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순에 나를 다시 낳았다"

미자(美子)에서 지영화(池泳澕)로, 이름에 물길을 트다

by 명리하는 영화

나에게는 잊고 싶은 이름이 하나 있다.

‘미자(美子)’. 아름다울 미(美)에 아들 자(子).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잔인한 소망이 숨겨져 있었다. 딸만 줄줄이 셋이 나온 집안, "제발 다음에는 아들이기를, 아들을 낳는 아름다운 징검다리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간절함이 내 이름의 재료였다.


나는 4녀 1남 중 넷째 딸이었다. 가장 아들을 고대했을 그 타이밍에 또다시 ‘딸’로 태어난 죄. 나의 탄생은 축복이 아니라 탄식이었고, 내 이름은 내가 아닌 태어나지도 않은 남동생을 부르는 주문이었다.


그래서일까. 학창 시절 출석부에서 “지미자”라고 불릴 때마다 나는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그 이름이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너는 주인공이 아니야”라는 확인 도장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의 낮은 자존감은 어쩌면 그 이름에서부터 자라났는지도 모른다.


불난 집에 나무를 던지다

서른 즈음, 나는 결심했다. 내 운명을 내가 다시 짓기로. 그때 나는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는 뜻을 담아 스스로 ‘영화(榮華)’라는 새 이름을 지었다.


미자의 굴레를 벗어던진 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나는 내 모든 열정을 불태워 신을 섬겼다. 하지만 명리학을 공부하며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내 타고난 사주가 ‘병오(丙午)’, 즉 하늘과 땅이 온통 불바다인 뜨거운 태양이라는 것을.


그런데 내가 지은 ‘영화’의 한자는 모두 나무(木) 기운이었다. 불난 집에 나무를 던져 넣은 격이었다. 나는 30년 동안 나를 태우고 또 태웠다. 그것이 헌신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나를 재로 만드는 일이었다. 내 사주에는 열기를 식혀줄 물(水)이 한 방울도 없었다.


내 안에 깊은 연못을 파다

그래서 나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 다시 한번 개명(改名)을 감행했다. 이름은 그대로 두되, 한자를 모두 물의 기운으로 바꾼 것이다.


연못 지(池), 헤엄칠 영(泳), 물 깊을 화(澕). ‘지영화(池泳澕)


이제 나는 단순한 불덩어리가 아니다. 나는 내 이름 속에 깊고 푸른 연못을 팠다. 그 연못은 나의 뜨거운 열정을 식혀주는 쉼터이자, 메마른 세상에 지혜를 퍼 나르는 마르지 않는 샘이다. 그리고 나는 그 위를 자유롭게 헤엄치는 고래가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나는 ‘완성’되었다. 아들을 바라는 도구였던 ‘미자’는 갔다. 자신을 태워버리기만 했던 ‘영화’도 쉬게 해 주었다. 지금 내 곁에는 뜨거움과 차가움, 열정과 지혜를 모두 갖춘 ‘지영화’가 웃고 있다.


사람들은 묻는다. 이름만 바꾼다고 운명이 바뀌냐고.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운명이 바뀌어서 이름을 바꾼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귀하게 여기기로 결심했기에 이름이 바뀐 것이라고.


환영받지 못했던 넷째 딸. 하지만 이제 나는 내 이름의 주인으로, 내 우주의 주인공으로 당당히 섰다. 누가 뭐래도 지금의 내가 나는 참 좋다.


“안녕, 지영화. 이 세상에 온 걸 환영해. 너는 존재 자체로 온전한 빛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