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척의 일생(Life of Chuck)
아무런 정보 없이 영화를 보러 갔다.‘척의 인생’인지,‘척의 일생’인지 정확한 제목조차 모르고 말이다. 잡지에 실린 한 줄 평에 혹해서다.‘결국 인생은 하나의 장면으로 기억된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생의 마지막 순간 기억되는 단 하나의 장면이 무엇일까, 궁금했던 것이다. 영화는 전체가 3막, 거꾸로 가는 역순으로 구성돼 있다.
3막. Thanks Chuck
흔한 재난영화의 클리셰를 보여준다. 땅이 꺼지고 통신이 두절되고 사람들이 떠나고……. 그 정신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거리, TV, 라디오에서 뜬금없는 광고를 계속 내보낸다. "39년 동안의 근사했던 시간, 고마웠어요 척!"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기 위해 길을 떠나고 마침내 만난 그들은 저 멀리서 들려오는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별이 하나씩 사라지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소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사랑한다”는 마지막 말조차 끝내지 못하고.
2막. Buskers forever
3막 말미, 병상에서 힘겨워하던 그가 등장한다. 광고“Thanks, Chuck”의 주인공인 39세 회계사 척 크랜츠. 회계사들의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들른 한 도시에서, 척은 버스킹 드러머의 리듬에 이끌려 숨겨둔 댄스 실력을 공개하게 된다.
‘고지식해 보이는 회계사는 어떻게 이런 엄청난 춤 실력을 갖게 되었을까?’ 관객들의 자연스러운 의문에 영화의 내레이터는 척이 수개월 후 뇌종양으로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1막. We contain multitudes
어린 시절 척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부모님과 뱃속에 있던 여동생을 동시에 잃는 아픔을 겪었지만 조부모님의 정성스러운 돌봄 속에 반듯하게 성장한다. 할머니는 척에게 댄스의 즐거움을 알려주었고 회계사였던 할아버지는 수학의 유용함 나아가 아름다움까지 설득시켰다.
따뜻하고 행복한 가정이었지만 단 하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다락방에 대해서만은 숨기는 것이 있는 듯 말을 아꼈다. 심지어 무거운 자물쇠를 채우고 척이 절대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선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홀로 남게 된 척은 마침내 다락방의 문을 열게 되는데, 그 방에서 척은 무엇을 보았을까?
척은 불편부당(不偏不黨) 그 자체인 숫자를 다루는 회계사다. 그의 삶 역시 무미건조했으리라. 게다가 죽음이 드리운 그림자와 가까이 살아온 39년 일생이라니, 음울하고 애달프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화는 도입부 첫 장의 긴장만 견디면 내내 따뜻하고 사랑스럽다. 특히 2막의 댄스 버스킹 장면은 영화의 주제를 응축한 하이라이트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척은 세차게 뛰는 심장박동 소리를 닮은 드럼비트와 함께 열정과 환희를 맛본다.
짐작대로 영화의 문을 열었던 3막은 척의 죽음을 의미한다. 한 사람의 죽음은 일상의 파괴는 물론이고 세계의 종말, 수많은 별이 사라지는 전 우주의 명멸과 같다는 뜻이다. 그렇게 암흑 속으로 사라진 척은 불과 수개월 전 거리에서 행복하게 춤을 추었던 사람이었고 더 오래전에는 호기심 많은 귀여운 소년이었다. 3막에 등장한 광고("39년 동안의 근사했던 시간, 고마웠어요 척!")의 의미가 어렴풋이 감지된다.
이처럼 죽음에서 시작한 영화의 여정은 인생의 마지막 기억으로 남은 강렬한 순간을 지나, 자칫 외로움과 슬픔에 침잠할뻔했던 소년이 예술, 문학, 수학과 더불어 자신만의 인생을 시작하는 첫출발의 순간에 이르러 닻을 내린다.
결국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유한한 삶이지만, 그 매 순간이 생의 마지막을 함께할 빛나고 아름다운 기억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하여 관객들에게 영화를 보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또한 영화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숨겨둔 비범함을 드러난다. 굳게 닫힌 다락방의 문을 열고 모두가 알고 있지만, 모두가 모른 척 살아가는 불가항력인 삶의 진실을 드러내 보여주고,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 깊은 여운을 남긴다.
척은 다락방에서 자신의 마지막 즉 죽음을 목도하게 되는데 이 순간, 삶은 죽음과 하나로 연결된다. 엔딩 크레디트가 모두 올라갈 때까지 계속된 다락방 장면. 원작자 스티븐 킹과 감독 마이크 플래너건은 주인공 척뿐만 아니라 우리들 모두를 그곳에 세우고 묻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죽음이 예정된 당신,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요?”
영화에서 수 차례 언급한 월트 휘트먼(1819~1892)의 시 '나 자신의 노래(Song of Myself)'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고 한다.
“태어나는 것이 행운이라고 여긴 사람이 있는가?
나는 그에게, 혹은 그녀에게 서둘러 말하노니
죽는 것 또한 그에 못지않게 행운이며,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Has anyone supposed it lucky to be born?
I hasten to inform him or her it is just as lucky to die, and I know it.”
우리는 결국 태어나면서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검은 죽음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 허무하기 그지없는 삶, 하지만 우리에게 허락된 태어남과 죽음 사이, 삶이라는 공간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빛날 수 있다.
“버스커 포에버”를 외치며 생애 마지막 기억을 만들 수도 있고, 지겨운 수학과 씨름하며 다른 사람을 돕고, 세상을 이롭게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수많은 것을 품고 있는(We contain multitudes), 작지만 위대한 우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이들의 삶과 죽음에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Thanks, Everybody”
P.S.
홀로 눈 뜬 밤이 되면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의 구멍이 한없이 끌어당기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부질없는 생각에 진저리를 치며 머리를 흔들어보지만 마음은 결국 허무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한다. 어쩔 도리가 없다. 어슴푸레 떠오르는 해를 기다릴 수밖에…….
하지만 이제는 좀 다를 것 같다. 주문을 외듯, 나지막이 “Thanks, Chuck!”이라고 소리를 내 보는 것만으로도 온기가 온몸으로 번질 것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