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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gi Seo Dec 05. 2020

알아도 어찌하리오 II

근본 머리 없는 대한민국에서 인공지능(AI)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노동자가 자유시장에서 더 높은 임금을 받고 더 좋은 근로 환경에서 일할 때, 유능한 직원이 되거나 훌륭한 직장을 얻기 위해 회사 또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다른 노동자들과 경쟁해 급여를 인상받을 때, 그렇게 인상된 급여는 다른 사람의 몫을 희생한 대가가 아니다. 파이 전체가 커진 것이다. 노동자의 파이가 커짐과 동시에 고용주와 투자자, 소비자, 심지어 세금징수원의 파이도 함께 커진다. 이것이 자유시장 체제가 모든 사람에게 경제 발전의 열매를 분배하는 방식이다.
                                                        -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이제 불혹이라고 불리는 마흔을 몇 해 앞두고 자꾸 학창 시절의 친구들의 모습이 아른아른거린다. 오래된 친구들 중 졸업 이후에 재회하게 되어 휴대폰에 연락처가 있거나 문자를 주고받는 이들도 있지만, 정작 기억에 또렷이 남는 친구들은 그 시절 가까운 사이가 아니네. 학창 시절에 단 한 장면으로 인해 아직까지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 친구들이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지금의 나의 어른이라는 형식(나이)이나 인문학적 소양에 비춰서는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서 끌어안거나 고맙다고 말 한마디라도 표현해주고 싶지만, 당시에는 학생이라는 신분 혹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나와는 다른 친구 그룹)라는 좁은 관점으로 인해 모른 척하고 넘어간 경우가 있다. 성인이 되고 나서야 '정말 용기 있는 행동'이 무엇인지 한 번 되새겨 보면 이미 학창 시절에 주변인들이 보여준 경우가 많았으며,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엘리트들이라고 언론에 비치는 모습과 내 친구들의 모습이 오버랩(overlap)되면 칼이 아니라, 작두를 들이대고 싶은 심정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로베스피에로'라고 중고등학교 때 사회나 역사 시간에 들어봤을 법한 이름을 프랑스혁명에 대해 관심을 가져봤던 독자라면 어렴풋이 떠오를 것이다. 필자도 어제 차를 몰다가 라디오에서 우연히 들었는데, 내레이터가 프랑스혁명을 설명하면서 그의 이름을 환기시켜주었다. 그 키워드를 통해 프랑스 대혁명의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암묵적 지식이 하나둘씩 들추어졌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 작자(자코뱅파 소속, 지코 말고)는 왕권과 사회계급의식에 대항하여 시민들과 프랑스혁명을 주도하였지만 반대파(지롱드파)에 의해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인물이다. 로베스피에르는 신분적으로는 부르주아(귀족층)였고 중소 지식인에 속했지만, 그는 어떠한 형태의 차별도 반대하였다. 귀족을 반대하되 자신들이 새로운 지도세력이 되기를 원했던 지롱드파와는 감정적으로도 대립하였다고 한다.



"현세기 세계의 모든 정치와 시민의식은 프랑스 대혁명에 빚져있다."라고 말할 정도로 의의가 있는 프랑스혁명의 자유·평등·우애에 대한 신념을 갖고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자가 로베스피에로뿐만 아니라, 당시 약 4백만 명에 이른다. 프랑스 공포정치 시기 동안 4백만 명의 신체의 우두머리가 단두대에서 썰려 나가지 않았다면 삼권(입법권, 사법권, 행정권) 분립이라는 권력 견제 시스템의 도입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의식(?)은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은 신분제와 봉건제를 폐지하면서 평등사회가 탄생한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 한 번에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2020, 장선화). 이것은 대한민국이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까지 이어진 군간부 출신의 독재정권 시대를 벗어나고도 위와 같은 사실을 계속 확인하고 있는 현대사회의 시국이 바야흐로 대한민국의 현주소가 아닐까 싶다.



시기의 구분을 위해 만든 용어가 현대사회이지, 똑같은 역사적 흐름만을 되풀이할 거라는 짐작은 작금에 와서 필자만 느끼는 걸까? 인공지능(AI)이라는 기술을 실무에 적용하는  필요한 교육을 엊그제 받았는데 강좌에서 아직도 AI 로봇을 구분하지 못하는 IT 실무 종사자들도 있는 것을 보고 인공지능에 대한 일반인들의 생경함은 어느 정도일지 예상이 갔다. 영화에서 보인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대체할  있는 로봇(General AI) 인간 고유의 윤리적 잣대를 지니지 못했기에 발생하는 해프닝만을 다룬 소재는 실제로 현실에서 쓰일 AI(Artificial Intelligent)와는 거리가 멀다. 레이 커즈와일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인공지능 학자가 예견한 특이점(Singularity) 오는 기점이 정말 발생하여 인공지능이 인간의 능력과 감성 모든 면에서 현생 인류가 예측하지 못하는 수준으로 증폭하면 몰라도 말이다.



그때쯤 되면 AI의 번역 능력이 작년에 영화 '기생충'의 영어자막을 번역한 달시 파켓이라는 번역가의 능력과 맞먹을 수도 있겠다. 영화 기생충이 해외에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유럽에서 인기를 얻고 맨부커상을 수상한 것과 비슷하다. 문화적 소양과 인간에 대한 이해와 관점이 다른 사람(외국인)들에게도 작가나 영화감독이 말하려는 기존 메시지의 의도가 그대로 전달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산지 무려 23년째인 번역가 달시 파켓은 기생충의 한국적인 정서를 미국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했다. 그래서 미국 영화 산업계의 주류인 백인들이 단 한 번도 제외된 수상사례가 없었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이 수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존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정서를 이해하고 그중 탁월한 단어를 선택하는 달시 파켓의 번역 기술은 AI의 능력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세돌과 대국을 둔 AI의 기술 중 하나인 딥러닝과 같은 수많은 사례를 기반으로 학습시켜서 그 나라의 사람들이 이런 상황에서 이런 표현을 썼으니 이 표현이 영화 전체 문맥상의 시점에서는 적당하다고 선택하는 것과는 산출방식이 다르다는 말이다. 달시 파켓의 번역은 직역도 아니고, 이런 식의 한국어 표현을 미국 사람들은 주로 어떻게 표현하는지에 대한 사례를 기반으로 번역을 한 것도 아니다. 그가 "새로운 표현을 창조한 것"이다. 달시 파켓처럼 창조적인 번역을 하기 위해서는 한국어와 영어만을 알아서 되는 것이 아니고, 한국 사람과 한국 문화 그리고 미국 사람과 미국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자신만의 관점이 필요하다(2020, 김명락). 이 대목에서 필자는 한국이 앞으로 도입해야 할 교육의 방향에 대해서 모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문장 자체보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이런 번역이 가능한 것이고, 인문학적 소양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인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인공지능으로 현실에 접목한 기술의 혜택은 지금의 번역가나 판사나 의사 그리고 택시운전사만큼 신뢰받을 있는 수준은 아니다. 인간의 가치 판단이나 달시 파켓과 같은 창조적인 번역능력이 필요로 하는 분야에서는 여전히 인공지능보다 그러한 능력을 소유한 인간이 더 대우받을 것이다. 인공지능이 도입되면 현재의 직업이 대부분 사라질 거라는 우려에 호들갑 떨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우습게 보고 넘겨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앞으로 인간은 기존의 직업에서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그 직업의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릴 수 있는 사람이 현재 자신의 몸값보다 더 대우받을 수 있는 반면에, 그렇지 못한 사람(판사든 대통령이든 축구 감독이든 간에)은 대한민국이 일제강점기 직전의 흥선대원군처럼 쇄국정책을 고수함으로써 맞닥뜨린 비극을 또 맞이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르몽드 지(프랑스 신문사)에서 궁녀로 호칭했던 명성왕후(황후가 아니다.) 민자영처럼 지금으로 치면 AI를 잘 활용하는(총과 성능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에게 이리 붙고 저리 붙고는 하지 말자. 그래서 AI 기술의 여러 알고리즘을 직접 만들자는 것도 아니다.



일상생활에 접목시킬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내기 위한 세상 경험을 많이 하고 이러한 과정 간에 AI를 돈벌이로 활용하는 사람들이 앞으로 대한민국의 본격적인 근대화를 좀 더 앞당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 있는 자각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파이*의 크기를 여러 번 크게 만들 수 있는 혁신과 같은 사고를 터뜨리기를 기대할 수 있다. 마치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을 활용하여 파생된 가상화폐 개발과 그리고 이것의 상용화에서 부산물로 나온 비트코인의 돈잔치(비록 투기이지만)와 같이 일반인들에게 경제적 분배가 이루어진 것처럼 말이다.



* 파이(Pie) : 이윤 분배율로 국민소득에서 '이윤이 차지하는 비율'인데 먹는 파이를 각자의 이윤 분배율에 맞춰 잘라서 나눠줄 수 있는 이미지를 비유하여 사용하지만, 실제로는 누군가 시장의 이윤을 독점할 때 파이를 독차지하다는 표현에 많이 쓰임. 가령 빌 게이츠가 윈도 95에 익스플로러를 끼워 재출시하여 인터넷 브라우저 시장의 파이를 독식했다는 등



참조(Reference)

1) 장선화 백상경제연구원 연구위원(출처 : https://www.sedaily.com/NewsVIew/1ZA9ZRFB06)


2) 김명락. (2020). 이것이 인공지능이다 (pp. 186-188). n.p.: 슬로디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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