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지 Aug 31. 2022

최소한의 예의

떨리는 마음으로 간절히 외쳐본다.

     번역가는 언어 전문가다. 대다수의 번역가는 출발어와 도착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르 불문 오역 논란은 끊이지가 않는다. 물론, 문맥상 강조나 스타일 반영을 위해서 번역가가 의도할 때가 있다. 그러나 비난의 대상이 되는 부분은 어처구니없는 번역들이다. 


    전문가의 작업물에 비전문가가 한눈에 잡아낼 수 있는 오류가 생겨나는 이유는 뭘까?




     번역기가 좋아져서 그런지, 번역이 기계적인 업무처럼 보일 수도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일까, 의뢰인은 촉박한 작업 일정을 요구한다. 그냥 번역기 돌려주셔도 되거든요,라고 덧붙이며 터무니없는 단가를 부탁하기도 한다. 바쁠 때야 쿨하게 거절할 수 있지만, 당분간 한가하고 통장 사정은 빈곤한 번역가는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세워야 간신히 해낼 수 있는 일정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한 시간에 두 장을 번역했으니, 20장은 10시간에 해낼 수 있으리라 희망하며 작업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100미터 달리기에서 12초를 기록했으니 1000미터를 2분 안에 돌파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과 같다. 


     피로가 가랑비처럼 쌓인다. 


      젖는 줄도 모르고 번역가는 타자를 두드린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눈은 글자를 읽는데 머릿속엔 입력되지 않는다. 모니터 쪽으로 몸을 더 바짝 기울여본다. 가랑비에 정신이 젖어들었다. 물먹은 것처럼 무거워졌다. 원문을 읽고 또 읽는다. 머릿속은 점점 더 텅 비어 간다. 모든 것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미간을 찌푸리며 눈이 아프도록 화면을 응시해도, 번뜩이던 번역문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결국, 단어 단위로 사전을 찾는다. 


      이것저것 갈아 끼우며 억지로 문장을 만들어 본다. 그야말로 기계처럼 손가락을 움직인다. 어색한 번역문이 탄생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자연스러운 우리말이 어떤 건지, 분별력을 잃었다. 마감의 압박 때문에 침대에는 눕지 못한다. 새우잠으로 연명한다. 한 번 더 읽어보지 못한 채로 비몽사몽 납품한다. 허겁지겁 마감을 쳐내다 보니 오타가 수두룩 빽빽이다. 나중에 다시 읽어보니, 잘못 번역한 부분이 살짝 끼어있다. 단어 단위로 문장을 보느라, 문맥을 잘못 이해한 탓이다. 

    



     번역가도 사람인지라 잘못 해석할 수 있다. 잘못된 해석이 머릿속에서 굳어지면, 작업을 마친 직후에는 오류를 잡아낼 수가 없다. 생각이 이미 치우쳐있기 때문이다. 실수를 잡아내기 위해서는 작업물과 거리를 두고 머리를 식히는 시간이 필요하다. 1시간 분량의 짧은 번역에도 최소 3일 이상의 기간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오역은 온전히 번역가의 잘못이다. 컨디션에 따라 활약이 달라지는 것처럼, 번역가도 컨디션에 따라 번역의 질과 속도가 확연히 달라진다. 작업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 번역가는 컨디션 관리에 언제나 힘써야 한다. 그러나 번역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지켜져야 하는 게 아닐까. 번역가가 두고두고 자괴감에 시달리지 않도록, 컨디션을 조절하며 작업할 수 있는 여유가 보장되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언어의 목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