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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지 Sep 05. 2022

번역의 기술

문학을 아름답게 번역하고 싶다.

     독서를 즐긴다. 특히 문학은 곱씹어 읽는다. 마음을 대변하는 문장을 만나면 멈추어 감탄하고, 미소 짓게 되는 장면이 나오면 눈을 감고 머릿속에 그려본다. 하얀 종이와 검은 글자를 읽어 내려갈 때, 좁은 문 너머 존재하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엿보며 전율한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작품에서 드러나지 않은 각 등장인물의 삶을 상상한다. 그렇게 좁은 문 너머로 걸어 들어가 상상으로나마 그 세상을 경험한다. 그러니까 나는, 단순히 책이나 문학을 좋아하는 것만은 아니다. 문학이 주는 이러한 총괄적 경험을 즐긴다. 독서를,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다. 명확한 이유는 문학 번역가로서 역할을 수행할 때 커다란 방향성이 된다.




     번역에도 당연히 공식이 있다. 우리말과 영어의 구조적 차이를 분석하여 각 형태소를 어떻게 다시 배치해야 자연스러워지는지 알려주는 법칙이다. 시작이 막막하게 느껴진다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명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라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러한 공식을 따르다 보면 문장의 맛과 깔이 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줄거리는 명확히 전달할 수 있겠으나, 원저자가 그려낸 세상을 온전히 전달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비유하자면, 번역은 명화를 새로운 캔버스에 옮겨 그리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원문의 의미를 똑같이 옮겨오는 작업은, 말하자면 명화를 도식화하여 새로운 캔버스에 단색으로 좌표를 찍는 것과 같다. 세세하게 옮길수록 모양새는 얼추 비슷해지겠지만, 아무리 세세하게 찍어도 단색으로 옮겨온 점묘화에 지나지 않는다. 동일한 색감, 질감, 강조점을 덧입히는 작업이야말로 진정 번역가가 풀어내야 하는 영역이리라 믿는다.




     나는 번역할 작품이 정해지면 최대한 많은 글을 읽는다. 영어로 쓰인 작품을 번역한다면, 영어로 그 작품에 관하여 쓰인 모든 글을 읽으려고 애쓴다. 원저자가 작품에 관하여 언급한 부분, 논문이나 잡지에서 다룬 해설과 해석, 일반 독자가 적어놓은 한줄평 까지도 놓치지 않는다. 숨겨진 은유와 비유, 문학적 장치를 찾아 저자의 모든 의도를 파헤쳐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모습이 내 안에 어느 정도 구현되었다 싶을 때, 초벌 번역을 시작한다. 


     우리말로 초벌 번역을 완료하였다면, 우리말 글을 읽고 또 읽는다. 우리말로 쓰인 문학작품 중에서 번역하는 작품과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작품이 있다면 찾아 읽는다. 우리말을 구사하는 사람 중에서 내 안에 구현된 원저자와 비슷한 인물이 있다면, 그의 말을 찾아서 읽고 또 읽는다. 그리고 마침내 원저자가 나의 상상 속에서 우리말로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나는 상상하고 또 상상하며 내가 번역한 문장을 다듬는다.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나는 영감의 신봉자다. 번역하는 방법을 강의해달라는 요청에 언제나 난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공지능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얼추 비슷한 방법으로 번역을 연마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머릿속에 최대한 많은 정보를 집어넣고, 영어를 읽는 순간 가장 마음에 쏙 드는 우리말 문장이 떠오르기를 바라는 것이다. 조금 과장을 더하면, 문학 번역은 원문에 영감을 받아 번역문을 창조하는 행위라고까지 생각한다. 물론 나와 원저자의, 원작과 번역본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서 끊임없이 확인하고 살펴야겠지만 말이다.


     번역을 잘하고 싶다. 언제나 더 잘 해내고 싶다. 시간이 흐르며 경력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실력이 향상되겠지 싶다가도, 발전과 도태를 거듭하는 언어의 특성을 생각하면 이는 안일한 기대일 뿐이라는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내가 독자로서 문학을 즐겁게 여기는 이유가 명확하다는 점이다. 그러니, 더 많은 사람들이 번역 작품을 읽고, 곱씹고, 감탄하고, 그리고, 상상할 수 있도록, 그렇게 문학을 더 깊이 즐기게 되도록, 나는 오늘도 눈이 얼얼해지도록 읽고 또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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