다. 지금의 그들은 열정적으로 상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간혹 본능적으로 필요할 뿐. 기쁨은 권태로 바뀌고, 찾아온 권태는 도무지 떠나질 않는다. 사랑이라기보다는 사랑한다고 가까스로 여기고 있다. 한때는, 사랑에 빠진 사람의 연기를, 서로가 보호해 줄 거라는 연기라도 했었다. 차 안에서 둘은 의례적인 말을 하며 목적지까지 가고, 그들의 음악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와도 예전 같지 않다. 부자연스러운 몸짓과 피곤한 얼굴들이다. 대화 없는 식사를 한 지도 오래되었고 설령 말을 할 때도 멀게만 느껴지는 건조한 어조에, 의도적으로 상대방의 아픈 곳을 찌르는 이야기들이다. "당신, 행복해?"라는 유치한 질문들이다. 물론, 상대를 자기 자신만큼 소중히 여기고 상대의 슬픔을 받쳐준 관계였다. 지구의 둘레를 도는 달처럼, 상대가 자신의 행동의 축이라도 되는 것처럼 상대에 눈길을 돌려 자신을 확인했지만 이젠, 소홀함에 미안한 감정도 없다. 그들은 안다. 더 이상 상대를 변화시킬 수 없고 자신도 변할 수 없다는 것을, 상대를 바꾸기보다는 사람을 바꾸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런 어리석은 관계를 어디까지 참아낼 수 있을까, 사실을 외면한 체 행복한 척을 할 것인가 현실을 직시하고 불행해할까 갈림길에 서있다. 그들의 관계는, 긴 여행에서 우연하게 옆자리에 앉게 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끔쩍이며 몸이라도 닿으면 적당하게 친절하게 웃어 보이고, 시선이 마주친다 싶으면 날씨 이야기를 하며 적당한 친절과 인내를 오가며 마침내 종착역에 도착하는 낯선 여행자들이다.


"제 부탁을 거절한다고 해도 당신에겐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남자는 이야기를 그만둘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내면에 있는 무언가가 물러서지를 않는다. 멋쩍은 미소에 애정과 갈망을 담으며 말한다. "그런데 제가 말을 걸지 않으면 제겐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생길 겁니다. 우선, 우연히 마주친 아름다운 여자가 미처 말을 걸기도 전에 떠나도록 내버려 둔 것을 후회할 것이고, 다음은, 당신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당신의 어떤 인상을 정리할 기회를 놓치게 된 것을 후회하고, 마지막으로, 나중에 당신과의 만남을 재구성하며 스스로 내면의 경계선을 넘어선 것을 자랑스러워할 기회를 놓친 것을 후회할 것입니다." 남자는 머뭇거리다 여자의 표정을 살피며 다시 말을 잇는다. "만약에, 당신이 제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삶으로부터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았던 제가 삶에 뭔가 더해지는 행복한 기분으로 서점을 나서게 될 겁니다."


남자는 관자놀이 맥박이 뛰는 것이 귓가에 들렸고, 여자는 따스한 기운이 자신의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여자는 망설였지만 기분 좋게 망설임을 즐긴다. 여자는 잠시 연인은 잊고, 앞에 있는 남자를 챙겨주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그것이 모성애이든 상관없다. 어쩌면 인생에서 다시 한번 퍼붓는 열정에 굴복할 수 있다. 여자는 겨울의 단조로움보다는 여름의 충만함을 기대하고 있다. 여자는 공감받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여자가 문학을 전공해서만은 아니다. 지금은, 한결같이 지루한 사람보다는 섬세하고 다정한 누군가에게 끌린다. 혼자 있는 시간을 환상과 몽상과 추억으로 채우고 싶지 않고, 퇴근 후, 아침 이후 정지된 채 있는 흐트러진 침대를 더 이상 맞닥뜨리고 싶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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