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의 기억은 힘이 세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첫사랑의 기억은 힘이 세다. 불현듯 떠올라 수십 년 세월쯤은 가뿐히 무색하게 만든다. 나의 첫사랑도 그렇다. 초등(사실은 국민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새 학년이 시작되기 전 전학으로 헤어졌지만 지금도 그 아이의 이름과 얼굴이 선명하다. 언젠가 어른이 되면 결혼이라는 것도 할 수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고 헤어진 후 몇 년 간 부치지도 못할 편지를 쓰기도 했으니 그 마음이 꽤나 진지했던 것 같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의 어린 두 주인공 나영과 해성이처럼.
12살 때 헤어졌던 나영(노라)과 해성은 12년 만에 인터넷 공간에서 다시 만난다. 추억을 공유하고 가끔은 서로 그리워했다는 것을 확인하며 전생 같은 과거 인연을 현재로 이어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태평양이라는 물리적 장벽, 꿈을 향해 달리기에도 벅찬 일상의 무게 때문에 두 청춘은 서운한 마음을 가슴에 묻고 아쉽게 두 번째 이별을 하게 된다.
다시 12년. 그 사이 나영(노라)은 결혼을 했다. 하지만 결혼에 이르지 못한 해성의 연애는 주춤한 상태다. 그래서일까? 해성은 특별한 계기 없이 나영을 만나러 미국으로 간다. 무려 24년 만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 두 사람은 비현실적인 상황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연신 “아!”하는 감탄사를 내뱉고 “너구나, 정말 너구나!”라는 말을 반복한다.
두 사람은 함께 뉴욕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해성이 돌아가기 전날에는 나영(노라)의 남편 아서까지 세 사람이 함께 시간을 보낸다. 실제 2, 3일에 불과한 짧은 여정이었지만 둘 혹은 셋이 함께 했던 뉴욕에서의 시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영원의 시간이었으리라.
그리고 다시 이별의 순간이 찾아온다. 해성을 배웅하기 위해 함께 걸어가는 나영.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순간이지만 우버가 올 때까지, 짧은 기다림의 시간은 길고 어색하다. 마침내 우버가 도착하고 해성을 차에 태워 보낸 나영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남편의 품에 안겨 엉엉 운다. 울보였던 12살 나영이처럼.
나영(노라)의 울음은 어떤 의미였을까?
자신을 보기 위해 먼 곳까지 찾아온 첫사랑을 보낼 수밖에 없는 아쉬움과 미안함? 물론 한 켠에는 그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휘몰아친 것은 지난 삶, '패스트 라이브즈'에 대한 모든 기억이었을 것이다. 해성과 이별했을 때의 슬픔, 낯선 나라에서 느낀 두려움, 해성과 다시 연락이 닿았을 때의 설렘, 꿈을 향해 나아가며 경험한 벅참, 해성에게 이별을 통보할 수밖에 없었던 미안함……. 노라 이전 나영이었던 때부터 나영이면서 동시에 노라였던 때까지, 지난 삶 속에서 느꼈던 수많은 감정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을 것이다.
우버를 타고 홀로 공항으로 향하는 해성의 마음은 어땠을까?
“네가 내 인생에서 그냥 사라졌지만 내가 다시 찾았지”라는 일말의 기대가 그를 나영이 있는 미국으로 가게 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내가 널 좋아한 이유는 네가 너이기 때문이야. 그리고 네가 누구냐면, 넌 떠난 사람이야” 라며 과거의 나영도, 현재의 노라도 모두 긍정하며 자신의 미래를 향해 달려간다.
누구나 살면서 한두 번쯤은 하게 되는 경험이 있다. 우연한 그 무엇인가가 꼬투리가 되어 머릿속 깊은 곳에서 침잠하고 있던 기억이 실타래처럼 풀려나오는 순간. 나영에게 해성의 등장이 바로 그 꼬투리가 아니었을까? 가장 순수해서 가장 힘이 셀 수밖에 없는 첫사랑의 존재가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노라의 '패스트 라이브즈'를 깨우고 살려낸 것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경구처럼 아무리 큰 기쁨도, 아무리 깊은 슬픔도 다 지나가게 마련이다. 또한 그 사람이 없으면 단 한순간도 살지 못할 것 같이 절절한 사랑도 시간의 힘 앞에서는 무력하다. 삶이 덧없고 허무한 이유다.
그러나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무수한 지난 삶이 오늘의 나와 깊게 연결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찰나의 순간이 찾아온다면, 우리는 허무의 늪에서 벗어나 다시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잊히고 사라져 결국 아무것도 아닌 듯 느껴져도 내가 숨 쉬고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 또한 분명 내일의 나와 연결되어 있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패스트 라이브즈>가 성장과 성찰을 이야기하는 삶의 영화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