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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환 Oct 20. 2020

녹슨 로얄 살롱이 나를 품어주었다.

 열등감과 수치심으로 가득했던 마음의 공간 

좋은 자동차를 타고 싶었다.


독일에 살면서 즐거운 것 중 하나가 자동차 구경이다. 자동차 애호가들의 로망이라 불리는 브랜드의 자동차들이 길거리에 즐비해서다. 그래서 나는 길을 걸을 때 정면을 주시하는 일이 드물다. 항상 시선을 살짝 사선으로 기울이고, 자동차 박람회에라도 온 듯 줄지어 주차된 자동차들을 구경하면서 걷는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차를 발견하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내부 인테리어까지 꼼꼼하게 살펴본다. 그러고 나면 왠지 모르게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확실히 자동차는 나에게 동기부여가 되어준다. 어려서부터 좋은 차를 타고 싶은 마음이 커서다.




중학교 3학년이었던 1992년 가을. 아버지가 차를 바꾸셨다. '로얄 살롱'. 맵시나에 이어 아버지가 선택한 두 번째 대우자동차였다. 우리집의 첫 번째 자동차였던 '맵시나'는 처음 출시될 때부터 '포니2'에 밀려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로얄 살롱은 달랐다. 80년대 국내 고급 승용차 시장에서 상당한 인기를 누렸던 차종이다. 딱 10년 전에 아버지도 이 자동차를 타셨더라면 "사장님" 소리 꾀나 들으셨을 텐데... 안타깝게도 화려했던 시절을 다 보낸 후에 우리집으로 끌려온 이 녀석은 '로얄(Royal)'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게 군데군데 녹이 슬어있었다. 그래도 과거의 영광만큼은 잊지 않으려는 듯 왕관 모양의 로고는 여전히 반짝거렸다. 한물간 연예인이 걸친 유행 지난 장신구처럼 저가 촌스러운 줄도 모른 체 말이다.

차 문을 열자,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소설 ‘향수’에 등장하는 그르누이처럼 냄새를 구성하고 있는 하나하나의 미세한 냄새까지 분석할 수 있는 후각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천 시트에서 풍기는 찌든 담배 냄새와 환기구에서 새어 나오는 곰팡내 정도는 누구나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차 안은 고약한 냄새로 가득했다.

아버지의 궁여지책은 모과를 뒷좌석 선반에 얹어두는 것이었다. 어디서 모과가 방향 효과가 있다는 얘기를 들으신 거다. 모과는 탄닌이 많아 떫은맛이 나는 과일이다. 그래서 과육을 직접 먹지 않고 대신 차나 청, 술로 만들어 먹는다. 잘 썩지 않고, 휘발성있는 강한 향 때문에 종종 방향제로도 사용된다. 하지만 10년 된 ‘로얄 살롱’ 안에서는 역효과만 불러왔다. 아무리 신선한 모과를 갖다 논들 찌든 냄새는 지워지지 않았다. 지난 10년간 다섯 명의 차주를 거쳐오면서 밴 냄새가 모과 향과 뒤섞여 아주 괴이한 냄새를 만들었다. 10분만 차 안에 있어도 멀미가 날 정도였다.


나는 고물이 다 된 로얄 살롱을 타고 싶지 않았다.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정말 너무 창피할 것 같았다. 늦잠을 자서 지각을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절대 아버지가 태워주는 ‘로얄 살롱‘을 타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다짐은 얼마 못가 위기를 만났다. 나의 습관적인 늦잠 때문에 지각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로얄 살롱을 타지 않으면 백 퍼센트 지각하는 상황. 결국 내 다짐 따위는 코를 푼 휴짓조각처럼 버려졌다. 차를 안 타겠다고 우겨도 봤지만 결국 돌아오는 건 아침부터 험악한 말이 오가는 집안 분위기와 교문 앞에서 엎드려뻗쳐 자세로 빠따를 맞는 것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로얄 살롱이 나를 학교 앞까지 데려다주는 것을 허락했지만 그때 마다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리는 것만 같았다. 제발 우리 반 누구도 나를 보지 않길 바라면서 차 문을 열자마자 아버지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교문 안으로 달려들어 갔다. 나는 교실에 도착할 때까지 전속력으로 달렸다. 고개를 숙인 채.


심장 고동이 멈춘 듯, 창백한 얼굴로 담임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내 옆에 서 있는 엄마의 안색을 살필 겨를도 없이 나는 고개를 가슴 앞까지 처박고 있었다. 1993학년도 고입선발고사에서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 합격선 점수보다 5점이 모자란 점수를 받았다.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는 학교의 요청에 따라 엄마를 학교에 모시고 온 것이었다. 담임 선생님은 용산구 내에 야간 고등학교가 있는 몇 개의 학교를 소개해주었다. 그중 H고등학교는 2부 수업이 야간이 아닌 정오경에 시작해서 오후 6시쯤 수업이 끝난다고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2부 고등학교 등록시한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 서두르는 게 좋을 거라는 사무적인 충고도 잊지 않았다. 엄마도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담임의 이야기를 다 들은 엄마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나를 일으켜 교무실 밖으로 나갔다. 교무실 밖에는 내 표정을 살피려는 녀석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내가 지나가자 녀석들은 수군대기 시작했다. 엄마의 얼굴이 방금 야단 맞은 아이처럼 붉어졌다. 나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삼키면서 엄마를 앞질러 교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교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로얄 살롱' 안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고등학교 입시에 떨어진 놈을 구경하려는 녀석들의 가혹한 시선 때문인지 히터로 데워진 로얄 살롱의 천 시트가 웬일인지 포근하게 느껴졌다. 그제야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로얄 살롱은 말없이 달렸다. 운전하는 아버지도, 담임 앞에서 창피를 당한 엄마도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나는 뒷좌석에 앉아 몸을 뒤채기 시작했다. 로얄 살롱이 어디로 가는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로얄 살롱은 발버둥 치는 나를 태우고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H고등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날카로운 기계음 같은 브레이크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차창 너머로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시선이 차창 너머 사방으로 흩어지는 진눈깨비들을 하나씩 좇는 동안 나는 앞으로 다가올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염려 때문인지 길을 잃고 헤매는 것처럼 점점 더 막막한 심정이 되었다.

"다 왔다. 내리자!" 침묵을 깬 건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지만, 어절마다 단단한 옹이가 져 있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몸을 움츠린 채 입술만 달싹거렸다. 또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그토록 타기 싫어했던, 폐차 직전의 로얄 살롱 안에 버티고 앉아 한참을 울기만 했다. 말이 없는 적요한 공간이 내 눈물로 번져갔다.

갑자기 기울어진 가세(家勢). 잦은 이사로 인한 불안정한 생활. 부모님은 사춘기 아들의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시는 듯 담담한 태도로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 2부 고등학교에 안 갈래요. 차라리 재수해서 보란 듯이 실수를 만회하고 싶어요. 나는 결코 내 인생이, 뻔한 삼류 영화가 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나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부모님을 설득했다.

내 말이 끝나고 잠시 후 로얄 살롱은 가래 끓는 듯한 시동 소리를 내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곤 교문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




아버지, 우린 언제 좋은 자동차 타요?

로얄 살롱에 대한 기억은 여기서 끝났다. 아마도 이날 이후 나는 또다시 녀석을 창피하게 생각했나 보다. 아버지의 세 번째 자동차는 대우의 로얄 프린스였다. 이 녀석도 좋은 시절을 다 보내고 한물간 상태로 우리집에 끌려왔다. 언제나처럼.



사진출처: http://www.senatorman.de/Rekord_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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