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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환 Oct 23. 2019

예술이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다시 채워져 갈 마음의 공간

꽃구름 위를 걷는 듯한 기분


꼬박 2년이 걸렸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스스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수고 많았어, 아주 많이 칭찬해" 대학원 입학 합격증(Immatrikulation)을 손에 들고서는 한참 동안 그렇게 '셀프 칭찬'을 해주었다. 유학의 뜻을 품고 독일로 이주한 지 2년 만에 이뤄낸 나름의 쾌거였다. 한국을 떠나기 두 달 전 처음 독일어를 배우기 시작한 이래, 대학원 입학에 필요한 어학 점수를 취득하기 위해 달려온 시간은 먹구름 속을 헤매는 것과 같았다. 지난 2년간의 애환이 몰려왔다. 운동과 다이어트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몸무게는 계속 줄어들었다. 통장잔고가 바닥을 향해 내려갈수록, 한숨은 깊어졌다. 한숨 한 번에 100그램 몸무게를 덜어내는 것 같았다. 잠자리에 누우면 요동치는 심장 박동 때문에 괴로웠다. 밤마다 불안감에 휩싸여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독일에 온 첫 번째 목적을 성취했다. 험난한 과정 끝에 받아 든 합격증이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꽃구름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단풍이 보기 좋게 물든 10월. 나는 베를린 동북부에 위치한 바이센제 국립예술대학교(Kunsthochschule Berlin Weißensee)에서 석사과정을 시작했다. 분단 시절,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은 각각 인문대학교와 예술대학교를 하나씩 세웠다. 독일의 다른 도시들이 대부분 인문대학교와 예술대학교를 각각 1개씩 운영하는 반면, 베를린은 분단의 과정에서 2개의 인문대학교와 예술대학교를 운영했다. 통일된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우리 학교는 구(舊) 동베를린에 있던 예술대학교이다. 구동독 시절, 국립 실용 예술대학교로 활용된 학교이다. 통일 이후에는 '바우하우스의 교육이념'을 실천하고자 배움 자체를 예술의 대상으로 삼았고, 다양한 예술 분야를 통합해 가르치며 새로운 형태의 예술가를 기르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1919년, 독일의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 (Walter Adolph Georg Gropius)는 바우하우스 예술학교를 설립했다. 독일 나치에 의해 1933년 학교가 폐쇄될 때까지 '새로운 예술'에 가치를 두고 교육했다. 설립자 그로피우스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독일의 정치와 경제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술(Kunst)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말했던 '새로운 예술'은 기존의 비생산적인 예술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예술을 통합한 생산적이며 실용적인 '총체적 예술'을 의미했다. 그로피우스는 학교의 명칭에 의미를 남겼다. '바우하우스'를 직역하면 '건축의 집(건축 Bau+집 Haus)'이다. '건축의 집'이라고 하여 디자인을 생산하는 직능인을 배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고, 개인의 삶을 구원할 '급진적 사회개혁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은 그의 철학이 학교 명칭에 담겨있다.


'공간전략'이라고 불린다

나는 그곳에서 'Raumstrategien(라움슈트라테기엔)'을 공부했다. 우리말 '공간'을 뜻하는 '라움(Raum)' '전략(Stratrgie)'이 합쳐진 단어이다. 해석하면 '공간전략'이라고 불린다. 얼핏 들어선 무엇을 연구하는 학과인지 모를 것이다. 쉽게 설명해 보겠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국가들은 "이제 전쟁은 그만하자!"라고 선포하면서 통합의 가치를 전면에 내세웠다. 영토 뺏기는 그만하고 '공간'을 공유하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후 유럽연합(EU)이 탄생했고, 경제적 통합을 넘어 정치적 통합을 향해 가고 있다. 유럽의 정치인들은 '세계화(Grobalisierung)'라는 명명하에 '공간의 통합'을 시도했다. 그런데 통합의 과정에서 문제가 드러났다. 자본주의(Kapitalismus)가 발목을 잡았다. '자유 무역'을 권장하는 세계화는 유럽 정치에서 극우주의(Rechtsextremismus)가 다시 고개를 들게 만드는 모순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수백만 명의 난민이 유럽으로 유입되면서 '공간을 공유하기'로 했던 유럽연합의 국가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특히,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Brexit)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세계화'는 큰 위기를 맞았다.


'공간전략(Raumstrategien)'은 현재 유럽의 정치적 문제를 주요 담론으로 삼는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유럽의 정치적 문제의 해결책을 예술(Kunst)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학문이다. 100년 전 그리피우스의 '바우하우스'의 교육철학을 연상시킨다.


내가 독일로 유학을 가기로 한 이유도, 입학 합격증을 받아 들고 그토록 뭉클했던 까닭도 이 때문이다. 예술에서 우리나라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의 해결책을 찾고 싶었다. 독일처럼 우리나라도 전쟁 후 분단되었다. 독일은 통일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분단된 상태다. 우리 사회의 '분단'은 독일보다 훨씬 복잡하다. 단순히 남, 북한이 지리적으로 갈라져 있는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나는 이질적인 부분들을 포괄한다.


한반도의 분단은 미국과 소련의 대립으로 상징되는 냉전체제의 형성과 동시에 이뤄지면서 지리적 분단은 물론, 이념적 분단도 심화됐다. 남한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축출되고, 북한에서는 민족주의자들이 박해를 받았다. 또한, 북한에서는 토지개혁, 국유화 등 사회주의 체제가 자리 잡았고, 남한에서는 시장경제가 발달하면서 자본주의 체제가 형성되었다. 이념의 분단 위에 체제의 분단까지 더해진 셈이다.


이 어려운 문제를 겁도 없이...

후... 어렵다. 글을 쓰면서 다시 한번 곱씹어봐도 분단이 만들어낸 정치적, 사회적 갈등은 정말 어마어마하다. 나는 이 어려운 문제를 겁도 없이 첫날 오리엔테이션(O.T)에서 꺼내 들었다. 긴장감에 떨리는 목소리로 독일어 인사를 건넸다.

"나는 코리아에서 온 김영환이다"

"독일의 통일 과정을 배우기 위해 학교에 지원했다"라고 말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어디선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진 지도 교수의 어이없는 질문과 당황스러운 답변이 훅 들어왔다.

"Kommst du aus Süd oder Nord? (너 남한에서 왔어? 아니면 북한에서 왔어?)

"Das ist mir egal(뭐 어쨌든 상관없어)"

"Ich stimme das nicht, die deutsche Wiedervereinigung war Quatsch. (나는 동의하지 않아. 독일의 통일은 어리석은 짓이었어)"

헉! 뭐지? 첫날부터 이런 답변을 들을 줄은 정말 몰랐다. 분단의 정치적 갈등이고, 뭐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 생각과 전혀 다른 지도 교수의 반응에 큰 충격을 입었다.


아... 젠장, 꼬였다.


독일 데사우(Dessau)의 바우하우스 건물이다. 1919년 바이마르에 설립했다가 1925년 데사우로 옮겼다. 바우하우스는 단순하고 세련된 형태와 구성으로 '현대 디자인의 고전'이라 불린다. 100년 전 지어진 건물임에도 참 세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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