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질감 극복을 위한 프로젝트
초저녁 하늘이 수심 가득한 눈망울처럼 그렁그렁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베를린에선 흔하게 볼 수 있는 잿빛 하늘이지만 이날 만큼은 조금 특별한 의미를 담은 듯 보였다. 9월의 중턱을 지나는 날씨치곤 바람도 제법 차가워 두툼한 외투의 때 이른 등장이 낯설지 않을 정도였다. 궂은 날씨에도 종종거리며 하나둘 모여들더니 어느새 백여 명 남짓한 사람들이 베를린 미테구 소녀상 앞에 집결했다.
2020년 9월, 베를린에 소녀상이 세워졌다. 독일에 세워진 세 번째 소녀상이었다. 베를린 미테(Mitte) 구청은 “소녀상이 전쟁 피해 여성의 인권을 상징한다”면서 코리아협의회가 제안한 설치를 허가했다. 그러나 설치 9일 만에 기존 입장을 번복하고 철거 명령을 내렸다. 갑작스러웠지만 놀랄 일은 아니었다. 지금껏 수없이 반복되었던 일이었다. 과거의 잘못을 감추려는 일본의 노력은 소름 돋을 만큼 집요하고 끈질겼다. 일본 외무성과 일본 극우단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미테구청을 압박했다. 그렇게 또 하나의 소녀상이 철거될 위기 앞에, 팔을 벌려 가로막고 나선 건 독일의 시민사회와 젊은 구의회 정치인들이었다. 일본의 철거 압박이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고 했다. “전쟁 중에 일어난 범죄를 감추고 왜곡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다수의 독일인을 대표해 그들이 나선 것이었다. 내친김에 미테구의회는 소녀상 영구 존치 결의를 투표에 부쳤다. 결과는 찬성 24표, 반대 5표, 압도적으로 소녀상을 지켜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평화의 소녀상 앞이 다시 시끌벅적 소란스러워졌다. 분명 좋은 일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구의회가 ‘영구 존치 결의안’을 의결했으나, 구청의 입장은 달라진 게 없었다. 소녀상을 지키려는 시민들의 한바탕 소동(?)이 잠잠해지길 기다렸다는 듯 영구 존치 논의는 실종되었고, 소녀상 관련해선 어떤 공식 자료도 내지 않았다. 시민 단체의 문의는 회피해 버리기 일쑤였다. 사실상 소녀상 철거를 꾀하는 것 아니냐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한국 언론을 통해 소식을 접한 서울 성북구의 청소년들이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을 지켜달라며 손으로 꾹꾹 눌러 쓴 감사 편지 3,600여 통을 보내왔다. 하지만 미테구청은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라며 수령을 차일피일 미루더니 수개월이 지난 후에야 전달되었다. 그리고 내려진 결정은 설치 1년 연장. 그동안 구청 직원들이 일본의 집요한 압박과 괴롭힘 때문에 소녀상 이야기만 꺼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는 전언이 들려왔다. 나는 마스크로 가린 입 밖으로 시원하게 욕 한번 지껄이고 싶었다. “징글징글한 쪽발이 새끼들!”
가늘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젊은 정치인들이 소녀상과 마주한 연단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2021년 독일 총선거(Bundestagswahl 2021)를 앞둔 시점임에도 꽤 많은 정치인이 동참했다. 그들은 각자 준비한 연설을 마치고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연설에 귀를 기울이며 박수를 보탰다. 소녀상 앞에 모인 사람들이 득표에 도움이 될 거로 생각한 걸까. 연이어 다양한 국적,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소녀상과 함께하겠노라”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 중엔 탈레반을 피해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한 여성 운동가도 있었다. 나도 무리 한쪽에서 서 있었다. 1년 전에도, 그리고 그날에도. 연설을 듣다 말고 나는 가슴에 손을 갖다 댔다. 심장 박동은 깊고 강했다.
"그래 여기는 베를린이다!"
총탄에 맞아 부서진 흔적 위에 돋을새김 되었을 수많은 정치적 구호들. 자유와 억압, 삶과 죽음 같은 변증법적 대립항으로 사고할 수밖에 없었던 공간. 모든 사상과 생각은 기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닐 터, 하지만 굳이 그 실체를 찾아야 한다면 베를린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소녀상 앞에 모인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베를린은 화려하지 않다. 로마, 파리, 프라하처럼 유서 깊은 역사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어디를 가나 죄다 전쟁의 흔적들뿐이다. 벽에 박힌 총탄 자국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다 보면 생각도 아득해진다. 베를린은 아물지 않은 역사의 상처를 서슴없이 내보이며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허락한다. 다양한 인종, 문화, 사상, 예술이 이곳에서 공존할 수 있는 것도 역사의 시간이 이방인들을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베를린에 정착했다. 가장 먼저 베를린에 정착한 이방인은 유대인이었다. 이곳에서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았다. 그들의 자녀는 독일의 시민이 되었지만, 부모 혹은 조부모의 종교에 따라(1935년 뉘른베르크 법과 부속 명령에 명시된 나치의 인종주의 기준) 유대인으로 분류되었다. 나치는 ‘인종청소’라는 명목하에 유대인들을 수용소에 격리했고,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Arbeit macht frei!)“ 구호를 외치며 유대인들을 선동하고 유린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학살은 베를린 근교에서 자행됐다.
나치가 물러가고, 서늘한 죽음의 기운을 덮어버린 것은 이데올로기였다. 극단적으로 변한 이데올로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상만 나눈 것이 아니라 먹고, 자고, 활동하는 공간마저 둘로 나눠버렸다. 높이 3.6미터, 길이 106킬로미터의 장벽이 공간의 소통을 완전히 가로막아버렸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베를린은 재건을 위해 또다시 이방인들을 불러들였다. 그들 중엔 우리의 삼촌, 이모도 있었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남겨진 가족들을 위해 노동과 희생의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된 이방인들에게 베를린은 기회의 공간이었다. 김포공항을 떠나며 “돈 많이 벌어서 조국에 돌아가리라!”던 공언이 무색하게 낯선 공간은 역사의 시간을 지나면서 익숙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포탄에 맞아 부서진 것은 부서진 대로, 잔혹한 학살로 희생된 이들을 위해 도심 한복판에 넓은 홀로코스트 기념공원을 조성하고, 묘비 하나 없이 사라진 이들에겐 그들이 머물렀던 공간 위에 가로세로 10센치미터의 동판(Stolpersteine)을 새겨줄 줄 아는 도시가 베를린이다. 오래전 장벽으로 갈라졌던 공간의 공백은 여러 나라의 예술가들이 그들의 작품으로 채워 넣었다.
가늘게 내리던 빗줄기가 그치더니 구름 사이로 햇빛이 변덕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소녀상을 향해 비스듬히 내리쬐던 햇빛은 청동 재질에 닿자마자 튕겨져나갔다. 순박한 표정과는 달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소녀상의 절개가 느껴지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래 다행이다. 베를린이어서.”
슈톨퍼슈타인(Stolpersteine):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이란 뜻으로 걸릴 때마다 유대인 희생자들을 기념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코리아협의회: 한반도의 역사, 정치, 사회, 문화를 관심있는 모든 이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동시에 함께 협력하고 참여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는 한독 시민단체이다.
코리아협의회는 인권 및 시민운동을 주요하게 다룬다. 경제, 언론, 정치, 노동단체, 종교, 환경, 여성운동, 예술과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독일 내, 유럽 내, 국제적인 범위의 비정부기구와 시민단체, 전문가들과 협력하고 있다. 1990년에 발촉되어 활발한 사업을 펼치고 있으며, 독일 쾰른시에 위치한 아시아하우스 재단 (Stiftung Asienhauses)’의 창립단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