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사랑, 인생, 그리고 회복 탄성력(resilience)
브런치에 긁적일 때마다 영어 급신장론(?) 아니면 자국 비판 등 배부른 소리만 떠들어대는 것 같아서 나에 대한 수기만을 이 한 편에 오롯이 담아보려고 한다. 중간에 ‘음감’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겠지만, 절대음감과는 거리가 먼 얘기이니, ‘또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라며 감가상각부터 들어가지 마시기를..
외고나 국제고가 곧 사라진다니, 본인이 하릴없이(정말 어쩔 수 없이;) 졸업한 외국어고등학교의 영어과는 이제 대한민국 고등학교에서 유일무이하게 역사 속으로 남겨질 거 같다(왜냐면 그때도 외고 중에 영어과는 필자의 모교가 유일했고, 앞으로도 영어과가 있는 고등학교는 외고가 부활하지 않는 이상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미국에서 13년 동안 살고 한국으로 돌아와 중학교를 다니다가 그 모교에서 그리고 영어과에서 만난 동창이 있었다. 미국의 뉴저지에서 왔다. 뉴저지의 저택가들이 즐비한 롱 비치 아일랜드인지 혹은 다른 곳인지 소재지는 몰라도 그 당시 나에게는 뉴요커 냄새보다는 뭔가 고풍스러운 느낌의 맨션들이 늘어선 동네의 주처럼 느껴졌다. 당시에 중학생부터 우상으로 여긴 NBA의 그랜트 힐이 디트로이트 주의 농구 선수였는데, 거기랑은 정반대의 이미지였다. 여하튼 나는 고등학교 내내 전교생을 왕따 시키면서 홀로 생활하기를 즐겼는데, 그 여자애가 나보다 키가 조금만 작았더라도 걔에게 용기 있게 내가 빌려준 돈을 갚지 않아도 좋으니 이번 주에 영화 보러 갈래라고 얘기할 수 있었을 거라는 후회가 남는다. 왜냐하면 그녀는 내가 처음으로 이성에게 느낀 몹쓸 감정을 가지게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렇게 순진했었던 시기에 읽은 책이라곤 도서관에서 본 허접한 철학류의 번역서들이었다. 그 책들의 내용이 전부 이해가 될 정도로 부실해서 허접하다는 게 아니라, 내용은 하나도 이해 못하면서 내가 맨날 하는 궁상과 책에 적혀있는 검은 필체가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 스스로 공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에서 나오는 철학용어들을 독자적으로 해석하는 신기에 이룩하여 뭇 철학자들을 내가 일반화한 방정식으로 낙인 시킬 수 있었다. 무지한 자만의 특권이리라. ‘안 그래, 디오게네스, 노자, 하이데거, 쇼펜하우어, 데카르트, 깐트, 지쩩!..’
어릴 적부터 책을 고르기가 이해는 안 되지만 뭔가 있어 보이는 책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름 우뇌가 발달한 성향의 아이들에게 도드라지게 나타나는 특성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있겠지만, 근래에 와서 좌뇌, 우뇌로 갈라지는 편향적 지능 발달은 과학적으로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어쨌든 초등학생 때도 ‘모래’라는 미스터리한 소설을 들고 편의점에 들려서 카운터에서 셰이크(당시에 한국에 처음 들어온 외국 편의점에서 파는 셰이크가 어린 나에게 신선한 맛-설탕 맛-을 가져다줬다.)를 주문해서 기다리면, 당시의 아르바이트생이었던 형이 왈, ‘이야, 그런 어려운 소설을 벌써 읽는 거야.’ 하면 부끄럽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미는 독서라 치고, 특기가 이해하기 어려운 책을 고르기를 고수했던 것을 지금 와서 후회만을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그렇게 붙잡고 집의 책상에 끄나풀처럼 놓였다가 사라지던 책들을 지금에 와서 다시 상봉하기 때문이다. 다시 찾게 되는 ‘회귀’라는 과정도 놀랍지만, 다시 봤을 때 지나온 경험의 맛으로 이해가 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까부라치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론 내린 인생이란 시간의 방향은 서양의 철학사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는 직선형이 아니라 동양의 철학처럼 윤회가 더 들어맞는 거 같다.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면 이러한 4차원 이상의 미래 시간 개념에 대해서 환기할 수 있는데, 인생은 인간이 생각하는 4차원(공간의 3차원과 시간)으로 생각하기에는 우주라는 시공간의 개념을 이해하기가 익숙하지가 않다. 현재의 컴퓨터 구조가 폰 노이만이라는 천재가 발상한 프로그램 내장식 방식이라서 직렬식으로 비트가 순차 처리될 수밖에 없지만, 곧 인공지능이 대세가 되는 날에는 지금의 인간이 주는 명령어만 처리하는 컴퓨터(약 AI)와 달리, 스스로 생각을 만들 수 있는 컴퓨터(강 AI)가 등장할 것이다. 이전에 내장식 방식과 함께 학계에서 자주 인용된 ‘병렬식 전자회로’의 컴퓨터일 수도 있고 지금 계속 떠오르는 기술 중 하나인 양자 컴퓨터 방식일 수도 있겠다. 말하려는 바는 인간의 인생도 이런 병렬식 구조라면 한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에서 지나치는 매개체(medium)들이 그 시기에만 국한해서 반드시 어떤 의미(중요성)가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로 치면, 그 매개물(어려운 책)이 비록 과거의 나(철부지)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었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손에 쥐어졌다는 의미는 직선의 시간 개념을 떠나서 자신의 인생 테두리에서 계속 떠돌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에서 지나쳤다고 생각한 일개의 사건과 인연들이 사실은 그 시기에만 국한되지 않고 인생 전체로 봤을 때 윤회라는 사상과 같이 계속 연결되어 있다는 개념은 마치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주인공 아버지가 블랙홀 속에 갇혀 자신의 과거(본인이 생각하기로)를 미래의 한 시점(현재)에서 계속 마주하고 있는 상황(미래의 인류가 영화 속 인공지능 로봇 타스를 통해 시공간의 개념을 알려준 것)과 비슷하다.
배부른 소리가 나온 김에 더 배부른 소리를 하려고 서두에서 말한 ‘음감’이라는 용어를 언어를 배우는 데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고 또 시작해보겠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그나마 돈 주고 얻는 게 있다면, 아마도 교사들이 교생을 하기 전 교수법으로 전달받는 학습자에게 일어서서 책을 소리 내어 읽게 해라는 거다. 물론 학교에서 사회로 나가기 전에 안전한 보호막 속에서 인간관계를 맺는 과정을 경외 시해서는 안 되겠지만, 초중고를 검정고시로 패스하고 대학 간 사람들이 인성 더럽다는 혹은 친구 없어서 외롭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다.
나름 선생님들이 교실에서 한 학생에게 ‘석, 지훈~ 너부터 18페이지부터 한 문단씩 일어나서 읽어라.’ 하고 수업을 시작하는 게, 학생뿐만 아니라 인간이 말을 하고 익히는 데 가장 중요한 언어 습득력(인간관계의 기초)을 키우게끔 해주는 거라고 깨달았다. 성인이 될 무렵, 책을 소리 내서 읽든, 속발음으로 읽으면 읽는 속도가 떨어질 뿐만 아니라, 문해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여 어느 순간부터 책 읽기는 효율성(속독)만이 갑인 줄 알았다. 하지만 언어 학습에서 가장 큰 성장 동인은 독서인데, 이 읽기를 할 때 자신이 말로 내뱉으면서 동시에 자신이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며 그 말은 즉슨 그와 같은 수준의 내용은 들어도 이해 못하고, 말로도 내뱉을 수 없다는 바와 같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어느 페이퍼북을 영어시험 문제 풀듯이 빨리 보고 정확히 이해한 건지도 모른채 바로 문제 풀이 능력만을 자신의 머릿속에서 만들어 줄 필요가 없다. 자신이 생각키로 쉽다고 생각하는 수준의 원서라도 만약 소리 내어 읽을 때 이해가 곧바로 되지 않으면, 당신의 영어 수준은 그 내용 수준 이하라는 방증이다(이게 ‘셀프 피드백’ 아닌가!). 당신이 번역본으로 술술 읽히는 소설류를 원서로 봤을 때,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은 당신의 모국어 수준만큼 해당 외국어 수준은 필요 충분한 이해력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보다 더 낮은 수준의 페이퍼북부터 읽어서 이해가 되는지 확인부터 해야 한다.
당신이 모국어로는 분야를 막론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도 어쩌면 착각일 수도 있다. 막상 자신 있는 분야의 책이라도 그것을 읽을 때는 무슨 말인지 아는 것 같더라도, 한 페이지만 읽고 누군가에게 설명하려면 말 못 하는 것과 같이 자신이 현재 읽고 있는 원서가 직관적으로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더 쉬운 말로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니라 나열된 단어를 토익 문법 문제 풀 듯, 기계적으로 맞는 말인지 아닌지만 분간할 수 있을 수는 있는 거와 비슷하다. 그것의 행간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면 그것보다 수준이 낮은 원서의 독서부터 반복적으로 함(회귀)으로써 필요한 주변부의 지식을 쌓고 훗날(몇 개월 심지어 몇 년이 지날지 몰라도), 이해 못했던 그 원서 혹은 그와 비슷한 수준의 원서를 펼쳤을 때 갑자기 모국어처럼 장면의 묘사(상상)가 이루어지면서 이해가 되기 시작(모국어로도 해석이 가능)하면 그때는 당신의 외국어 수준이 인생 전체를 두고 봤을 때, 병렬 처리가 이루어져서 당신의 머릿속에 불이 켜진 순간인 것이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그 원서를 읽을 때 느껴지는 어감(음감이 아니고 어감이었음.)이 당신의 뇌리에 새겨지면 그것이 그 언어의 감각으로 자리 잡게 된다. 왜냐하면 당신은 읽을 때 새겨진 그 어감의 청킹(한 번에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 길이)으로 글을 이해할 수 있고, 말할 때나 쓸 때는 그 어감의 논리(말이 나오는 습관)로 당신의 의도를 자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마이클 스코필드의 고민하기 직전에 수크레에게 건넨 말을 뇌리 속에서 잊지 못하고 있다. ‘생각 좀 해보자...’
나 왈, ‘작가가 짜 놓은 시나리오를 생각하는 척하기는...’
나는 영국의 유명한 팝가수 ‘샘 스미스’의 목소리를 사랑하기는 하나, 그가 성소수자라서 그에 대한 이미지가 살짝 변했기는 했다. 웬트워스 밀러도 그가 만약 커밍아웃을 안 했더라면 나의 머릿속에서 그가 여장 연기를 하는 이미지가 한 번씩 스파크(전기)가 튀면서 떠오르지는 않을 것이다. 운이 없게도 나는 ‘프리즌 브레이크’를 처음 시청하고 나서 불과 일주일도 안되어서(시즌 1 중반부터) 주인공이 게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하튼 그의 작중 역할에서 나는 정말 본받고 싶은 게 하나 있다면 그의 천재성도 아니요, 악인까지 포용하려는 성인의 덕목도 아니요, 복원력(resilience)이다. 그가 처음부터 세계 구원을 목표로 폭스 리버 감옥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단지 형이 그의 학비를 몰래 지원해줬을 정도로 그가 몰랐던 형의 모습이 있었다는 것과 형의 죄가 모함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형을 탈옥시키기 위해 작가의 시나리오는 시작했다. 또한 이 드라마의 실화가 미국에 실재하기는 한다. 영화와 같이 성공했는지는 유튜브에서 검색하면 알 수 있다.
마이클이 자신이 근무했던 회사가 폭스리버 교도소 벤치에 쪼여져 있는 나사 하나까지 전부 구매하고 설계 및 건축했었다는 가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탈출 시도였더라도, 시나리오상 그의 탈출 본능은 이미 어릴 때 뇌에서 성장된 타고난 재능이었다는 것을 안다면 지구 어디에 갇히더라도 그는 탈출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드라마 설정 상 엄마의 재능(시뮬레이션 조감 능력?)도 일부 물려받았다. 하지만 초기에 한 번 실제로 경험해본 탈출을 통해 그의 감추어져 있던 잠재력은 점점 커지면서 결국 탈출뿐만 아니라 침입으로까지 응용을 하는 작가의 상상력을 볼 수 있다. 마치 한 번 키운 잔근육으로 인해 고중량의 웨이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펌핑이 엄청 되듯이 말이다. 근육도 그렇고, 영어도 그렇고, 컴퓨터 프로그래밍도 그렇고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전에 잔근육에 해당하는 것이 모든 분야를 막론하고 ‘기초’라는 이름으로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면 인생에서 진리(절대불변의 법칙)를 일찍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그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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