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오늘의 TMI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현 Sep 09. 2020

그림을 망치고 나면 드는 생각들.

도피, 그 달달함에 대하여

망한 그림은 없다지만 오늘도 그림을 한 장 망쳤다.


그림을 시작한 지는 2년이 조금 안된다. 기간을 헤아리기 편한 건 2019년도 1월에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년 9개월, 사람에 따라 다르고 어떻게 보냈느냐에 따라서 평가가 갈리는 기간이다.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일 수도 있고 한 분야를 공부한다는 면에서는 겉핥기도 제대로 하지 못할 짧은 시간일 수도 있다.


그 기간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림에 전념했냐고 묻는다면 '아니오'. 처음에는 많이 헤매기도 했고, 배워가는 재미를 느끼기도 했으며, 어느 정도 그림이 그려질 때는 안주하기도 했고, 슬럼프에 빠지기도, 자꾸 이런저런 핑계로 주제를 바꿔가며 도피하기도 했었다. 물론 열정적으로 사용했던 시간도 많았다. 하루에 여러 장씩 그림을 그려가며 즐기고 기록했으며, 이동거리는 마다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모임이라면 모두 참석하기도 했으니.


어느 순간부터 딜레마에 빠지기 시작했다. 잘 그리고 싶어서 열심히 그리니깐 힘이 들어가서 더 안 그려지는 상황이 오고, 마음을 편하게 먹고 힘을 빼고 그리다 보니 또 안 그려지는 상황. 그렇게 안 그려지니 자꾸 그리기가 싫어지고 뒷심도 부족해졌다. 난 이 상황을 슬럼프라 불렀고, 겪은지는 꽤 되었다. 사실 즐긴 적도 있었다. 이런 정체 속에서 아등바등 발버둥 치다 보면 또 한 단계 업그레이드가 되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흔히 그림은 계단식으로 는다고 표현한다. 한동안 정체되다가 한 칸 올라가고 또 정체되다가 한 칸 올라가고, 서서히 올라가지 않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는 모두가 힘들어한다고 많은 그림쟁이들이 말을 한다.

나 또한 많이 겪어봤고 지금 이 상황도 언젠간 또 극복할 거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순간이 고통스럽지 않다는 건 아니다.



유튜버중에 '닥터 보노'라고 '팩트'리어트 미사일을 장착하고 일러스트레이터 지망생들을 후 드려 패시는 분이 있다. 종종 나도 영상을 시청하면서 뼈를 맞고 오곤 하는데 그분은 슬럼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슬럼프가 와서 갑자기 안 그려지는 게 아니라 실력이 거기까지인데,
눈은 높아서 그 이상을 그리고 싶기 때문에 힘든 거예요."

아프지만 맞는 말이다. 실력이 부족해서 안 그려지는걸 누굴 탓하겠는가. 연습하고 공부하고 계속 그려야지.


누구나 뭔가가 안 풀리면 도망가고 싶은 순간이 생긴다. 사람과의 관계나 일이라면 어떻게 부딪혀라도 볼 수 있으나 나 자신과의 문제라면 더욱 쉽지 않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곳엔 달달한 유혹이 도사리고 있다. 이불과 핸드폰. 이불속에 들어가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켠다면 짧게는 30분 길게는 몇달까지도 현실을 잊고 지낼 수 있다. 그러나 마무리는 대체로 허무하다. 결국은 현실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몇 주 전, 에세이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들었던 내용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은 에세이를 쓰게 되면 '자기감정을 오롯이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에세이는 결국 글감이라는 수단을 빌려 '나를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까 그림을 한장 망치고 잠시 넷플릭스로 도피를 할까 계획을 세웠었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브런치를 켰다. 글을 쓰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동안 내 감정과 생각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자신과의 대화를 오랫동안 나누곤 했다. 생각해보니 만약 그림의 도피처가 글이 되고, 글의 도피처가 그림이 된다면 꽤 괜찮은 시너지일것 같다.


앞으로 꾸준히 글을 쓰게 될 것 같다. 그림을 망치는 만큼 슬럼프가 날 괴롭히는 만큼. 정면 돌파를 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다. 그저 무책임한 도피대신 나를 달래고 치유하는 수단을 글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늘지 않을까? 그림도 글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