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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지 Oct 20. 2019

휴가 말고 방학

단연컨대, 어른의 방학은 더 달콤하다.

12월 15일 - 1월 31일 

겨울 방학 일정이 나왔다. 아 물론 내가 정했다.  

애초에 출근 개념이 없는 프리랜서 주제에 웬 방학이냐 할 것이다.  휴가라고 얘기하면 되지 굳이 ‘방학’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도 이상할 것이다.


하지만 내게 지금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휴가가 아니라 ‘방학’이다.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은, 한 겨울 매서운 추위를 살짝 비껴가는, 겨울 방학.



참 좋았던 방학의 추억

나의 방학들을 떠올려보았다.  

동그랗게 방학시간표 그리던 초등학교 방학은 너무 멀리 갔고, 제일 가까운 대학교 때 방학부터 떠올려본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후회되는데, 2학기 때 취업을 하는 바람에 야근으로 지새웠던 마지막 4학년 2학기 겨울 방학부터,  졸업과 불안한 미래로 괴로웠던 4학년 1학기 방학.

마냥 들뜨는 새내기의 마음으로 MT와 여행으로 가득 찼던 1학년 1학기의 방학,

왠지 한 학년 올라가니 전공 공부를 제대로 해야 할 것 같아 학원 등록을 잔뜩 해놓았던 2학년 2학기의 방학.


고등학교 때 방학은 미술학원 특강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특강이 없는 날이면 학교 다닐 때는 갈 수 없었던 전시들을 보러 다니기 위한 스케줄로 가득 채웠었다.



그래, 그렇게- 사실 나의 방학은 “쉼”이라는 단어로 정의되지 않았다.  

나에게 방학은 루틴처럼 반복되던 강요된 일상을 잠시 멈추고, 나를 재정비하는 기간이었다.  

해서 즐거움과 휴식이 필요한 때는 훌쩍 여행을 가버리기도 했고,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보충하기도 했다. 때로는 배우고 싶었던 것들을 배우고,  무수히 쏟아지던 생각들을 정리하고 다시 시작되는 새로운 학기를 준비한다.



방학은 휴가가 아니다.
강요된 일상을 잠시 멈추고, 나를 재정비하는 기간이다.



휴가와 방학의 차이를 구분 짓는 방법으로 주유소와 정비소의 비유를 들고 싶다.

휴가를 통해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듯이 앞으로 가는 힘을 다시 충전을 한다. 정비소에서는 지금까지의 운전을 점검하고, 고장 난 곳은 없는지 살펴본다. 방학도 그렇다. 우리가 어떤 한 기간 동안 잘 지내왔는지 스스로 평가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하고 재정비한다.

방학이라는 정비소 앞에서 우리는 충분히 쉴 수도 있고, 새로운 기기를 장착할 수도 있고, 바퀴를 교체할 수도 있다.

나는 이렇게 나 스스로를 재정비하는 기간이 간절하다.


휴가는 앞으로 갈 수 있도록 재충전하는 기간이고, 방학은 나를 되돌아보고 재정비하는 기간이다.


기말고사 기간 같은 요즘, 방학이 너무 간절해

요즘 나의 생활을 보면, 헥헥 되고 있다는 표현 말고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일단 받은 일들은 열심히 해야 하고, 분명 받을 때는 재밌다고 생각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일 폭탄인 경우가 다수다. 의욕 넘쳤던 퇴사 직후와 달리, 하루빨리 프로젝트들이 마무리되고, 방학기간이 왔으면 좋겠다.


'방학'이라는 두 글자의 단어만 떠올려도, 그 기간에 할 수 있는 수만 가지의 일들이 떠오른다.

우선, 한 삼일쯤은 늘어지게 자야지. 나는 하루 종일 자는 날들은 오래가면 몸이 쑤시더라. 쌓인 피로를 푸는 날들은 삼일이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이주 정도는 여행을 가야지. 조금 멀리, 멀리.  아무도 나에게 연락 못하게끔 유심칩도 로밍도 없이 가는 것도 좋겠다. 그럼 은근한 자랑과 함께 숙소에 도착해서야 답장을 해야겠다. '아 미안~ 나 지금 외국이야' 하고.


잠과 여행으로 어느 정도 즐기고 나면, 배우고 싶었던 것을 배우고 싶다.  새로운 취미도 좋고, 요즘 나에게 아쉬운 것들도 좋다. 예전에는 글쓰기 수업을 꼭 들어야 하나 싶었는데, 글이 11개째가 되면서 반복되는 구조와 문장에, 아 이래서 수업을 듣나 싶다. 매일 뒷전으로 밀리는 불어도 공부하고 싶은데, 단연컨대 불어는 내 우선순위에 계속 밀려 이번 방학에도 못 배우겠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들에 치여 계획만 세우고 하지 못했던 나의 작은 프로젝트들을 해나갈 것이다. 나의 작은 가게도, 요즘 들어 부쩍 하고 싶어 졌던 작은 호텔도.  


방학에 할 수 있는 것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한껏 들뜨는 것 같다.


방학 과로사 주의


프리랜서는 365일이 방학 아냐?

내가 나 스스로에게 방학기간을 정했다고 하니, 친구 몇이 동시에 이렇게 말했다.

"프리랜서가 무슨 방학이야. 매일매일이 방학 아냐?"

친구들말에 완벽하게 부인할 수는 없었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앞서 방학의 장점은, 강요된 일상에서 벗어나서 나를 재정비하는 것이라고 했다. 만약 프리랜서 생활 중에 하는 프로젝트와 일상이 나의 의지로 잘 굴러가고 있다면 방학을 별도로 정할 필요가 없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아직 초보인 나는 클라이언트와 '주어진 일들을 묵묵히 열심히 하는 습관'에서 벗어난 방학기간이 간절했다.


또 방학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정해진 기간'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정해진 기간은 여러 의미를 지니는데, 첫째로는 나 스스로가 너무 늘어지지 않도록 잡아주는 마지노선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나만의 작은 무언가를 기획하고 있다면  작은 성과를 볼 수 있도록 하는 데드라인의 기능을 한다.  마지막으로, 해보고 싶었던 것을 빠르게 실험해보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프리랜서의 삶은 멀리서 보았을 때, 엄청나게 길어진 방학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무엇이든지 길어지면 그 처음의 의미가 퇴색되고 한없이 늘어지듯이, 스스로를 재정비하는 기간을 일정기간으로 정해두고 실행에 옮기는 것은 누구에게나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달이면 한 달, 두 달이면 두 달, 내가 생각하기에 마음이 편한 만큼 방학이라는 기간을 나를 위해 떼놓는 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더 쉬울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방학의 효능은 나와 같은 프리랜서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매일매일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퇴사자 분과, 취준생 분들, 혹은 가정 주부분들도 '방학'을 세워보시기 바란다. 각자가 꿈꾸는 방학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많이 충전되는 것을 느낄 것이다.



한 달이면 한 달, 두 달이면 두 달,
내가 생각하기에 마음이 편한 만큼
방학이라는 기간을
나를 위해 떼놓는 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더 쉬울 것 같다.


막연하게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 가운데, 나를 위한 시간을 떼어놓는 것이다.


방학의 필요조건은 시간이 아니라 마음의 여유

출근을 하는 직장인은 방학을 갖기가 매우 어렵다.  회사 다닐 때를 떠올려보면, 일주일이라도  '나'를 위한 시간을 떼놓는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어딘가에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나도,  한 달 반씩이나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이 용기에는 비단 금전적인 이유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 기간 이후에 내가 뒤쳐지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함, 혹시 무척 좋은 클라이언트를 놓치지는 않았을까 하는 불안함, 그 이후에 더 좋은 휴식기간이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하지만 우리 모두, 길고 긴 우리 삶 속에서 한 달 내지 두 달은 정말 별거 아닌 기간이라는 것을 안다.  스스로에게 방학을 선물하면서 놓친 기회들은, 다시 학기가 시작되면 채우면 그만이다.  스스로가 방학이 반년 이면 반년, 일 년 이면 일 년이 필요하다고 해도 결코 지나치게 긴 기간이 아니다.  만약 나 스스로가 그 기간 동안에 충분히 재충전될 수 있다면 그 기간에 이룰 수 있었던 백가지의 기회보다 더 소중한 기간이 될 테니 말이다.


그러니 방학 기간에 '할 수도 있었을' 일들, '놓칠 수 도 있을' 기회들은 생각하지 말자.

휴가를 내는 것이 어려운 직장인들은 조금만 용기를 내어 길게 휴가를 내보자.  회사 다닐 때 나의 마지막 방학은 지난여름에 있었던 한 달 간의 휴직기간이었는데, 내가 먼저 대표님께 제안을 드렸었다.  그 기간은 나를 재충전하고, 새로운 일들을 시도해보기 위한 충분한 준비기간이 되었다.  아, 이렇게 나처럼 극단적으로 일을 그만두라는 것은 아니고 - 그만큼 방학을 갖기 위해 시간을 '얻기 위한' 행동들을 조금 용기를 가지고 하라는 얘기다.



어른의 방학은 더 달콤하다.

대학교 2학년 1학기 방학이었던가.  방학 내내 학원 스케줄이 잡혀있었다.  학기 중에도 7시에 겨우 일어나는 나에게, 7시부터 강남에서 토플학원 스케줄이 잡혀있었다. 그냥 편하게 생각해봐도 학기 중보다 오히려 더 '힘든' 방학이 될 텐데, 마지막 과제 제출 날 - 방학이 시작하던 그날-은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집에 가는 내내 싱글벙글했더이다.

어쩌면 우리를 '재충전'하는 것들은, 막연한 쉼이 아닌 나 스스로가 선택한 작은 행동 하나하나 일 것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성인이 된 우리는, 한 살 한 살 먹어갈수록 '스스로' 선택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체중만큼이나 빠르게 부풀어가는 책임감이, 앞날에 대한 걱정이, 쉴 수 없다는 강박에 - 우리는 방학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하지만 내가 확실하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어른의 방학은 훨씬 더 달콤하다.

책임감에, 걱정에, 강박에 쫓겨 달려온 학기에 마침표를 찍고, 오로지 '나'에 집중하는 방학은 그 기간이 얼마나 됐건 그다음 학기를 시작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그다음 학기를 반드시 해야만 했던 학생들과 다르게, 어른의 방학의 끝에는 또 다른 새로운 길이 펼쳐질지도 모른다.  방학 때 할 수 있는 일들도 제곱으로 많아진다.  그래서 어른의 방학은 훨씬 더 달콤하다.




12월 15일 - 1월 31일.
나는 올해 두 번째 방학을 준비하고 있다.

비행기표도 틈틈이 찾아보고, 뭘 배울 지도 고민해본다. 프로젝트 끝나는 기간과 내년 프로젝트 수주 날짜를 고려해서 기간도 딱 정해놓았다. 나만의 프로젝트를 위해 해야 할 것들도 틈틈이 리스트로 작성해 본다.


하지만 사실 무엇보다 나를 설레게 하는 것은 방학 때 '무엇을' 할지 보다,

방학이 끝난 이후에 내가 어떻게 변해 있을지를 상상하는 것이다.


우연히 닿은 여행지가 마음에 들어 그 도시에 눌러앉아버릴 수도 있다. 내 자체 프로젝트가 잘되어 내년에는 클라이언트 없이 내 일만으로 먹고 살 수도 있다.  하지만 꼭 그렇게 극단적으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더라도, 내가 이번 학기 동안 느끼고 경험했던 것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큰 발전이 될 것이다.


나는 이렇게 오늘도,

나의 겨울 방학을 상상하며 한 발짝 내디뎌 본다.




-FIN-

11화 : 휴가 말고 방학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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